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본성(nature)으로서의 '질서(order)'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 연구회 회원)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해가 절실

지난 8월 15일에 본헤럴드를 통해 백석대학교 주○○ 교수가 공식적으로 여성목사 안수를 반대하고 있는 교단들을 향해 여성목사 안수에 대한 공개토론을 제안하는 기사가 올려졌는데, 불과 몇 일 사이로 조회수가 폭등하고 있는 모양이다. 또한 S·N·S를 통해서 ‘목사’라는 직분 자체가 성경본문에서 전혀 인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기사가 게재되기도 했는데, 이 같은 현상들은 한마디로 기존 질서에 대한 재정립(再定立)의 요구라 할 것이며, 이는 곧 가역(可逆)적 양상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런데 기존 질서의 재정립과 같은 가역적 양상(역행 할 수 있다고 보는 관점)과 관련해서 하나님의 섭리(providence)를 생각해 본다면, 그것은 경륜(dispensation)가운데서 이해하는 방식이라 해야 할 것이다. 즉 하나님의 보존과 통치를 시간과 역사의 경륜 가운데서 파악하여 이해하는 방식으로서, 시대적인 흐름과 변화 안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다스리심을 해석해 보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할 때에 비로소 기존 질서에 대한 가역적 접근법이라 할 재정립의 요구 또한 수용될 여지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신학의 체계에 있어서 섭리의 위치는 잘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역(works)에 위치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사역은 또한 하나님의 작정(decrees) 가운데서의 시행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역인 섭리는 기본적으로 경륜적인 이해가 아니라 작정하시는 하나님의 본질(essential nature) 가운데서의 이해가 바탕이요 근거라 하겠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섭리는 시간의 경륜(혹은 역사) 가운데서 비로소 시행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작정에 근거하여 시현(示現)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기초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에 근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 특히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해 가운데서 발견되는 특징에는 ‘질서’의 측면이 있다. 고전 14:33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르기를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고 했는데, 그 말씀은 곧 하나님의 본질, 특별히 삼위일체로서의 하나님의 특성 가운데에 고유한 질서가 있음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왜냐하면 ‘화평’으로 번역된 헬라어 ‘에이레네(εἰρἡτνη)’는 조화로움 혹은 일치된 질서로서의 의미 또한 지니고 있는 단어인데, 앞에서 언급한 불안정과 무질서를 나타내는 헬라어 ‘아카타스타시아(ἀκαταστασία)’의 용례와 같은 맥락 가운데서 그 뜻은 ‘질서’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의 개신교 신학에서 무용지물처럼 취급되어 있는 삼위일체(Trinity)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과 함께 시간적 경륜인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핵심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는 삼위(성부, 성자, 성령)의 각 위격 간에 결코 거스르지 않는 질서가 명확하게 정립되어 있다. 그 가운데서도 각 위격 간의 고유한 역할과 일하심에 대한 “성부께서는 그 자신으로부터 성자와 성령을 통해 일하시며, 성자께서는 성부께로부터 성령을 통해 일하시며, 성령께서는 성부와 성자로부터 일하신다.”는 서술방식은, 삼위 간의 독특한 질서로서 결코 깨뜨려지거나 그 순서 혹은 관계가 바뀔 수 없이 명백하게 정립되어 있다.

때문에 각 위격의 사역은 그러한 삼위일체의 질서 가운데서 각각 구별되되 결코 분리함이나 역전됨이 없이 일체적(동등함)으로 이뤄진다는 것이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예정과, 그에 바탕을 둔 섭리에 대한 올바른 기초다. 한마디로 세상의 창조와 모든 세상과 질서들을 지으신 하나님 자신이 친히 질서 가운데 계시는 분이시라는 점에서 창조세계의 질서는 하나님 앞에 필연적(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점에서의 필연)이라 하겠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고전 14:33절에서 사도가 이르는 것처럼 철저히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의 사역인 섭리 또한 무질서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질서를 그대로 닮아 있는 가운데서 질서 있고 조화롭게 구현되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서의 택하심으로 이뤄지는 교회의 조직 또한 질서를 이루는데, 그러한 질서를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장로교회의 체제이며, 거기에는 삼위 하나님 안에서의 상호간 독특한 질서 뿐 아니라, 그 질서 가운데서의 상호간 사역과 역할의 구별이 명백히 성립하는 것을 닮은 질서가 뚜렷하다.

예컨대 삼위 하나님 안에서 각각의 역할과 사역이 섞이거나 혼동될 수 없는 것처럼, 장로교회의 직제가 갖는 질서 또한 뒤섞일 수 없다. 그렇다고 삼위 하나님이 각각의 역할과 사역으로 말미암아 어떤 등위(혹은 서열)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장로교회의 직제 또한 직능(職能)상의 분명한 구별이 있는 가운데서도 각각 동등(同等)한 성격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므로 장로교회의 직제 가운데서 목사, 장로, 집사를 각각의 서열로 생각하는 것은 전혀 합당하지 않을 뿐 아니라, 삼위일체의 질서의 모사(模寫)로서의 장로교회의 독특한 성격을 파손하여 로마가톨릭과 같이 타락해 버리는 중대한 범죄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또한 그러한 교회의 독특한 질서 안에서 남녀의 분명한 구별과 동등함이 질서로서 자리하고 있다. 본질적으로 남자의 역할과 기능, 그리고 여자의 역할과 기능은 분명히 구별이 있는 것이며, 그러한 역할과 기능을 뒤집거나 뒤섞는 것은 성경에서 일절 배제하는 원리다. 그러므로 창 1:27절에서도 인간의 창조에 대해서 동일한 “하나님의 형상(צלם)”으로서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서 명백히 구별하여 창조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그처럼 명백한 구별로서 창 2:18-24절을 이해하여야 하는 것이니, 그러한 하나님의 창조질서는 시대와 경륜에 따라 변할 수 없는 질서라는 점에서 고전 11:2-16절의 여자에 대한 규례(머리를 가리는 것)와 관련한 본문을 올바르게 풀이할 수 있다.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고전 11:9)”이다. 그러나 그러한 남자와 여자의 구별이 결코 차별(差別)이나 등위(等位)의 서열이 아니라는 사실이 이어지는 “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고전 11:11)”는 말씀에 분명하게 드러나 있다.

결국, 고전 14:34절의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는 말씀도 김○○○ 교수의 주장처럼 후대에 누군가에 의해 삽입된 것이 아니라, 이미 11장에서부터 일관되게 주장된 질서 가운데서 당연하게 언급하고 있는 남녀 간의 질서에 대한 본문임이 분명하다. 아울러 그것이 신약시대의 독특한 문화 가운데서의 특수성을 내포하는 문맥 또한 아니라는 사실을 이어지는 “율법에 이른 것같이 오직 복종할 것이요”라는 말씀이 드러내고 있으니, 그것은 창 3:16절의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말씀에 대한 신약의 적용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창세기에서부터 신약성경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남녀 간 창조의 질서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러한 질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사람이 지니는 일종의 모형(模型)적 질서라 하겠다. 아울러 그 원형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니, 그러한 원형 가운데서의 질서와 원리를 그가 주권적으로 모으시는 교회(하나님의 교회)의 가시화 된 직제(목사, 장로, 집사의 구별과 동등함)가 또한 모형적으로 나타낸다(아울러 나타내 주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의 시류(時流)는 모든 것들을 뒤섞으며 모든 것들을 뒤집어 버리는 점에서 가역(可逆)적이다. 하지만 시간의 질서가 비가역적인 것(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것)처럼, 하나님의 창조질서와 그러한 창조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교회 가운데서의 질서 또한 마땅히 비가역적(역행 할 수 없다고 보는 관점)이다.

바로 그러한 질서를 어지럽히며 거꾸로 뒤집는 사조(思潮)들은 결코 가벼운 오류가 아니며, 오히려 창 11:4절에서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거스르는)” 하려고 했던 바벨(혼돈)의 사람들이 보여준 무질서(‘바벨’이라는 단어도 그렇고, 바벨탑 사건이 보여주는 죄의 양상은 인간의 교만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질서에 대한 반역이요, 그런 의미에서의 무질서다. 그러므로 그에 대한 형벌도 언어의 무질서와 흩어짐이었다)에 해당하는 크고 가증스런 죄악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질서를 상실한 가운데서 마치 바벨의 혼잡과 같이, 동일한 성경 본문(고전 14:34)을 가지고서도 서로 다른 말들을 하여 언어가 혼잡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조화로운 질서)의 하나님이시니라. (고전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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