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눅 17:1-10] 실족(사기)과 죄용서 그리고 순종.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실족하게 하는 것에 대한 경고(1-2절, 마 18:6-7; 21:22; 막 9:42), 그리고 실족하게 한 사람이 용서를 구할 때에는 용서하라고 하셨다(3-4절). 우리 사회에서 발생한 “Me Too 운동”은 용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를 선언하는 운동이다. 피해를 고백함으로 피해당사자에게 위로가 된다면 좋겠다. 그러나 “실족케 한 사람”이 용서를 구할 때 바로 용서하려면 이미 마음에 용서된 상태여야 한다.

성경은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2절)는 아주 무서운 표현을 사용한다. 실족케한 자가 실족당하는 사람의 목에 연자맷돌을 달아 바다에 던지는 모습이다. “실족케 하는 일”은 선생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선생된 자는 많이 선생되지 않도록 해야 하고(약 3:1), 그리고 실족케 하는 일을 잘 파악해서 힘써 회개해야 한다(3-4절). 선생은 자기에게 회개하는 사람을 회개하고 용서해야 하다(3-4절). 그러나 타인에게 회개해야 되지만, 당연한 용서를 바라지 않아야 한다.

사도들은 주께 믿음을 구했다(5절). 예수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것은 매우 어려운 사안이다. 주께서는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If you had faith like a grain of mustard seed)을 말씀하셨다(6절). 그리고 산을 옮기는 믿음(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라)을 소유할 때 무익한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다(8-10절).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으면 뽕나무가(mulberry tree) 순종할 것이다(6절). 밭을 갈고 일을 끝낸 종이 올 때에 주인은 쉬라고 하지 않고, 밥상을 차리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먹을 동안 수종을 들라고 명령한다. 식사 후에 종에게 감사하겠는가?(7-9절). 오히려 종이 주인에게 충성을 고백해야 한다. 주이신 예수의 명령을 수행하는 종은 주의 명령을 다 수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we have only done what was our duty)”이라고 말할 것이다(10절). 사도 바울은 자신을 종이라고 고백했다(롬 1:1).

2. [눅 17:11-19] 열 명의 나병환자. 예수께서 사마리아와 갈릴리 경계 사이 길을 통해 예루살렘으로 가셨다(11절). 예수께서 한 마을에 들어섰을 때에 나병환자 10명이 소리를 높여 치료를 간청했다(12-13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제사장에게 가서 보이라고 명령하셨다. 10명은 모두 순종했고, 제사장에게 가는 길에 그들이 깨끗해 졌다(14절). 10명 중에 한 사람이 예수께 나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고마움을 표현했다(16절). 그 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10 명의 나병환자에게는 국경선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런데 나병이 치유되자 바로 민족과 민족의 분리가 발생했다. 예수께서 그 한 사람에게 9 명의 근황을 물었다(17절). 9명의 국적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 오직 그 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이었지만, 예수께서 순종한 그이에게 믿음으로 구원됨을 선언하셨다(18-19절). 10명의 나병환자들은 예수께 나와서 치료를 요청했고, 이해할 수 없는 명령까지 순종했다. 그러나 모두가 하나님께 영광으로 귀결하지 못했는데, 9명의 순종은 믿음이 아닌 것이다. 9명은 나병환자에서 나음을 입었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진정한 순종과 믿음의 결국은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사역말미에서 죄인 중의 괴수라고 고백했다(딤전1:15).

3. [눅 17:20-21]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고 하셨다(20-21절, “The kingdom of God is not coming in ways that can be observed, nor will they say, ‘Look, here it is!’ or ‘There!’ for behold, the kingdom of God is in the midst of you.”).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루살렘과 유대에 실현되는 것으로 기대했다(행 1:6). 그런데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the kingdom of God is within you)”고 하셨다(21절). 1세기 “유대인이 구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성격이 전혀 달랐다. 유대인이 기대한 하나님의 나라는 지상에 설립될 나라였는데, 예수는 자기 백성 안에 형성되는 나라를 지시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여기에도 저기에도 알 수 없는데,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는 하나님 나라(The Visible Kingdom of God)는 거짓이다. 교회는 어거스틴 이래로 담대하게 보이는 말씀(Verba visibilia)이라고 성찬을 지시했다.

4. [눅 17:22-37] 인자의 날. 예수께서 인자의 날(the days of the Son of Man)을 말씀하셨다(22절). 당시 유대인들이 “메시아 도래”를 기대했음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자기가 메시아이기 때문에, “인자의 날”이라고 하셨다. 바리새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메시아의 도래)이 기다리지만, 외적으로 오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없을 것이다(22절).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어떤 이적과 기사에도 흔들리지 말고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셨다(23절). 그리고 어떻게 하라는 명령(매뉴얼)이 없다. 말씀으로 추론하면 “나(인자, 예수)를 떠나지 말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미 인자가 왔는데, 그 메시아 앞에서 메시아의 나라를 원하는 모습은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하나님의 성육신이 인자의 오심이고 종말의 시작이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제자들도 하나님 나라 도래를 구했다(행 1:6). 이 땅 위에 온 메시아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실현할 것이다. 이 사상은 성경이 말하는 사상이 아니라 유대교의 사상이다. 성경은 메시아는 세례 요한(엘리야)을 지목했으며, 그가 지목하시는 이가 메시아이다(요 1장). 시대를 분별해서 메시아 오심을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재림주께서 오심은 오히려 시대를 분별해야 한다. 재림주로서 인자는 도둑처럼 오실 것이다(24절, 살후 2:2).

인자가 올 때는 번개가 비치는 것과 같으며(24절), 노아의 때와 같다(26-27절). 노아의 때와 롯의 때는 마지막 심판 직전까지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심고 집을 짓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 날이 오면 순식간에 모든 것이 중지되고, 전혀 다른 세상을 보게 된다(30절).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 도래를 기대하는 바리새인과 제자에게, 오히려 마지막 오심(재림)에 대해서 말씀하고 계신다. 그리고 70년에 임박할 예루살렘 심판을 역사적인 예표로 제시하고 계신다(31-37절). 인자의 날은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성육신, 70년 예루살렘의 파괴, 시간의 끝에 오실 심판주 등이 인자의 날이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아닌 모스크가 있다. 예루살렘 왕국(Kingdom of Jerusalem, 1099-1291, 기독교 왕국)도 있었지만 성묘(聖廟)에 기독교 예배당이 있지만, 성전 자리에는 기념 건물이 없었던 것 같다. 그 자리에 638년에 모스크(Dome of the Rock)가 자리 잡고 있었다.

칼빈은 자연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현시의 빛을 번개빛으로 비교하기도 했다. 번개빛은 강력한 빛이지만 인지시킬 수 있는 능력은 없다. 불신자는 번개빛을 두려워하지만, 신자는 비를 준비한다. 하나님 나라이신 메시아께서 많은 고난을 받고 세대에서 버린바 된 후, 성령이 임해야 인자를 주와 구주로 증거하고 경배할 수 있다(25절). 노아의 때에는 노아의 방주를 보면서도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갔다. 홍수가 나기 직전까지 그 일을 행했다. 롯의 때도 소돔이 심판되기 전까지 방탕한 일상을 그대로 유지했다(28-29절). 하나님의 사자가 방문했는데 폭력을 일삼았다(창 19장). 인자가 나타났는데 유대와 예루살렘이 그렇게 행하고 있다(30절).

인자의 날에는 롯의 처를 기억해야 한다(32절). 오직 구원을 바라보며 뛰어야 한다. 34-35절은 휴거(携擧, rapture, 우리말로 하면 ‘들림’)의 한 구절로 사용하는 부분이다(참고. 마 24장). 제자들이 예수께 그 장소를 물을 때(“Where, Lord?”), 주검(corpse)이 있는 곳에 독수리가 모인다고 답하셨다(37절). 주 예수께서 계신 곳에 생명이 있고, 독수리가 모인 곳에 죽음이 있다.

5. 전능하신 하나님, 제가 부족하고 무지해서 실족케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실족케하는 일이 없도록 복을 주시고, 실족케하는 일을 했을 때 깨달음과 용서를 구할 용기를 주옵소서. 그리고 나에게 실족케하는 자를 속히 용서할 수 있도록 믿음의 담력을 주옵소서. 주님께 나의 심장을 드리지만, 내 심장의 값이 무료임을 증거합니다. 주님의 심장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주의 오심이 임박하였나이다.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에 빠름이 있게 하옵소서. 많은 주검이 모인 독수리 속에서 생명을 구원할 은혜와 담력을 주옵소서. 주님이 원하시는 곳으로 머물고, 원하시는 곳으로 뛰어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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