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엄찬 왕의 아들로 영광의 세월을 치장했던 솔로몬은 누구보다 파란만장한 삶을 보내었다. 체험적으로 위아래의 삶을 누구보다 겪었던 솔로몬이 전도자의 이름으로 후세들에게 짧은 메시지를 남겼다. 두 세계에서 두 삶을 살아감은 우리의 경험적 실상이다. 우리의 의식과 별개로 인간은 해 위의 삶과 해 아래의 삶을 살아가게끔 되어 있다. 궁창 위와 궁창 아래의 삶이 있듯 성경은 위에 속한 사람과 아래에 속한 사람의 삶을 극명히 나누고 있다.
창조 기사를 보면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듯 새와 물고기를 나누시고 땅과 바다를 나누시고 풀과 과목을 나누시고 인간과 짐승을 나누신다. 각각이지만 나눠지지 않는 삼위일체 하나님은 분리와 통합이 결코 다르지 않음을 알려주신다. 알파와 오메가, 시작과 끝, 처음과 나중이 다르지 않음은 시계를 보면 이해할 수 있다. 초침과 분침과 시침이 정확히 12에 머무는 순간은 0시의 첫 순간인 동시에 하루의 시간이 끝나는 24시의 마지막 순간이다.
뿐만 아니라 인간까지 남자와 여자로 나누신 것은 분리를 통한 하나님의 경륜을 여실히 보여준다. 분리도 통합도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이것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때에 맞지 않으면 다른 분리가 되고 거짓 통합이 된다. 제대로 분리되어야 제대로 통합된다. 그것이 성육신의 원리다. 남자와 여자는 결혼으로 통합되고 유대인과 이방인은 복음으로 통합되고 주님과 성도는 교회로 통합된다. 죄로 이지러진 천지는 신천신지의 낙원으로 통합된다.
사탄은 그럴듯한 통합으로 하나님의 분리 경륜을 막았다. 생명 원리를 선악 논리로 나누었던 분열의 최고수 사탄은 가인의 독단적 제사 방식으로 예배를 갈랐다. 아벨이 사라지자 하나님은 셈을 일으켜 아벨의 자리를 메우셨다. 거룩은 다름 아닌 분리다. 죄에서 자신을 분리시킴이 거룩의 본질이다. 출애굽은 하나님의 백성을 옛 세상 애굽에서 분리시켜 새 세상인 가나안으로 이주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애굽에서도 고센은 분리의 땅이었다.
분리에는 거짓 통합으로, 통합에는 교묘한 분리로 하나님을 대적하려던 훼방꾼 사탄은 늘 대항마를 조련시켜 하나님의 구원을 위한 경주마를 견제했다. 이삭에게는 이스마엘을, 열두 지파에게는 열두 방백을, 야곱에게는 에서를, 선민 이스라엘에게는 애굽과 앗수르와 바벨론과 헬라와 로마로 번갈아 괴롭혔다. 심지어 주님의 제자 그룹에 가룟 유다를 심고 일곱 집사 중에는 니골라를 심었다. 알곡 사이에 가라지를 심고 양들 속에 염소를 두었다.
그의 패악질은 투구와 비슷한데 그의 장기인 견제구는 빠르고 기묘해서 받아치기가 어려워 마구라 불렸지만 하나님께는 어떤 마구도 통하지 않는 타격 능력이 있었다. 사사기는 4번 타자 급에 해당하는 구원자들을 보여준다. 뒤집기의 명수인 사탄에게 돌아가는 것은 화뿐이다.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그들은 화 있을진저!”(사 5: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