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예수님은 어떤 복음을 전하셨으며, 사도들에게 어떤 복음을 맡기셨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지극히 중요할 것이다.
예수님 : "너희의 구원을 위해 케뤼그마 사랑과 능력인 하나님으로서 내가 네 앞에 섰으니 무엇을 해 주길 윈하는가?(마 20:32)" "내가 너를 구원할줄 믿느냐?(마 9:28)" "네 믿음대로 되라.(마9:29)"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막 5:34)" "네가 나를 믿으면, 지금부터 모든 문제부터 해결되는 온전힐 구원을 받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도들의 전도와 유사한 형태로 철저하게 전도 대상을 중심으로 하고 파송된 복음 전파자와 이질감 없이 일체되는 복음을 믿음으로 당장의 문제로부터 구원 받도록 접근하셨다. 그래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성육신적인 복음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교육
*구약의 모든 율법 : "지금 여기에서"이다. (마 5:1-7:27), 너희는 기도조차도 전도를 위해 하라. ( 마 6:31-33(마 4:17), 마 7:7-12), 그러면 기도하고, 말 한 대로 이루리라.( 마 18:20. 21:22. 막 11:23-24)
*사도들 : 케뤼그마의 사랑과 능력으로 나와 함께하시는 하나님께서 너의 구원을 위해 나를 사도로.보내셨음을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눅 9:6)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복음 내용의 핵심은?
지금 여기에서 당신이 필요한 일을 해결해 주시려고 주께서 보내신 자가 지금 당신을 찾아왔습니다. 믿으면, 당신의 믿음대로 주께서 역사하신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전도는 창조시 수면위를 운행하시던(רָחַף, Hovering) 성령의 임재와 주님의 함께 하심으로, 온 몸에 가득한 권능을 사랑 다 해 입으로 복음을 선포하여, 전인적인 믿음으로 받아들여 구원을 얻게 한다는 점이다. 즉, 전도는 인생의 경이로운 현실적 창조를 의미했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복음전도이다.
예수 복음의 능력과
사도들의 담대함과 당당함
사도적 복음은 현장에서 전도 대상들의 문제와 맞장뜨는 복음전도였기에, 예수님은 모든 전도자들이 위축당하지 않도록 둘씩(막 6:7, 눅 10:1) 보냄으로 보증하는 힘을 삼고, 복음 Oracle 선포로 명령하도록.훈련하심으로(막 6!12, 요 1315) 담대함에 당당함을 더하셨다.(행 413-14) 그러면서도 요구하는 바는 "당장의 믿음" 뿐이었다. 이것이 사도적 안수귄능의 정통성에서 나온 복음전도였다. 그래서 사도적 복음전도가 기독교 전도의 표준 모델이 되고, 사역 모델이 되어야만 한다. 그러지 않고는 변질되어가는 복음과 기독교의 퇴락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사도적 신앙을 전승하고 있는 현실적인 교회를 찾아 보존하는 일이 중요하다.
그들이 사도적 사명의 불을 지켜왔기 때문이다. 그리할 때에 지금까지 잘못된 영성으로 하나님 앞에서 세상을 속여온 모든 거짓 집단들이 손을 놓고 물러서게 될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아무에게나, 사두개인이나 바리새인에게도 맡길 수 없어서 굳이 사도들을 선발하여 동고동락하는 3년을 바치셨던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서 주께서 추구하셨던 것은 복음 따로 권능 따로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처럼, 전하는 복음의 내용과 능력을 믿음의 인격으로 감당할 거의 Mono type preacher(거의 일체형 복음전도자)을 양성하시는 것이었다고 이해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어찌. 아무나 제사장일 수 있다는 "만인사제설"을 함부로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그 논리의 근본이 되는 본문부터 살펴보자.
분명 벧전 2:5-9절에서 9절의 대상은 성경독자가 따로 지정되어 있었다.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서 성경에 능통하여 돌아다니며 성경을 가르치던 순회설교자 아볼로가 있었는데(햄 18:24) 바로 그와같이 어정쩡한 지위로 순회설교를 하는 Nomad (흩어질 나그네)들에게 주는 권면의 편지(벧전 1:1-2) 중 일부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지나치게 로마가톨릭 사제직파 문통보에 대한 감정이 격하게 남아 있어서 2:9절의 내용이 결코 베드로 전서를 읽는 불특정다수를 포함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확인하지 못하고 자기 감정을 성경적인 것처럼 포장했을 만큼의 신학자였을 뿐임을 알 수 있다. 가장 위험한 신학자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사도적 안수를 전승하고 전하는 사도적 현장복음은 사도적 자존감과 열정과 확신 외에 악귀가 먼저 알아보고 반응한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마 8:28-26, 행 19:2-19) 그래서 사도적 현장 전도는 그간 모방한 모든 거짓 복음을 전하는 거짓 선지자들을 현장에서 구별시키는 진위를 감별하고 확인하는 방법이기도 하다.(행 19:2-19)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하시면서도 꾸준히 사도들을 훈련하며 현장에 파송하여 그 현장에서 참복음의 헌저한 탁월성을 증명하게 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사도들의 복음전도 현장에서는 몇몇 약간 의시대던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기존의 종교인들과 당신들은 왜 다른가?"에 대한 호기심 외에 별다른 시비가 없었다. 심지어 그 능력의 현저함 때문에, 증인된 사명자로서 다소 의심하던 세례 요한이나 요한의 제자들과의 충돌조차 한 적이 없었던 것이다.(눅 7:11-23) 즉, 사도적 복음 전도 능력은 모든 시비와 현장 충돌을 잠재우는 탁월함으로 승부하게 하며, 그 어떤 논쟁적 의문도 불식시키는 능력까지 발휘하게 하였다.
사도들의 복음 전도 능력은
현장의 모든 논쟁을 잠재웠다
우리는 기독교 내에서 시작되었던 삼의일체 논쟁이나 신앙고백 논쟁의 출발점이 언제부터 였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문제는 분명히 사도적 복음으로 사역할. 때에는.있지도 않았었다.카타콤시대 이후 사도적 전도가 멈추고 구약을 정경으로 받아들인 이후에 발생한 문제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사도적 복음을 전할 때에는 위생적, 도덕적, 의학적 문제도 일어나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역하시던 공생애 기간에도 위생적인 정결예법에 관한 시비(마 15:1-2)는 활발했었으나, 어떤 맹인을. 치로할 때에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서 그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으로가서 씻으라고 하였다. 그것으로 시비가일지도 않았었었다.(요 9:6-11) 귀 먹고 말 더듬는 자에게 손가락을 그의 양 귀에 넣고 침을 뱉어 그의 혀에 손을 대시고 "에바다"(열려라) 선포하셔서 잘 듣고 말도 잘 하게 하셨지만 누구도 그런 일로 시비하지도 않았었다(마 7:32-35).
하루는 시몬의 집에 초대되어 만찬을 즐기실 때에 한 여언이 삼백 데나리온 이상 홋가하는 순,전한 나드향 한 옥합으로 예수의 머리에 기름을 부어 모두를 놀라게한 일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이 이. 현장을 보고 그 여인이 고가의 향유를 허비하는 것을 보고 "왜 그것을 말리지 않느냐?"고 0하는 힐난은 있었으나 곧장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현장이 안정을 찾았었다.(막 14 :3-9)
그리고 예수님은 유대인의 문화와 이질적인 삶을 사셨다. 유대인들은 당시에 식사에 절제하며 포도주를 삼가며 세리와 죄인들을 멀리하였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유대인들 표현대로 "탐식가, 포도주 중독자,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는 조롱을 들었다. (마. 11:18-19)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인 별명이고 애칭이었을뿐 ,그것으로 사회적 물의가 발생하거나 사역이 방해 되는 사건으로 비화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꿈꾸는 사도적 사역이 워낙 현실적이고 위대하여 Unique한 파급력으로 하나님의 실존을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도적 복음전도는 그 전파자와 전하는 바 복음에 하나님의 임재가 다이나믹하게 경험되고 확실하게 뇌리에 각인되면서 하나님께 대한 경외하는 감정이 그 사역자들을 포괄하여 세상을 압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세상을 압도하는
복음 전도 능력
지금도 여전히 그러한 사도적 복음전도는 필요하고 여전히 가능하다. 영국국교회를 통해 어어온 사도적 귄능의 촛불이 존 웨슬리에 의해 횃불로 회복되어 성결운동을 통해 성결교회로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이다.
아직 역사에는 비록 그 훈련들이 미흡하고 안수 권능에 대한 인식이 흐릿해졌을지라도, 성결교회를 통해서 여전히 사도적 귄능의 촛불이 맥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결교회가 있는한, 여전히 세계복음화의 꿈은 살아 숨쉬고 있는 것이다.
불은 꺼지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레 6:9-13)
레 6:9-13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명령하여 이르라 번제의 규례는 이러하니라 번제물은 아침까지 제단 위에 있는 석쇠 위에 두고 제단의 불이 그 위에서 꺼지지 않게 할 것이요 10제사장은 세마포 긴 옷을 입고 세마포 속바지로 하체를 가리고 제단 위에서 불태운 번제의 재를 가져다가 제단 곁에 두고 11그 옷을 벗고 다른 옷을 입고 그 재를 진영 바깥 정결한 곳으로 가져갈 것이요 12제단 위의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서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서 불사를지며 13불은 끊임이 없이 제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지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불이 꺼질 위기는 언제나 상존해 왔다. 그럼에도 때로는 횃불이 되었다가 작은 등불이 되었다가 아스르하게 살아남아야 했던 촛불로 생존하면서도 생명력을 이어온 것이 중요했다.
예수님은 이 땅에 불을 던지러 오셔서(눅 12:49) 사도적 성령의 불을 붙이셨다. 사도적 안수로 그 불을 보존하며 전승하게 하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