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눅 16:1-13]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성경 난제 중에 난제이다. “불의한 재물에 충성”(faithful in the wicked riches, 11절)에 주님께서 충성하라고 명령한 것을 풀 수 없다. 불의한 청지기는 퇴출되었을까? 본문에서 청지기의 퇴출과 잔존을 아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불의한 재물에 충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의 재산을 맡아서 관리하는 청지기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것을 알고 주인이 해고를 통지했다(2절). 청지기는 쫓겨난 후의 삶을 대비하여 주인에게 빚진 자들의 빚을 임의로 경감시키는 것은 단행하여, 빛을 청산해 주었다(3-7절). 그런데 주인은 청지기가 증서를 조작했는데도(7절) 지혜롭게 했다고 칭찬한 것이다(8절). 그리고 불의한 재물을 친구로 삼으라고 명령하셨다(9절). ἑαυτοῖς ποιήσατε φίλους ἐκ τοῦ μαμωνᾶ τῆς ἀδικίας, Make you friends with the riches of iniquity(Geneva1559)/Make to yourselves friends of the mammon of unrighteousness(KJV).

“불의한 재물”을 친구로 삼으라는 것은 이 땅에 지극히 작은 것에도 충성하라는 것이다(10절). 이 땅에서 가장 작은 것이 돈이라고 규정하고, 그 돈에 충성할 것을 촉구한다. 그런데 세상은 돈을 가장 크게 보는 부류와 돈을 가장 작게 보는 부류로 나뉜다. 돈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이지만, 그 작은 것에 충성해야 한다. 돈을 슬기롭게 관리하는 능력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하다.

11절 τῷ ἀδίκῳ μαμωνᾷ πιστοὶ를 불의한 재물(the unrighteous wealth)을 영역(英譯)에서는 세상 제물(worldly wealth)로 번역했다. 이 작은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않으면 어떤 것도 맡을 수 없다. 그런데 세상에서는 그 지극히 작은 돈을 가장 크게 보는 것이 문제다.

그 불의한 청지기는 퇴출되었다고 보아야 하고, 그가 부당하게 서류 조작을 한 것이 주인에게 이득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불의한 청지기의 불법이 주인의 마음에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법은 불법이고, 사람이 기뻐해도 하나님의 판단은 다르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기 때문이다(13절). 그래서 돈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것이고, 사람은 가장 작은 돈에 충성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작은 수준에 있음을 반드시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일만 악의 뿌리다(딤전 6:10).

2. [눅 16:14-18] 율법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 누가는 바리새인을 돈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규정한다(14절). 다른 복음서에서는 외식하는 자로 규정했다. 16:1-16절의 내용은 돈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바리새인들이 이해한 것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을 제시하며, 사람에게 높임을 받지만 하나님 앞에서 미움을 받는 것이라고 지적하셨다(15절).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면서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그런데 돈을 사랑하면서 돈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도 정직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지 않지만 주께서 주신 세상의 산물의 매체이기 때문에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며,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한다.

예수께서 율법과 선지자와 요한의 때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야 할 것으로 가름하셨다(16절). 요한 이후에는 하나님 나라 복음이 전파되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의와 평강과 희락을 위한 죄사함이 모든 사람에게서 믿음으로 실현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전념할 것인가? 돈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할 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돈이 필요하다. 그러나 돈을 위해서 율법을 이용하는 것은 부당하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서 율법의 한 획도 떨어지지 않는다(17절). 율법으로 정죄하지 않으며 자기 명예를 높이려고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질서(법)가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율법을 이용해서 많은 사람의 빚을 탕감한다면 지혜로운 청지기가 될 것이다. 모든 주장들은 사라질 것이지만, 주 예수의 복음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생뚱맞게 “자기 아내를 버리는 것”과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것”을 정죄한 말씀이 있다(18절, 참고 마 5:31-32, 19:8-9, 막 10:11-12). 마가복음에서는 남편과 아내 상호가 버리지 않도록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의 악함을 지적하는 것이다. 율법에 철저하다고 하면서 자기 본위로 율법을 조작한 것이다.

3. [눅 16:19-31] 부자와 거지 나사로. 누가복음에만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가 등장한다. 비유라고 하지만 사실로 수용하고 있다.

부자와 나사로라는 거지가 공존했는데, 거지는 부자의 대문에서 개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20-21절). 거지가 죽어 아브라함의 품으로 들어갔고, 부자도 죽었고 음부의 고통으로 들어갔다(22-23절). 그런데 음부에 있던 부자가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았다.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청원했다(24절). 나사로에게 물 한 방울을 간청했지만 거부되었다(24-25절). 그러자 다시 형제 다섯에게 고통에 오지 않도록 청원했다(28절). 아브라함은 선지자에게 들어야 한다고 거부했다(29-31절).

누가복음 16장에서는 돈과 구제에 관한 훈련으로 볼 수 있겠다. 첫째, 부자가 거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어야 했다. 부자의 옹색함은 음부에서 물 한 방울을 구해도 얻을 수 없는 징벌이 되었다. 둘째, 부자는 그래도 담대하게 자기 형제들이 자기에게로 오지 않도록 간청했다. 그것도 거절되었다. 지옥에 있는 친족이 가족을 지옥으로 초청하는 일은 없다. 그런데 우리 제사 제도에는 부정 타는 일이 있다. 셋째, 음부와 아브라함의 품은 상호 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다. 나사로는 어떤 악감정이 없는데 반해, 음부에 있는 부자는 꾸준하게 불만을 갖고 있다.

어떤 불교 승(僧)이 지옥에 가서 대자대비(大慈大悲)를 실현하겠다는 가르치는 모습을 보았다. 그 가르침이 대각(大悟覺性)인지는 모르겠지만, 지옥을 유희(遊戱)로 판단한 것이다. 영원토록 지옥에 스스로 머물겠다는 자세는 대승(大僧)의 각성일 수 있지만, 많은 사람을 지옥으로 이끄는 것임을 각성하지 못한 것이다. 모세, 예레미야, 사도 바울도 자기 영혼의 파괴를 주장했다. 마치 유사하게 말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웃(민족) 구원에 대한 간절한 소원을 외친 것이다. 의인은 결코 지옥에 내려갈 수 없다. 의인을 지옥으로 보내는 심판자가 어디 있을까? 영화에서 감옥으로 들어가는 의인이 있는데, 그 의인은 반드시 불의자로 판결을 받아야 거기에 들어갈 수 있다. 의인이 원해서 감옥으로 들어가 죄인과 함께하는 발상은 받아드리기 쉽지 않다. 모세와 같은 기도는 전도자의 간절한 심장을 하나님께 고백하는 것이다.

4. 전능하신 하나님, 옳지 않는 세상에서 거룩한 자녀로 우리를 부르셨나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고 복되게 할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자녀로, 이 세상 사람에게 죄사함, 영생 복음을 전하게 하옵소서. 누가복음 16장은 사역자가 주의해야 할 세 가지, 돈, 명예, 성(性)을 말씀하는 것 같습니다. 주의 사역자를 붙들어 거룩하고 완전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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