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곤 권사, 충남대학교 졸업, 하이믹스글로벌 주식회사 영업본부장
김원곤 권사, 충남대학교 졸업, 하이믹스글로벌 주식회사 영업본부장

저는 충남 태안 시골마을에서 태어나 중학교 시절까지 살았고, 대전으로 이사 온 후 고등학교와 충남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유성은 젊은날의 비전을 꿈꾸며 살았던 제2의 고향입니다.  많은 추억거리가 있지만 주님께서 부족한 저를 통하여 행하신 일들을 짧은 지면으로 옮겨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다시 회상하는 기쁨을 얻었습니다.

 

●무속신앙의 아버지와 복음의 증인 아들

저의 아버지가 빚을 내어 방앗간을 운영하시면서 매년 추석 설 명절 마다 고사를 지내실때마다, 아버지가 계신 뒷자리에서 우리 '안기정 미소 방앗간'이 잘되게 해달라고 그저 간절함으로 빌었던 때가 지금도 선명하게 제 머릿속에 기억이 납니다. 그랬던 제가 이젠 복음의 증인 되는 삶을 살려고 몸부림 치는 모습을 보게 되면서 제 가슴속 깊은 곳에서 감사가 흘러 넘침을 깨닫게 됩니다.

 

●나의 강점_적극적인 도전이 인생의 길을 열다

충남대학교 2학년 무렵 군에 입대하게 되고 중부전선인 15사단 대성산 81미리 박격포 부대로 발령이 났습니다. 그 무거운 포판 포신 포다리를 메고 다니다가 안경이 부러졌습니다. 때마침 연대본부에서 만난 장발의 고향 선배님이 기무사령부 대위 분이셨습니다. 군생활 하다가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연락하라고 하셨던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고참들 모르게 px에 가서 연대본부에 있는 선배님께 전화를 하였습니다. '안경이 부러졌습니다. 휴가 좀 보내주십시요'라고 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중대본부에서 호출이 왔고, 포상휴가증이 나왔습니다. 이 사건은 중대 전체에 소문이 퍼졌습니다. 김원곤 이병 형님이 기무부대 근무하신다는 소문이 나면서, 졸지에 군생활이 풀렸었던 기억이 나서 간혹 웃음을 지으며 그 시절을 상기해봅니다.

갑자기 이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은 나의 성격 부분 중 강점을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기회가 왔다 싶으면 놓치지 않고, 그 기회를 통해 일을 성취해낸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러한 부분이 제가 지금 크리스천 비지니스맨으로서 영업 업무를 잘 수행해 나갈 수 있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또한 저의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오지랖이라면 오지랖인데 이렇게 '은혜를 받으면 절대 잊지 않고 언젠가는 그분을 다시 만나 감사를 전하고 계속해서 관계를 지속'합니다. 요즘같이 각박한 시대에는 결코 쉽지 않은 일들을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행하고 있으니 이 또한 은혜임을 고백합니다.

군대 상병시절 마지막 팀스피릿 훈련이 있어서 통역병을 뽑는다고 합니다. 저는 통역병에 지원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 기억이 생생합니다. 6개월 간 두 번 철책 근무를 합니다.  야간 근무 상황병을 볼 때 신문을 오려서 영어 공부를 하였습니다.  당시 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곽영일의 영어 한마디를 오려 스크랩북을 만들었습니다. 스크랩북  들고 대대장님 실을 방문하여 제가 군 복무 하면서 자기계발을 위한 노력을 하였습니다. 팀스피릿 통역병으로 보내주십사 간청하였습니다. 자격이 안됨에도 불구하고 군단에 파견되어 삼개월간 연수교육 받고 미군들과 일주일간 함께 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때 그 경험과 도전이 지금 돌이켜 보면 살아가면서 엄청난 축복이었습니다.

살면서 어려울 때 마다 늘 생각나는 저의 용기 있는 무대포 행동 중 하나입니다. 그 때의 고마우신 대대장님도 전역하셨고, 육사 총동창회에 연락하여 만남을 가진 후 교제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고마운 분들과 오랜세월 이어가는 힘은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장점 중의 장점입니다. 은혜 받은 분은 절대 잊지 않고 다시 찿아가서 교제를 합니다.  이런 적극적인 삶의 자세가 사회생활 하면서 엄청난 강점이란 것을 매번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허리통증

"육의 사람을 영의 사람으로 훈련시키는 과정 가운데 만난 믿음의 사람들"

팀스피릿 훈련을 무사히 잘 마치고 20일이 넘는 정기 포상휴가를 받았습니다. 때마침 아버지가 운영하시는 방앗간은 농협에서 매상벼를 많이 구매하여 방아를 찧는 중이었습니다. 그 작업을 돕다가 허리가 삐끗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계속 일을 하다가 부대에 복귀하였습니다.  허리가 너무 아파서 복귀하자마자 의무대에 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허리 통증으로 군생활이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허리 통증 이전, 저는 군생활은 중대 군종병으로서 막걸리 나오면 하나님 아버지 이 막걸리 잘 먹고 족구 잘 해서 포상휴가 가게 해달라고 형편없는 기도를 하던 완전 나이롱 가쨔 크리스챤 군종병이었습니다. 그런데 건대 정치외교학과를 다니다 군대에 온 장대우 이등병이 우리 중대에 전입을 해왔고, 우리 부대가 철책근무 중 돼지 두 마리를 잡아 중대회식을 할 때 신병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중대장님이 막걸리를 반합 뚜껑에 부어 주려 하는데, 중대장님 저는 예수 믿는 청년이라 술을 안 마십니다. 막걸리 대신 콜라를 주십시오 하면서 신앙고백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그 친구의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신앙의 매력에 빠져서 '그가 진짜고 내가 가짜이니 장이병이 종교행사 가는 것을 막지 말라. 그를  보호해주는 관계'로 발전하였습니다. 나중에 장대우 이병은 본부중대로 차출되어 대대군종병이 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허리통증을 치유 받고 싶은 마음에 대대영내 승리교회에 새벽기도도 나가고 주일성수 하면서 신앙을 키워 나갔습니다

 

●헌혈증서 모으기 운동_백혈병 환우와 어린 환우 

병장 마지막 휴가 때 계속 허리 물리치료 받으며 병원생활 하던 중, 충남대학교에 가서 우연히 백혈병 환자 학우가 헌혈증서를 모은다는 충대신문 기사를 보고, 휴가 중 조기 복귀하였습니다. 학위를 위해 대대에서 헌혈증서를 모으고, 군입대 동기들이 제대할 때 사단휴양소로 모였는데 그때 헌혈증서를 모았습니다. 제대한 후  환자 학우에게 헌혈증서를 전달하였습니다.

사단휴양소에서 동기들이 다 모였을 때, 입대동기었던 조성욱 병장이 군에서 '박격포 불발탄 사고로 파편이 왼쪽 가슴에 박혔었는데 쪽복음 성경이 파편을 막아줘서 기적적으로 본인만 살아남게' 되었다고 간증 고백을 하였습니다. 조 병장은 남은 여생은 덤이고, 제대한 후에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고백했다.

최근에 한 필리핀 선교사님을 통해 군대에서 포탄을 맞은 뒤,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어 세계 복음화를 위해 전세계를 다니시는 젊은 목사님을 소개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삼십년전 사단 휴양소에서 간증 고백하던 바로 그 동기였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반가웠는지 큰소리로 야! 우리 15사단 동기쟎아!” 외치며 기쁨의 만남을 가졌습니다. 조성욱 목사님은 광명에 있는 [복음 가득한 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동지들을 다시 만나게하시고 주의 일을 함께 써가도록 인도하고 계십니다.

학교 복학 이후에도 허리 통증은 계속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충남대학교 신문에 소아과 병동에 한 어린이가 헌혈증서가 모자라서 위험에 처해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것은 내가 해야 할 일이구나 싶어서, 수업 들어가기 전 교수님들께 양해를 구하고 헌혈증서와 성금 모금을 위한 연설을 하고 다녔습니다. 군에 남아있던 중대 후임 대대군종병이 된 장대우 군종병에게도 부탁해서 많은 헌혈증서를 모으고 성금도 모으게 되어 환자에게 전달하게 되었습니다.

원곤아! 나는 신유의 능력 그런 건 없지만 너 자신도 그렇게 허리가 아픈데 남들 위해 돕겠다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오늘은 너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싶구나.

그러던 가운데 모교회인 노은교회 김용혁목사님이 저를 위해 새벽기도 마친후에 안수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원곤아! 나는 신유의 능력 그런 건 없지만 너 자신도 그렇게 허리가 아픈데 남들 위해 돕겠다고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니 오늘은 너를 위해 기도를 해주고 싶구나하시면서 머리 위에 손을 얹고 기도를 해주셨습니다. 신기하게도 그 날 이후 그렇게 나를 괴롭히던 허리 통증에서 고침을 받을 수가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내가 살아오면서 첫 치유의 기적을 기도를 통하여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또한 유성고등학교 앞 지하실 개척 때 뵌 김용혁 목사님과도 33년여간 영적인 아버지로 모시며 교제를 이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만남의 축복을 저처럼 잘 누리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을 거란 생각을 해봤습니다.


●봉사_학교 청소 자발적으로 하다 장학금 문이 열리다

코오롱 그룹 장학금, 코오롱 상사 입사

충남대학교 상과대학 건물에서 동기들과 족구도 하고 청운의 꿈을 꾸며 공부하던 어느 날 침례신학대학 교정에 갔었는데 학교가 너무나 청결하고 깨끗하게 정돈된 것을 보고 선한 도전을 받았다.

본교로 돌아와서 경영학과 동기들 열 명을 설득하여 한 달에 한 번씩 상과대학 건물을 청소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는 공간을 우리 스스로가 청소하여 깨끗하게 한다 는 것이 너무 기뻤습니다. 어느날  청소를 하는데 지금은 미국에서 살고 계시는 김교훈 조교 선생님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경상대학 송계충 학장님이 학교 근무하시면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청소하는 걸 처음 보셨다고 합니다. '누가 리더냐? 네, 제가 리더입니다. 학장님이 친히 장학금을 주라고 하셨다.' 당시 성적이 좋지 않았던 저에게 성적과 상관없이 주는 코오롱그룹 장학금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그 장학금은 수업료 뿐만 아니라 책값과 여름철에는 코오롱그룹 교육기관인 보람원에 초청되어 전세계 특히 아프리카 리더들과 함께 산행도 하고 워크샵의 기회도 가질 수 있는 엄청난 장학금의 기회였습니다.

그런 연고로 사회 첫 직장도 코오롱상사로 입사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도 갖게 되었습니다

졸업 무렵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가고 말은 제주도로 보내라"는 단순한 생각이 나를 지배했습니다. 저는 무작정 서울로 가서  무교동 코오롱 빌딩 오운문화장학재단을 찿아갔습니다. 재단 이사님이셨던 박병삼 이사님을 찾아 뵙고 장학금을 주셨으니, 저 취직도 좀 시켜주십사 부탁드렸습니다. 이렇게 젊은 청년이 너스레를 떨고 내려왔는데 놀랍게도 코오롱 상사 추천서를 보내주셔서 무난히 인재들만 모인다는 코오롱 상사에 입사할 수가 있었습니다....요즘 같은 시절에는 말도 안되지만 그 당시에는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무교동 코오롱 빌딩 찾아가서 객기 아닌 객기를 부린게 지금의 저를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 배짱 아니 돈키호테 정신이 지금의 저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것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있다 싶으면 어떡하든간에 그 기회를 잡고자 하는 저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믿음의 사고가 또 다시 취업의 기회를 잡게 만든 것입니다.

회사에 입사하기 전 12월 스키장에 합격자들 전원이 보광휘닉스 스키장에 갔습니다. 그 당시에는 다른 회사에 입사하고 지원한 학생들도 있어서 입사 진실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방편으로 스키장 등 연수원에 불러 다른 회사의 호출에 가지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생생한 것은 스키장을 처음 가보는 시골에서 올라온 동기들의 모습은 목장갑, 땀복 차림에 누가봐도 진짜 시골 티가 나는 촌놈들 복장이었습니다. 거기에 비해 서울 동기들은 스키복에 고글까지 진짜 멋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동기회 때 모이면 그 날 그 모습을 이야기 하며 추억을 함께 하는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회사에 입사해 보니 산업자재팀 부장님이 LA 지사 근무하시던 분이 와 계셨었는데 제가 고등학교 시절 일학년 담임이셨던 황기성 장로님의 이종사촌 동생분이셨습니다. 참으로 세상은 넓고도 좁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이 깊으신 분 부장님과 함께 코오롱 상사 신우회 예배에 함께 할 수 있었고, 영적으로 교제할 수 있었기에 회사 생활에 큰 활력이 되었습니다.  지금은 강남에서 큰 식당을 하고 계셔서 오며 가며 찾아 뵙고 그 옛날 이야기로 웃음꽃을 피우는 형님 동생 관계를 유지할 수 있음이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만남의 축복은 너무나 귀합니다. 고등학교 은사님과의 깊은 관계가 사회에 나와서까지 이어지니 저는 우리 인생 후배들에게 만남의 축복을 위해 늘 기도하면서 삶 가운데 예의를 갖추고 의리를 지키며 때로는 내가 좀 손해를 보더라도 남을 위할 줄 아는 그런 삶을 살아서 나중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만남의 축복을 백배 천배 받으라고 권면을 하며 살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바로 그 만남의 축복의 산증인입니다.


●성령체험 이전과 이후 달라진 삶

대전에서의 신앙생활과 서울에서의 신앙생활은 엄청나게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서울에서는 회사에서의 삶이 참 녹녹치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께서도 급하셨는지 성령체험을 하는 기회를 갖게 하셨습니다. 어느날 거래처 접대한 후 술에 취해 자취방으로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무교동에서 시청 지하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누가 형 형 하면서 달려오는 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바로 군대 후임이였었던 장대우 군종병이었습니다. 실은 그동안 대학시절 헌혈증서 보내줄 때 마다 이제는 형도 술 안먹고 너처럼 성령충만하게 신앙생활 잘 하고 있다고 편지를 보냈었는데 이렇게 흐트러진 모습으로 또 다시 만나게되다니.. 군대시절처럼 술 잘먹는 술취한 모습으로 재회를 하게 됬으니 영 쪽팔려서 아는체 할 수 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모르는 체하고 앞으로 막 뛰어가다 그 친구가 제 앞에 서게 되었고, 그제서야 참았던 숨을 내 밷게 되고, 술 냄새가 확 나게 되니 ! 아직도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못 만나셨군요하는데 얼마나 창피한지 고개를 들 수가 없었습니다. 나중에 그 친구 교회에 가서 저도 아주 뜨겁게 성령체험 하게 되고 통회자복 하는 가운데 입안에서 흘러 나오는 이상한 소리인 하늘의 언어인 방언도 받게 되면서, 그 이후로부터는 크리스쳔 비지니스맨으로서 구별된 삶을 살기 위해 지금까지 노력하며 자기 관리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성령 체험 한 후 삶의 자세가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입에 착착 달라 붙고 달았었던 술이 쓰게 느껴지고, 음란한 접대자리에 나가게 되면 마음이 쿵쾅쿵쾅거리는 울렁증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마음에 니가 왜 그 자리에 있어?’ 하는 가슴속 울림 때문에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오게 되는 일들이 점점 많아지면서 직장동료들 사이가 난처해지게 되었습니다. 다행히도 매출이 어느 정도 나와 주었기에 직장생활을 감당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령체험 이후 부터는 신앙생활이 예전과는 180도 달라지면서 진짜 크리스쳔 비지니스맨다운 모습으로 변해갔고, 그 과정이 녹록치는 않았지만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감격스러운 복음의 증인된 삶을 살수 있게 되었습니다.


●통성기도를 좋아하게 된 계기

●비행기 안에서  통성치유기도하다

코오롱상사 퇴사 이후 한 번은 필리핀 출장을 가게 되었는데 비행기 안에서 급하게 의사를 찿는 방송이 들렸습니다. 뒤에 가보니 여자 청년 한 명이 눈동자가 돌아가고 있는 위급한 상태였습니다. 어떤 한분이 계속해서 마사지를 하고 계셨고, 나중에 알고 보니 금촌제일감리교회 선교팀 일행으로 약국을 경영하시는 장로님이셨습니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나도 모르게 여러분 여기 단기선교가시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비행기 안에 계신데 우리 다같이 합심하여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여 이 대한민국 청년을 고치시면 어떨까요 하면서 두팔 벌려 큰소리로 통성기도로 치유기도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도하면서 살짝 새눈 뜨고 그 자매의 상태를 지켜봤었는데, 다행히도 그 자매의 눈동자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것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 자매가 일어서서 다시 자기자리로 돌아갈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가 있었습니다. 할렐루야!!! 감사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도 여전히요.

공항에 도착하여 배기지 클레임서 그 자매를 만나 전도할 수 있었고, 금촌제일교회 분들은 필리핀선교 마치고 돌아가실 때 필리핀 에어라인에서 기내 위급상황에 환자를 위해 헌신하셨으므로 전원 비즈니스 클래스로 좌석승격하여 귀국하셨다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정말 기뻤습니다. 십칠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그 날 그 일이 생생하게 기억이 나고 기회가 된다면 금촌제일교회 분들을 다시 만나 보고 싶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비행기 안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라는게 지금 생각해봐도 아찔하고 막막했었는데 다행히도 그 자매가 합심 통성기도 가운데 일어서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지금도 자주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 일 이후부터는 긴급사태 발생시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기도하여 응답받게 되는 새로운 스타일의 기도의 습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치유가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있지만 개의치 않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기에 담대히 선포하며 기도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이로비 공항 세관원 앞에서 방언으로 기도하다

2003년도에 고등학교 은사이신 황기성 장로님과 케냐 우간다 단기선교를 가게 되었었습니다. 선교사님들에게 가져다 드리려고 한국 반찬을 패킹해서 이민가방에 넣어가지고 갔었는데, 세관에서  문제를 삼고 내보내 주지 않아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선생님께 선생님 제가 잠깐 기도하고 오겠습니다하고 여자세관원이 바라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고 통관대 앞구석에서 방언기도를 랄 랄 라 하면서 기도하고 있으니, 그 여자 세관원이 손가락으로 머리를 한바퀴 돌리더니 이거 또라이 정신병자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큰목소리로 패스해서 무사히 통관을 하였습니다. 선교지에 도착하여 선교사님들에게 준비한 반찬을 가져다 드리고 공항에서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한참이나 웃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필리핀 가는 비행기 안에서, 아프리카 케냐 나이로비공항 안에서 어떻게 그렇게 담대하게 방언 기도를 할 수 있었을까? 생각을 해보면 그 당시에는 그런 기도훈련이 일상 생활이었고, 무엇보다 절박한 상황이었었기에 그렇게 할 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도행전 29장을 계속해서 쓰는 심정으로 성령 충만함으로 저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가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영혼의 때를 위해서요.

 

●천막교회 건축동참

천막일을 했던 경험이 있어서 미국처럼 짧은 시간 안에 저렴한 비용으로 천막교회를 지었으면 좋겠다라는 마음에서 포항 할렐루야 천막교회를 짓게 되는 일에 함께 하었고, 광주 서림교회, 서울 원천교회 중보기도센터를 천막으로 짓는 일에 쓰임받을 수 있었음에 감사했습니다. 사도바울의 천막과 후배로서의 삶을 살아갈수 있었음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요즘은 저희집 앞에 오랜기간 동안 비어있었던 건물을 저렴하게 임대하여 선교사 게스트 하우스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귀한 선교사님들을 모시고 같이 선교지 현장에 대하여 논의하기도하고 기도하고 함께 할 수 있어서 너무나 감사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나가는 선교사님이 있으시면 보내는 선교사도 있어야하니, 저는 한국에 살면서 후자의 삶을 선택했습니다. 보내는 선교사의 삶을 살기를 다짐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의 인생에 고마운 분들

지나온 삶이 그다지 길지는 않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만남의 축복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잘 활용하여 제 능력에 비하여 멋지게 살아갈 수 있었음에 감사를 드립니다.

제 인생에 있어서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었던 1997년도 12, 그 날을 잊을 수 없으며 그러한 체험 신앙으로 저를 이끌어 준 15사단 군대 후배 장대우 집사 그 동생에게 무한한 감사를 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사랑cbmc 기독공동체에서 만난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과의 만남 또한 귀합니다. 비지니스 세계에 주님의 나라가 임하기 위해 노력하는 직장선교사님들 그분들과의 오랜 만남 가운데 직장생활 가운데 크리스쳔인 제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많이 배웠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지금껏 하나님께서 주신 만남의 축복으로 여기까지 제 실력이나 능력에 비하여 훨씬 그 이상으로 분에 넘치게 잘 살아온 듯 합니다.

앞으로도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제 인생가운데 보내주셔서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역사를 보여주시리라 믿습니다.

사람인지라 가끔 이루어 놓은 부도 명예도 없기에 불안감이 엄습해 올 때가 있습니다. 그 때마다 기도합니다. 하나님 예수님도 그리 사셨는데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하나님 일을 하다가 아버지께로 돌아가신 그분처럼 살게 해달라고 기도해봅니다.

주님께서 지난 시간 저와 함께 하셨던 시간들을 어찌 이 짧은 지면에 다 옮길 수가 있겠습니까. 베풀어주신 아름다운 사랑 만남의 축복을 이세상의 언어로 다 표현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저 감사 감사할 뿐입니다.

지난 시간들 주의 일 한다. 전도한다. 하면서 가족에게 솔직히 등한시 한 부분이 있어서 요즘은 저의 삶을 돌이켜보면서 지난 과거 잘못은 어찌 할 수 없겠지만 앞으로는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고 예쁘게 저희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주의 일을 해야겠다 싶은 마음을 정초에 가져봤습니다.

이번주 토요일에는 강원도 철원 중부전선에 근무하는 박격포를 주특기로 근무하는 15사단 후배이기도 한 아들 면회를 갈 계획이라 마음이 설레입니다. 잠시 군대에 있는 아들이 매우 보고 싶어집니다. 이럴 때마다 주님의 마음이 조금이나마 느껴집니다

진작에  자녀들과 시간을 함께 많이 했었어야 했는데 하는 그런 아쉬운 마음 뿐입니다. 앞으로는 아내와 자녀들과 함께 하면서, 주님 오실 때까지 더 열심히 가족과 함께 주의 일을 해야겠다 라는 다짐을 해보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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