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용 교수】 가는 하나님 나라에서 오는 하나님 나라로

  • 입력 2023.07.11 07:21
  • 수정 2023.07.11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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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자브(AJAB) 신학과 요한 르네상스(11)

1. 우리는 지난 시간에 바울복음에서 예수복음으로의 패러다임의 변환이 요청되는 것은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는 믿음과 행함이 분리된 이분법적 신앙에서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통전적 신앙의 필요성 때문임을 고찰하였다. 오늘은 두 번째 주제로 바울복음의 하나님의 의에서 예수복음의 하나님의 나라를 살펴보고자 한다.

사회주의 체제에서 젊은이들이 무엇을 해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자 러시아 공산주의 혁명가 레닌(1870-1924)공부하고, 공부하고, 또 공부하라고 조언했다. 이 얘기를 하는 까닭은 이 세상을 공산주의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자들도 무섭게 공부한다면, 이 세상을 하나님 나라 세상으로 만들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해야 하는가(특히 성경연구)를 말하고 싶어서이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과 씨름하는 가운데 브니엘의 아침을 맞이했고(32:22-32), 예언자 하박국이 신앙의 초소에서 신정론(神正論)의 문제를 놓고 씨름했을 때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라는 응답을 얻었듯이, 루터(1483-1546)의 종교개혁은 이 세상과 단절된 수도원에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과 처절하게 씨름하며 공부한 학문적 노력의 결과였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루터는 내가 어떻게 은혜로우신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대답을 얻기 위해 치열하게 씨름하였다. 그 과정에서 그가 겪은 종교적 고통을 전문 용어로 안페히퉁(Anfechtung)이라고 한다. 우리말로는 심각한 영적 고통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훗날 그는 95개조 논제에 대한 해설(1518)에서 그 고통의 순간을 이렇게 고백하였다. “그 고통은 너무도 크고 지옥과 같아서 어떤 혀도 그것을 적절히 표현할 수 없으며, 어떤 펜으로도 그것을 기술할 수 없고, 스스로 그 형벌을 체험하지 않은 자는 그것들을 믿을 수 없는 것이었다. 또한 그 형벌들은 너무 커서 만일 반시간 동안만 지속된다면, 심지어 한 시간의 10분의 1만 지속된다 해도 그는 전적으로 멸절했을 것이며 그의 모든 뼈는 재로 화했을 것이다.”

루터가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는 로마서 117절에 나오는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구절이었다. 이 구절에서 하나님의 의’(righteousness of God)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문제였다. 그의 스승들(중세 가톨릭 교회)은 이를 능동적 의’(active righteousness), 즉 인간이 능동적으로 무엇인가 의로운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도록 가르쳤다.

그런데 루터는 바울이 이 구절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자 끈질기게 붙잡고 늘어졌다. 마침내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란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믿음으로 의로워진 자는 살리라라는 믿음에 의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수동적 의’(passive righteousness)라는 사실을 터득했다. 그 순간을 루터는 이렇게 고백했다. “그 순간 나는 완전히 다시 태어나서’(born again) 활짝 열려진 문을 통해 낙원 그 자체에 들어간 것처럼 느껴졌다. 그 후로 성경 전체가 내게 새로운 빛 아래 조명되었다.”

여기서 능동적 의란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을 통해 이룩한 의를 말하고, ‘수동적 의란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 즉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 의롭게 하신 것을 인간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의를 말한다. 루터는 전자(‘능동적 의’)를 말한 가톨릭에 반대하고, 후자(‘수동적 의’)를 말함으로써 종교개혁의 횃불을 들었다.

 

2. 여기서 우리는 예수 복음(예수 선포)의 핵심어인 하나님 나라또는 하늘 나라용어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기에 앞서 바울 복음의 핵심어인 하나님의 의또는 용어에 대해 살펴보자. 헬라어 ’(명사)에 해당하는 용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는 로마서에서 34회를 포함 바울서신 전체에서 무려 58회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사복음서에서 10(7, 1, 2) 사용하는 것에 비하면 빈도수가 엄청나게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형용사 의로운’(δίκαιος) 용어는 로마서에서 7회를 포함 바울서신 전체에서 17회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사복음서는 39(17, 2, 11, 3)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동사 의롭다’(δικαιόω) 용어는 로마서에서 15회를 포함 바울서신 전체에서 27회를 사용하는 데 반해, 사복음서에서는 7(2, 5)를 사용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의’(δικαιοσύνη θεο) 용어는 사복음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오직 로마서에서 5(1:17; 3:21,22; 10:3[2]) 나타난다. 그러니까 또는 하나님의 의용어는 바울의 전문 용어임을 알 수 있다.

한편, ‘하나님의 나라’(βασιλεία του θεο) 용어는 사복음서에 53(5, 14, 32, 2)가 나타나고, 같은 의미인 하늘 나라(천국, βασιλεία των ορανων)’ 용어는 마태만 32회 사용하고 있다. 사복음서에서 이 두 용어가 무려 84회 사용되고 있다. 반면에 바울서신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용어가 로마서에 1(14:17)와 고린도전서에 4(4:20; 6:9,10; 15:50) 나타날 뿐이다. 그러니까 사용 빈도수에서 바울서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사복음서는 이 용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용어가 바울 복음의 핵심어라면, ‘하나님의 나라용어는 예수 복음의 핵심어이다. 바울의 핵심어인 하나님의 의용어는 본래 법정적 개념으로써 개인적(국부적) 구원을 위한 필요성 때문에 선교사 바울이 많이 사용한 용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에 반해 예수의 핵심어인 하나님의 나라용어는 개인적(국부적) 구원을 훨씬 넘어선 하나님의 세상 다스림’(하나님의 통치)이라는 우주적(포괄적) 개념이다. 바울복음의 하나님의 의에서 예수복음의 하나님의 나라로의 패러다임이 요청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3. 여기서 특히 주목할 점은 제2의 종교개혁(루터의 종교개혁)이 바울 복음의 핵심어인 하나님의 의능동적 의가 아닌 수동적 의임을 발견했을 때 시작된 것처럼, 500년이 지난 오늘의 종교개혁(3의 종교개혁)은 예수 복음의 핵심어인 하나님 나라능동적 나라’(active kingdom)가 아닌 수동적 나라’(passive kingdom)임을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됨을 말하고자 한다. 종교개혁이란 한 마디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주어(主語)의 교체를 의미한다. 이 말의 의미는 이러하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의능동적 의’, 인간()이 주어가 되어 능동적으로 성취하는 의에서 수동적 의’,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인간()에게 주어진 의로의 패러다임의 변환이었다. 마찬가지로 제3의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나라능동적 나라’, 인간()이 주어가 되어 (어디엔가 있는 나라를 향해) ‘가는 나라에서 수동적 나라’, 하나님이 주어가 되어 (인간인 나에게 찾아) ‘오는 나라로의 패러다임의 변환을 말한다.

여기서 이해를 돕기 위해 중국 선교사 시절에 있었던 한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본죽에서 경영하는 중국의 여러 신학교 가운데 목단강 신학교밀산 신학교가 있다. 나는 20159월 목단강 신학교에 가서 강의를 하였다. 강의를 끝낸 후에 경박호발해유적지를 구경하였다.

목단강 경박호에서
목단강 경박호에서

이어서 201511월 최원영 목사(본푸른 교회)의 소개로 밀산(密山) ‘해방교회에 가서 강의를 하게 되었다. 밀산은 흑룡강성 중에서도 러시아와 국경을 접한 변방이다. 이때 본월드미션팀이 오셨다. 30명 정도의 지역교회 지도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오전에 요한복음 1-2장을 강의한 후 오후에 요한복음 3장을 강의하게 되었다. 이때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만남 기사에 나오는 하나님의 나라’(3:3,5)를 강의하면서 나는 그분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

왼쪽 네 번째가 최원영 목사, 오른쪽 끝이 김경자 목사, 그 옆이 최복이 본죽 대표
왼쪽 네 번째가 최원영 목사, 오른쪽 끝이 김경자 목사, 그 옆이 최복이 본죽 대표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는 가는 나라입니까, ‘오는 나라입니까?” ‘가는 나라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주세요? 하자 모두 다 손을 들었다. ‘오는 나라라고 생각하시는 분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이때 내가 천국, 하나님의 나라는 오는 나라입니다라고 말하자 모두 놀라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보세요. ‘당신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중국어로 위엔 니더구어 지앙린’(愿你的国降临).” 이 말에 그들은 , 그러네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한마디 더 했다. “성경 전체에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를 가는 나라라고 언급된 대목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충격 그 자체였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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