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았습니다. 그리고 복권된 적이 없습니다. 공교회에서 결정한 이단은 분파교회에서 해제할 수 없을 것입니다. 고대교회는 5대 교구로 분류된 한 교회였습니다. 그 중에서도 알렉산드리아 교구와 안디옥 교구의 갈등이 고대 교회 이단 논쟁의 주요 무대였습니다. 안디옥 교구는 바나바를 시작으로 사도 요한의 제자 이그나티우스(Ignatius)가 2대 감독을 지냈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지역은 마가의 전도 사역으로 교회가 구체화되었습니다.

아리우스는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았습니다. 아리우스는 328년 니케아 신경에 동의한다고 했으면서도,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된 아타나시우스를 끊임없이 공격했습니다. 336년 아리우스를 황제가 복권을 선언하려고 했는데, 그 황제 앞으로 가려던 날에 죽었다고 합니다. “아리우스는 큰소리로 떠들다가 갑자기 강한 복통설사에 시달렸다. 그리고는 갑자기 성경 말씀처럼 거꾸러지며 배가 터지고 내장이 온통 쏟아져 나왔다”는 묘사가 있습니다. 즉 아리우스는 끊임없이 니케아 신경에 대해서 거부했고, 복권 직전에 죽었기 때문에 결국 복권되지 못한 대표적 사례입니다.

네스토리우스는 교회를 떠나 교회와 다른 동방교회(Church of the East)를 형성시켰습니다(나무위키). 김호욱 교수(광신대)는 바우머의 <실크로드 기독교: 동방교회의 역사>를 근거로 동방교회와 네스토리우스의 관계성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주께 사도직을 받은 사도는 교회의 일치를 위해서 스스로 예루살렘 교회와 협력하여 한 교회를 이루었습니다. 한 교회, 보편 교회, 에큐메니칼 교회 이룸은 결코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한 교회는 5대교구를 중심으로 형성된 교회(the One, Holy Catholic Church)입니다.

동방교회는 페르시아 지역에 형성된 교회로 지금은 세력이 매우 약하게 존재하지만, 지금 현존하는 교회에서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기억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당나라까지 이른 ‘경교(景敎)’는 페르시아 교회의 복음인데,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깊은 이해가 필요하겠습니다. 즉 경교가 네스토리우스의 사상인지, 네스토리우스와 관련없는 동방교회의 사상인지 명확한 판정은 아직 없습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판정받았고 복권된 적이 없습니다.

네스토리우스가 나중에 “데오토코스(theotokos, 하나님의 어머니)” 개념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다만 이 인정에 대한 폴 틸리히의 설명에 따르면 다음과 같습니다. “마치 신전 안에 신이 살고 있듯이 예수 안에 로고스-신이 살고 있는데, 이러한 예수를 마리아가 낳았기 때문이다.” 즉 네스토리우스는 예수의 역사성이 중시한 것이며, 데오토코스를 형식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네스토리우스는 431년 에베소 공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받았습니다. 틸리히는 네스토리우스의 이단 선고에 대해 “이단이라고 일컬어지는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죄 없는 사람”이라고 평가했다고 합니다. “이단 중에서 가장 이단같지 않는 이단”은 결국 이단의 범주에 있다는 표현입니다. 그래서 이단에서 벗겨내고 싶을 정도로 이단같지 않는 이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사역자는 교회의 결정을 엄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감정과 교회의 결정이 충돌될 때에 교회의 사역자는 교회의 결정을 준수해서 판결합니다. 431년 이단으로 결정된 것은 그리스도론의 양성론입니다. 그리고 451년 칼게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결정된 것은 그리스도론의 단성론입니다. 431년과 451년 공의회에서 결정한 그리스도 고백은 한 위격에 두 본성입니다. 그리고 양성론과 단성론은 모두 공교회에서 배척하여 이단으로 정죄했습니다. 단성론자들은 끈질기게 항의했지만 533년 5차 공의회(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정죄함으로 단성론자들은 이단으로 제국의 변방으로 이탈되었습니다. 622년 페르시아에 마호메트가 메카를 떠나 메디나로 이주하는 헤지라로, 이슬람 종교가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안디옥 학파(School of Antioch)의 명예회복은 네스토리우스의 복권이나 가치향상에 있지 않습니다. 종교개혁에서 안디옥 학파의 명예는 회복되었습니다. 마틴 루터와 존 칼빈이 그들의 명예를 회복시켜주었는데, 그것은 안디옥 학파의 성경해석법인 역사적 문법적 해석을 교회 전면의 해석방법으로 세웠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경해석법은 우화적(알레고리칼) 해석이었고, 1,000년이 지난 뒤 루터와 칼빈은 안디옥의 역사적 문법적 해석으로 정통 신학을 회복시켰습니다. 루터와 칼빈은 서방 중심의 사유 체계에서 동방의 성경해석방법을 도입하여 진정한 에큐메니칼 교회를 구현시켰습니다.

죽은 뒤에 이단으로 정죄한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아닌 그의 가르침입니다. 그 대표적 예는 3세기 오리겐의 사상을 6세기 교회에서 배척했습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533년 개최한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에서 오리겐의 사상을 배격했습니다. 오리겐은 이단과 정통의 아버지라고 불리면서도, 많은 이단적 요소 때문에 교회는 그의 사상을 전면 배격시켰습니다. 참고로 요한계시록에서도 많은 이단들이 창궐하지만 정경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것은 요한계시록이 주는 결정적 유익이 있기 때문입니다.

네스토리우스는 이단으로 판결되었고 복권이 되지 않은 위인입니다. 그리스도 양성 이해에서 양성으로 분리하는 것은 공교회에서 배척했습니다. 또한 일성으로 통합시키는 것도 배척했습니다. 그리스도께 있는 양성(하나님과 인간)은 “한 위격에 두 본성(Una persona, duae naturae)”입니다.

형람서원 고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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