[최원영목사]십자가에 얽힌 스토리_채찍과 가시면류관 (막15:6-20)

  • 입력 2023.03.31 16:48
  • 수정 2023.04.01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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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려주일설교

1.예수: 고난으로 가득 찬 인생

예수님의 삶 자체를 연구하면, 전체가 고난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의 삶의 흔적들을 깊이 묵상하고 들여다보면, 주님의 고난을 볼 수 있으며 또 그 고난 뒤에 있는 하나님의 깊은 은혜를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1)주님은 하늘의 신적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셨습니다.

왜 인간의 몸으로 이땅에 오셨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가지고 이땅에 사람이 된 것 그 자체가 고난입니다.

거룩하시고 존귀한분이 낮아지고 낮아지신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2)그분의 삶을 살펴보면 고난의 삶 이었습니다.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셨고, 형제들이 많아 늘 일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역하는 동안 늘 가난하고, 불쌍하고, 병든자와 소외된 자, 마음이 상처를 받은자와 함께하시며 그들을 위로하고 치료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이땅에 오신 목적을 이루기 위해 십자가에서 최후의 고난을 선택하셨습니다예수님의 삶 자체가 고난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고난을 짊어지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이지요아랍권이나 회교권에서 개종한다는 것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포기하는 것과 같지요, 생명을 포기하는 것과 갔지요.

예수님을 선택하면서 짊어져야할 고난의 댓가가 너무 큰것이지요. 그런 고난을 이길 수 있는 힘은 내가 믿는 예수님이 먼저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했기에 따라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십자가의 사랑을 다시 되새겨보길 원합니다.

 

2. 예수님의 최후의 고난은 어떤 고난이었습니까?

1)대제사장들의 시기와 충동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했습니다.

명절에는 죄수 중 백성들이 원하는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습니다.

명절이나 광복기념절에는 우리나라에서도 특사제도가 있습니다. 형기를 다 채우지 않고 내보내는 제도이지요.

빌라도가 군중들에게 묻습니다. 민란의 주도자인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유대인의 왕인 예수를 놓아주기를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10,11절 말씀을 함께 읽습니다. “대제사장들이 시기로 예수를 넘겨 준 줄 앎이더라”, “그러나 대제사장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도리어 바라바를 놓아 달라하게 하니

 

예수님은 대제사장들의 시기와 충동으로 십자가에 넘겨지게 된 것입니다시기심은 사람을 죽이는 동기를 제공합니다.

(1)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죽였습니까? 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는 응답하시고, 가인의 제사는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기분이 상한 것입니다. 그 시기심으로 인해서 동생을 죽였습니다. 모든 살인의 동기에는 시기심이 있습니다.

 

(2)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인사청탁을 합니다. 당신의 나라에서 내 자녀들을 좌우에 앉혀달라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해 제자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났습니다. 내분의 동기가 무엇입니까? 시기로 시작된것입니다. 시기심은 자신도 공동체도 다 파괴합니다.

 

대제사장들은 시골에서 근본도 없이 자란 사람이 유대인들의 스타가 된것이 마음에 큰 짐입니다. 기분이 상한것입니다. 자신들의 종교적 기득권이 무너질까봐 무리를 충동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죽인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시기심으로 인해 사람들을 충동했습니다. 그리고 힘을 합해서 여론 재판을 합니다.

과거 광우병으로 인한 촛불집회도 여론 재판이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경험했습니다.

시기심과 충동은 기독교적 가치가 아닙니다. 시기심과 충동은 자신도 파괴하고 다른 사람도 파괴하는 죄악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종교지도자들의 시기심과 충동으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2)다른 사람의 만족을 채워주기 위해 버려지는 고난이었습니다.

15절 말씀을 같이 봅니다.

"빌라도가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하여 바라바는 놓아주고 예수는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니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예수님에게 죄를 찾지 못했습니다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재판을 끝냈습니다.

(1)단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죄가 없지만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습니다.

여기에는 정의도 없습니다. 양심의 가책도 없습니다. 진리의 호소도 없습니다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습니다. 오직 만족을 주기위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던져버린것입니다.

 

(2)신앙생활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이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의 목표는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자기 만족이라는 체면에 걸리면 더 이상 양심도 인격도 신앙의 성숙도 없습니다자기 만족을 위해서 헌금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찬양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봉사하고, 자기 만족을 위해서 기도하면 안됩니다.

 

(3)우리는 때로는 신앙생활하다가 자기 만족이라는 수렁에 빠질때가 있습니다.

자기만족이 채워지면 열심히하는데, 어느 순간 자기 만족이 떨어지면 헌금도, 봉사도, 기도도, 기본적인 예배생활도 다 포기합니다. 자기만족은 거품입니다. 거품은 언젠가는 꺼져버립니다.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우리는 아름다운 성숙한 믿음의 흔적을 남겨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다른 사람들은 잘 압니다.

자녀들은 더 잘압니다. 부부는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어떤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는지 잘 압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신앙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4)자기 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합니다. 또한 무리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게 됩니다. 누군가가 충동하면 사실을 알려고하지 않고 따라 외칩니다.

신앙은 자기 만족이 아닙니다. 자기 만족은 늘 자기가 기준입니다기분 좋을 때는 한없이 잘하는데, 기분이 상하거나 여건이 힘들어지게 되면 포기하게 됩니다신앙은 내 기분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해야 합니다. 말씀에 비취어 보면서 해야 합니다. 그래야 쓰러지지 않습니다. 그래야 견고한 신앙인이 됩니다말씀에 뿌리가 없고, 자기 기분이나 만족을 위해서 교회생활하면 언젠가는 무너지게 됩니다.

 

(5)사단은 아주 교묘합니다. 나보나 나를 더 잘 압니다.

내가 무엇이 약한지를 잘 알지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이 사단입니다인간의 삶에 3가지만 조심하면 좋은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돈과 성과 권력(명예욕)입니다.

사단이 돈에 약한 사람은 물질로 공격합니다. 성에 약한 사람은 성적인 문제로 치고 들어옵니다. 입이 방정맞은 사람은 입술로 찾아옵니다. 명예에 약한 사람은 명예로 치고 들어와서 넘어뜨립니다.

 

(6)빌라도는 사실에는 관심 없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것에만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사단의 앞잡이가 된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인간입니까?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인물로 역사의 기록속에 영원히 남겨진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생활할 때 우리는 늘 말씀과 십자가앞에 자신을 비추어보야합니다자기 만족인지, 자기 기분인지, 자기 생각인지를 수시로 마음의 본질을 바라보와야 합니다.

당이 높은 사람은 살기위해서 당 수치를 늘 체크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 늘 신앙을 체크해야 합니다.

 

(7)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함정에 잘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자기 기분과 자기 감정과 자기 만족에 충실하면 안됩니다. 성숙하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어린이들은 자기가 기준입니다그러나 청소년기를 지나고 어른이되면 더 이상 자기가 기준이 아닙니다. 다른사람들의 생각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8)사도요한은 신앙의 성숙도를 말하는데 어린이와 청년과 장년이 있다고 합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라고 권면합니다.

자라야합니다. 인격이 자라고, 성품이 자라고, 생각이 자리고, 비전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야 합니다. 자라면 자기 만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있습니다.오직 예수님으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가득차시기를 바랍니다.

 

3)주님의 고난은 채찍에 맞았습니다

예수님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무리들로 인해서 목요일 밤에 예수님을 체포하고 금요일 새벽까지 짧은 시간동안에 일곱번을 왔다갔다하며 재판을 하게 됩니다.

안나스의 집으로, 대제사장의 집으로, 빌라도에게로, 그리고 또 헤롯에게로, 다시 빌라도에게로, 왔다갔다하는 재판의 과정을 하룻밤에 일곱 번이나 했습니다. 여러 차례 재판을 위해서 예수님을 끌고 다녔습니다.

 

(1)무죄한 예수님이 죄인이 되었다

그리고 드디어 빌라도로부터 "채찍질하라"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으라는 판결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죄인된 것입니다. 특별히 죄인이 아닌 사람이 죄인으로 선고받은 것입니다.

주님은 죄인이 아닌데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변명도 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정당성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누구하나 예수님이 죄가 없다고 변호해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주님을 변호해야 될 제자들도 다 도망갔습니다.

죄도 없는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정치적인 죄목으로 징역이 아니라 사형을 받게 되었습니다.

 

(2)예수님은 죄인이기에, 매를 맞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채찍질하라는 것입니다.

채찍질 자체도 무서운 형벌입니다. 채찍은 가죽끈으로 만듭니다. 그리고 끝에다가는 납덩이를 답니다. 아니면 짐승의 뼈를 조각해서 그 끝에다가 답니다.

그리고 죄인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매달아 놓거나 아니면 기둥에다 붙잡아두고 채찍질하게 됩니다. 로마 병정들은 워낙 채찍질하는 것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에 채찍을 휘두르게 되면 이 채찍이 몸에 휘감기게 됩니다.

그 정도 아픈 것은 괜찮은데 그 다음에 잡아당길 때 그 채찍 끝에 있는 납덩이와 뼈 조각이 바로 살가죽을 뜯어내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채찍 형벌 때문에 사형언도를 받지 않았는데도 죽은 사람이 허다 합니다채찍을 몇 대 맞고 정신이 미친 사람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채찍질은 죽음의 전주곡입니다. 채찍질은 고난이요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예수님은 39차례의 끔찍한 채찍으로 온 몸이 다 찢어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갔습니다.

 

(3)채찍속에 있는 깊은 영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채찍 속에서 그 고난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서 53장에서 채찍의 의미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안을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주님이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습니다.

채찍의 고통을 통해서 우리의 연약한 육체를 고치셨습니다. 우리를 낳게 하셨습니다주님의 고난은 우리에게 치료의 은혜를 제공합니다. 질병을 고치시고, 상처를 고치시고, 시험을 이기시고, 죄인을 온전케 하신 치료의 광선을 비취신 것 입니다.

채찍에 대한 찬양 가사가 있습니다.

"빌라도의 군인들이 때린 채찍에 찢어져 피로 물든 주님 등허리, 온 인류의 질병을 속하셨으니 치료의 강물에서 넘쳐 흐르네"

주님의 채찍의 고통, 살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 주님의 찔리신 그 고난의 흔적 그 자리에 바로 치료의 생수, 치료의 강물이 넘쳐 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바로 우리들이 이 치료의 강물에서 상처를 씻을 수 있습니다우리의 어리석음을 씻고, 절망을 씻고, 고통을 씻고, 고독을 씻고, 눈물을 씻고, 병을 씻읍시다. 우리의 죄악을 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채찍의 맞음으로 우리가 치료받았습니다우리가 아플때 병들었을때 마음 고생을 할때 예수님을 의지하십시다.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의지하십시다.

 

4)주님은 가시면류관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17,18절 함께 읽습니다. 예수에게 자색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엮어 씌우고 경례하여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1)예수님에게 자색옷을 입혔는데 홍포라고 하는 것입니다.

임금과 귀한 사람은 붉은 옷을 입습니다. 실제로 옷을 입혀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놀리기 위해서 로마 병정이 입고 있는 망토 가운데 하나를 벗어서 이 망토를 예수님의 어깨에 덮어준 것입니다. 그야말로 놀림감이죠. 이거 입고 왕노릇 한 번 해 봐라.

그리고 다른 성경에 보면은 예수님의 손에 갈대를 쥐어 줬습니다임금님의 홀이라는 것이죠. 왕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말합니다갈대와 홍포를 입혀놓고 한번 왕노릇하라고 무시를 하는 것입니다.

 

(2)가시관을 머리에 씌웠습니다.

가시면류관은 사막에서 나는 뽀족하고 날카롭고 억센 가시나무를 엮어서 만듭니다. 그것을 예수님의 머리에 머리에 씌웠습니다.

가시로 만든 관을 머리 위에다가 씌울 때 가시가 머리에 박히거나 혹은 찢기면서 피가 흐르고 고통이 주어집니다. 가시면류관에는 조롱과 멸시와 희롱의 아픔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웃음거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그런 의미에서 가시면류관은 채찍질보다 더 큰 고통이었습니다영광의 면류관이 아니라 고통의 면류관입니다.

 

(3)비웃고 조롱함_"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라"

18"경례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가장 불행한 자리와 가장 고통스러운 자리와 가장 모욕적인 자리에 사람을 앉혀 놓고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하라."고 합니다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라는 비웃음과 조롱이 난무하고 있습니다영의 눈이 닫혀버렸기에 진짜 유대인의 왕을, 인류의 구원자를 비웃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눈이 열리기를 축복합니다.

영적인 세계가 더 깊이 열리기를 바랍니다. 믿음의 세계를 걸어가기 위해서는 영적인 세계가 열려야 합니다. 영적인 세계가 열리면 다 믿어집니다. 믿어지면 하나님의 영적 세계가 열려집니다.

비록 빌라도의 입을 통해서 말씀했지만, 그분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왕앞에 우리의 헛된 교만을 벗어버립시다. 우리의 세상 욕심을 벗어버립시다.

그 분이 왕이시면 나는 섬기는 종이 됩니다. 그 분이 내 집의 왕이시면 우리의 집은 초가집이라도, 사글세, 월세 방이라도 궁궐이 됩니다. 그 분이 왕이시면 십자가도 영광이 됩니다. 그 분이 왕이시면 채찍도 치료가 됩니다. 그 분이 왕이시면 가시관도 승리의 면류관이 됩니다. 그 분이 왕이시면 우리는 그 분에게 철저하게 순종하고 철저하게 충성해야 됩니다.

십자가의 주님, 피 흘리신 주님, 그러나 그 분은 나의 왕이십니다우리는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서 다시 한 번 확신해야 됩니다. 고백해야 됩니다. 주님은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과정을 본 백부장이 고백을 합니다.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이방인도 영적인 눈이 열렸습니다. 비참하게 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과 입술로 고백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나의 영원한 왕이십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인정해야 합니까예수 그리스도 나의 왕으로, 나의 창조자로, 나의 치료자로, 나의 구원자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다스리시기 때문입니다.

 

(4)너는 가찌다_"머리를 치고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함"

19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며 침을 뱉으며 꿇어 절하더라

그리고 갈대로 예수님의 얼굴과 머리를 때리고 주님의 얼굴에 침을 뱉었습니다. 그리고 절했습니다.

여러분 주님은 이러한 고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오신 메시야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과 따뜻함의 진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너는 가짜다. 너는 위선이다. 너는 허위다그야말로 예수님의 인격을 모독하고 짓밟는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때로는 억울함을 당했지만,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무시 당할 때 어떤 감정과 기분이 듭니까? 어떤 순간 인정받지 목할 때, 무시당할 때, 얼마나 억울하고 배반감이 크겠습니까?

"나는 자식들이 인정을 안해, 나는 우리 집에서 더 이상 부모가 아니야. 그 때의 부모님의 마음이 얼마나 쓸쓸하고 슬프겠습니까? 우리가 더 이상 인정받지 못하고. 우리의 존재가 부인되고, 우리의 존재가 무시되고, 그 동안 내가 땀흘리고 수고한 것이 다 무시될 때 얼마나 억울하고 고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우리가 무시당하는 것보다 더 치욕적인 고통을 받았습니다.

바로 오늘 말씀에서 주님이 당하는 큰 고난은 바로 가시면류관를 씌어놓고 조롱하는 것입니다. 로마 군인들은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이라고 놀렸습니다. 침을 얼굴에 뱉었습니다. 갈대로 때렸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하는 행위가 무엇인지 모르고 재미로 했을 것입니다.

주님의 마음에 고통을 준것은, 고난의 현장에 제자들이 없었고 다 도망갔습니다왜냐하면,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에 처형당할까봐 도망을 갔던 것입니다그러나 수제자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히자 멀찌감치 따라갑니다대제사장의 뜰에서 다른 사람들과 불곁에 있다가 한 여종이 베드로를 향해서 말합니다.

이 사람도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베드로는 즉시 부인합니다. “나는 네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

두 번째, 이 사람이 그 도당이다. 베드로가 부인합니다.조금후에 곁에 있던 사람들이 말합니다. 너도 갈릴리 사람이 참으로 그 도당이니라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가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3번째 부인할 때 닭이 곧 두번 울었습니다22:61 이 사건을 아주 상세하게 다루고 있습니다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베드로가 나는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부인하고 저주하고 있을때에 예수님은 베드로를 보고 계셨습니다.

우리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가장 믿었던 제자 베드로, 가장 믿음직한 대답을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앞에서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친히 선택하시고 3년간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자신의 전부를 드려 제자들을 사랑했고 그들에게 모든 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제자들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습니다세상사람들은 나를 누구라 하느냐? 선지자요 모세요 엘리야중에 하나라고 합니다그러면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냐고 물었습니다베드로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예수님의 본질을 아주 정확하게 대답했습니다.주님의 마음이 너무 기뻤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칭찬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마음을 기쁘게 했던 베드로가 고난의 현장에서 예수님을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베드로가 서로 눈이 마주쳤습니다그리고 베드로는 그 현장에서 도망쳐서 밖으로 뛰어나와 통곡하며 울었습니다.

그 부인했던 현장에 주님과 베드로의 눈이 마주 쳤는데 주님이 베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그 때 혹시 주님이 마음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시지 않았을까요? "베드로야 정말 너도 그렇게 생각하느냐? 정말 너도 나를 모른단 말이냐? 그것은 그 분에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큰 비참이었습니다가장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배반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고난중에 큰 고난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이 잊지말아야할 신앙의 시금석입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기독교의 본질과 가치를 회복하는 언어입니다. 십자가에는 채찍, 면류관, 비웃음, 조롱, 무시, 멸시, 천대, 고통과 죽음이 지배합니다.

채찍과 면류관은 예수님의 고난의 흔적입니다채찍과 면류관 받고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은 우리의 영원한 왕입니다이 왕 앞에 고백합시다. 주 예수여 오소서, 나를 다스리소서, 나를 치료하소서그리고 나의 왕되신 주님앞에 진실한 일꾼되게 하소서나의 왕이신 주님이 나의 영광이 되소서.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우리 이 시간 주의 이름을 높이는 마음으로 이 찬양을 함께 드리면서 말씀을 정리하십시다"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왕이신 나의 하나님.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 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등
저서로는 충성된일꾼되어가기, 제자세우기 40일 영적순례(1,2권)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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