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사회를 보면서 많은 사람이 힘들다고 외친다. 아픔의 크기가 사람마다 다르다. 모두 다 자기의 아픔과 상처와 부족한 것만 보고 있다.

하박국서의 저자는 하박국이다. 하박국이란 의미는 포용하다’,‘껴안다는 뜻이다. 하박국서는 유다 백성을 대상으로 쓰여졌으며,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르치고 있다. 하박국서의 강조점은, 의인의 고통과 악인의 형통은 일시적인 것이라고 강조한다.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공의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에는 전쟁의 아픔, 살인, 사고, 이슬람과격단체들의 테러와 마약조직의 극성, 인신매매, 환경오염, 배고픔, 질병 등 지구촌에는 안전지대가 없다. 매일같이 지구촌에는 암흑의 세력들이 번성하고, 그들로 인해 선량한 시민들이 폭행과 피해를 당하고 있다.  하나님은 폭력적 불량배들을 그냥 두시는가?


"왜 하나님은 불의를 그냥 두시는가?"


(1)하박국 선지자가 불의가 판치는 것을 보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다.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로 말미암아 외쳐도 주께서 구원하지 아니하시나이다”(1:2).

표준새번역을 보면, 내가 살려달라고 부르짖어도 듣지 아니하십니까? 폭력이라고 외쳐도 어느 때까지 구해주시지 않습니까? 내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나로 불의를 보게 하고, 악을 그대로 보게 하십니까? 약탈과 폭력이 내 앞에서 벌어지고 다툼과 시비가 그칠 사이가 없습니다. 율법이 해이하고, 공의가 시행되지 못하고, 악인이 의인을 협박하고, 공의가 왜곡되었습니다.”

이것이 하박국 선지자가 살고 있던 시대의 아픔이었다.

(2)한국교회도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미국의 로버트 슐러 목사님을 중심으로 한 대형교회의 성공지향적 번영신학을 무조건 여과없이 받아들였다. 성공지향적 번영신학을 한국교회가 따라갔다. 그 결과 교회는 성장했다. 건물도 아름다워졌고, 규모도 대형화되었다. 이제는 후유증으로 한국교회가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특히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는 길을 잃고 있다. 제자는 사라지고 건물만 남았다. 생명을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사라져가고 있다. 성도들이 내려놓음이 약하다. 이기심과 욕심으로 점점 똘똘 뭉쳐있다. 내 교회 중심, 나 중심의 신앙생활이 한국교회를 점점 병들게 하고 있다. 사회의 어둠에는 점점 관심을 두지 않는다. 무엇보다, 하나님중심의 왕국 실현이라는 거대한 비전을 잃어가고 있다. 세속에 병들어가도 내 교회만 피해당하지 않으면 된다는 사고가 깊이 배어 있다. 세속에 썩어가면서도 영적으로 죽어가면서도, 내 이익에 손해만 없으면 된다는 이기적인 사고가 점점 팽배해져가고 있다.

한국교회는 동성애법이나 종교차별금지법 등 독소조항이 담겨있는 포괄적차별금지법이 국회에서 진행되고 있는데도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다. 개교회주의에 머물러 있으면 결국에는 한국의 기독교는 이방종교에 의해 처절하게 무너질 수 있다. 세속화에 교회는 텅텅 비어 갈 것이다. 개교회주의와 세속화의 물결 앞에 한국교회는 무참히 무너지고 있다.

초기한국근대사를 보라. 한국교회는 사회적, 정신적 선구자가 되었다. 한국교회는 시대의 나침판 역할을 했다.

그런데, 지금은 세상을 향해 거룩한 소리를 내지 못한다. 목회자들도 교인들에게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신앙의 거울에 비추어 볼 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면 기분 나빠한다. 받아들이지 못한다. 성경의 가치관이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가치관으로 똘똘 뭉쳐있다.

이것이 타락이다. 이것의 결과는 곧 핵폭탄처럼 다가올 것이다. 신앙의 정체성이 무너질 것이다. 영적으로 무너지면 머지않아 삶도 가정도 일터도 허물어지게 된다.

사람은 본질이 튼튼해야 한다. 사람을 이끌어가는 힘은 내면이다. 내면이 건강하고 내면의 본질이 살아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면이 약해지면, 위기 앞에 견디지 못하고 한순간에 무너진다.

오늘 우리 신앙인이 회복해야 할 두 기둥이 있다. 사회적 영성과 개인의 경건성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 잘못된 것을 지적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막을 것은 막아야 한다. 그래야 희망이 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희망이 없다고 통곡하고 절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결단한다.


1)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겠습니다.


1절입니다.“내가 내 파수하는 곳에 서며 성루에 서리라 그가 내게 무엇이라 말씀하실는지 기다리고 바라보며 나의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대답하실는지 보리라 하였더니”(2:1).

주님이 나에게 무슨 말씀을 하실 것인지 망대 위에 올라가서 자리를 지키며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겠다고 한다.

우리가 주님 앞에 고백하는 선한 기도의 제목들을 드렸다면, 주님이 어떤 응답을 주실지 기다리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주님이 응답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선지자는 주님의 응답을 기다리기 위해서 초소 위에 올라가서 나의 자리를 지키겠다고 결단하고 있다.

주님 응답하실 때까지 기도의 자리를 내가 지키겠습니다. 헌신의 자리를, 사명의 자리를 지키겠습니다라는 믿음의 결단이 필요하다.

신학교 다닐 때 4년간 매일 성경을 2시간씩 읽었다. 학교 옥탑에 올라가서 성경을 읽었던 시간들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너무도 가진 것이 없기에, 재능도 없기에, 미래도 불확실하기에,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 앞에 매일 성경을 읽는 일이었다. 학교 옥탑에 올라가서 시간을 드렸다. 주님의 음성을 기다렸다. 주님의 말씀을 기다렸다.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목말라했다.

지나고 보면, 그 시간이 내 목회 인생에 큰 디딤돌이 되었다. 바람에 나는 겨처럼 냄비처럼 생각하거나 행동하지 않았다. 개척 23년 동안 묵직하게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지켜왔다. 삶의 자리가 힘들어도, 고생스러워도, 앞이 보이지 않아도, 때로는 무력감이 찾아와도. 주님이 살아계시기에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며 주님을 바라보았다. 주님을 바라보고 사모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응답을 주는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40년을 살아갈 때 그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인이 있었다. 출애굽기 40장을 보면,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오르면 이스라엘 모든 자손은 행진했고, 구름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떠오르는 날까지 앞으로 나아가지 않았다(40:36-37). 이것이 신앙인의 길이다주님이 일어나라 하면 일어나고,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고, 앉으라 하면 앉으면 된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님의 사인을 기다리겠다고 결단하고 있다. 시대의 아픔을 보고, 선지자는 괴로워했다. 하나님의 공의가 허물어져 가고 있고, 사람들이 죄악으로 오염되어 가고 있고, 악인이 더 잘되고, 의인의 삶은 형통하지 않았다. 선지자는 괴로운 심정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 있다. 주님의 사인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기다림의 시간을 드릴 수 있는 성숙함이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때로는 이해되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인내의 시간은 축복이다.


2)시는 반드시 정한 때가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 묵시를 기록하여 판에 명백히 새기되 달려가면서도 읽을 수 있게 하라.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2-4).

하나님의 계시는 반드시 정한 때에 이루어진다는 말씀이다. 나의 시간과 하나님의 시간은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라. 반드시 하나님의 계시는 정한 때에 성취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이 주신 큰 위로는 반드시 메시야를 보내주겠다고 약속해주셨다.말라기 선지자 이후 세례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400년간 영적 암흑기이다. 이것을 신구약 중간기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이 잘못 살아도 지적하는 선지자들을 보내주시지 않았다. 예배에 정성이 없어도, 십일조를 도둑질해도, 누구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1:6-9).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간 선지자를 보내지 않았다. 그 결과 교회의 제도가 무너지고, 예배의 제도가 무너지고, 사람들의 삶이 무너져도 하나님은 대답하지 않았다. 400년 후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 땅에 독생자 예수그리스도를 보내주셨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왔느니라선포했다. 반드시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다. 교회도 개인의 인생도 일터도 자녀들의 삶에도 반드시 하나님의 정한 때가 있다. 그 사실을 잊지말라.


3)더딜지라도 기다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2:3).

비록 하나님의 응답이 더딜지라도 기다리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반드시 응답된다. 기다리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카바라는 동사이다. ‘카바라는 말에서 티크바희망이라는 말이 나왔다. 기다림과 소망은 같은 어원에서 나온 말이다. 누가 기다릴 수 있는가? 소망이 있는 사람이 기다릴 수 있다.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며 흑인인권운동가 넬슨 만델라 대통령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흑인들의 권리를 옹호하고 흑인들의 더 나은 삶을 위해 인권운동에 헌신했다. 체포된 후 27년간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의 자서전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붙들려갈 때, 어렸던 딸이 외손녀를 데리고 면회를 왔습니다. 관습을 따라 소녀의 이름을 할아버지가 짓게 되어 있어서 나는 외손녀의 이름을 자지웨라고 지었습니다. 자지웨희망이라는 뜻입니다.” 만델라는 늘 입버릇처럼 나는 한 번도 희망을 버린 적이 없다고 했다. 이 희망이 그에게 인내와 승리를 가져다주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주신 메시지를 전했다. “이 묵시는 정한 때가 되어야 이루어진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려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답된다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일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의 시간들을 소망으로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75세 나이이다. 그런데 그 약속이 성취된 것은 25년이지나 100세에 성취되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오래 참아 이 약속을 받았다”(6:15)고 증언하고 있다.

소망에는 반드시 시련이 따른다. 그러므로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 인내가 있어야 한다. 현실과 소망 사이에는 엄청난 시간적 차이가 존재한다. 그 공간을 어떻게 채워야 하겠는가? 인내로 채워가는 것이다. 사명은 소망의 인내로 채워가는 것이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의롭고 경건한 사람으로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노인은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오랜 시간을 기다릴 수 있었는가? 시므온은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2:26)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시므온에게 메시야를 볼 것이라는 비전을 주었다. 그는 평생을 기다렸다. 어느날 시므온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성전에 들어갔다. 마침 예수님의 부모가 율법의 관례에 따라 아기 예수를 데리고 성전에 왔다.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했다. 예루살렘에 많은 신생아가 성전에 들어왔는데, 그중에서 신생아인 예수님을 메시야로 보았다. 시므온에게 어떤 능력이 있었기 때문일까? 성령의 은혜와 감동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 메시야를 만날 것을 기대하며 간절히 고대했다. 그 결과 그는 많은 아이 중에서 예수님을 찾아낼 수 있었다. 아기 예수를 보고 직감적으로 알았다. 성령님의 세미한 음성에 늘 노출되어 있으면, 이렇게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 그러나 성령님의 세계에 둔탁한 사람은 구별의 능력, 선택의 능력을 상실하게 된다.

평상시 날카롭게 낫을 갈아 놓아야지 필요할 때 쓸 수 있다. 그러나 평상시 녹슨 낫을 갈아 놓지 않으면 정작 필요할 때는 사용할 수 없는 이치와 같다.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평상시 혹독한 훈련을 한다.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왜 힘들게 하는가? 평상시 훈련을 해야지만 정작 위기를 맞이할 때 제대로 대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평상시 훈련을 하지 않으면 정작 위기를 당하면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

평상시 믿음생활이 신앙생활이 경건생활이 성령님을 의지하는 생활이 정작 중요한 시기에 빛을 발하게 된다.

시므온이 아기 예수를 안고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하니 그의 부모가 그에 대한 말들을 놀랍게 여기더라”(2:28-32).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나의 때와 하나님의 때는 분명히 양적으로 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진다는 사실이다.

욥은 고난의 시간을 보냈다. 동방의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갑부였다. 그러나, 사단의 심판에 놓여 지고 나서, 욥의 삶은 처참했다. 자녀들이 하루에 다 죽고, 재산도 사라지고, 몸은 욕창으로 병들었다. 아내도 남편을 저주하고, 친구들도 욥을 향해 정죄했다. 너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이런 심판이 왔다는 것이다. 욥은 고통의 시간을 보냈다. 고통의 심연 속에서 그가 유명한 믿음의 고백을 한다.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연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23:10). 주님께 소망을 두라. 그리고 소망의 인내를 가지고 기다려라.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더딜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때는 다가온다.


4)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보라 그이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2:4).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은 정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 하나님의 약속은 더디다. 그러나 하나님의 시간은 반드시 찾아온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 정직이란 하나님과 사람과 자신에 대해서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마음이 교만한 사람은 정직하지 않다. 늘 거짓말하고, 늘 변명하고, 늘 책임을 전가하고, 늘 게으르고, 늘 비교하고, 늘 열등감에 빠져있고, 늘 비판하고, 늘 편견을 가지고 말한다.

그러나 약속을 기다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믿음의 말을 하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환경이 처절하게 힘들어도 믿음으로 고백하고 믿음으로 바라보고 믿음으로 선포하고 믿음으로 꿈을 꾸고 믿음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고백은 바울의 인생을 살렸던 위대한 단어였다. 히브리서 11장의 위대한 인물들의 삶의 첫 번째 단어를 우리는 다시 기억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같이 믿음으로 인생을 살았다. 이 믿음의 이야기에 나의 믿음의 이야기를 넣어야 한다. 예배도, 봉사도, 사명도, 헌신도, 내려놓음도 모두 다 믿음으로 하는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의 인생의 무거운 숙제를 해결해 준 것도 이 말씀이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루터가 천국 가기 위해서 노력했던 율법과 행위의 무거운 짐에서 해방된 단어가 믿음이다. 루터가 종교개혁의 시작을 어떤 특별한 조항을 만든 것이 아니다. 그가 주장했던 놀라운 주제는 아주 단순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하나님께 영광, 오직 성경이었다. 이것을 실천했다. 그리고 청교도인들은 종교개혁의 위대한 가치를 그대로 몸으로 실천하며 신대륙에서 꿈을 키워갔던 것이다. 기다려라, 반드시 하나님의 때는 온다. 하나님의 축복의 때는 반드시 온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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