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 베케트(Thomas Becket, 1118-1170)는 캔터베리 대주교였는데,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와 갈등으로 살해되었는데, 로마 카톨릭과 성공회에서 성인으로 추인되었다. 헨리 8세가 1531년 수장령을 선포할 때에, 360년 전(前)의 죄를 기소하여 죽은자를 궐석으로 재판해서 부관참시했다.

백년 전쟁(Hundred Years' War)은 1337년부터 1453년 사이에 잉글랜드 왕국의 플랜태저넷 가와 프랑스 왕국의 발루아 가 사이에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를 놓고 일어난 전쟁이다.

랭커스터 가 헨리 5세(Henry V, 1386-1422)는 영화 더 킹(2019년)으로 재현되기도 했다. 요크 가(家)와 랭커스터 가(家)가 교차하면서 왕조를 유지했다. 장미 전쟁(Wars of the Roses, 1455-1485)은 붉은 장미를 표시로 삼은 랭커스터 왕가와 흰 장미를 표시로 삼은 요크 왕가 사이의 왕위 쟁탈전이다. 랭커스터 왕가와 요크 왕가의 전투에서 플랜테저넷 왕가의 에드워드 3세의 현손인 헨리 7세가 왕권을 찬탈해서 튜더 왕조를 시작했다.

잉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왕권을 가진 왕조는 튜터 왕조(Tudor dynasty, 1485-1603, 7대 왕)이다. 튜터 왕조의 기원은 웨일즈(Welsh)에서 시작되었다. 헨리 7세(1485-1509), 헨리 8세(1509-1547), 에드워드 6세(1547-1553), 제인 그레이(9일여왕, 1553-1553), 메리1세(피의 여왕, 1553-1558), 펠리페 2세(메리의 남편, 1554-1558), 엘리자베스 1세(1558-1603)이다.

스튜어드 왕조(1603-1649/복고왕조, 1660-1707)는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6세가 헨리 7세의 혈통(고손자)로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1603-1625). 스튜어드 왕조는 스코틀랜드 왕가였지만, 잉글랜드 왕의 혈통으로 자연스럽게 삼중왕(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이 되었다. 세 왕국은 “엄숙 동맹과 언약(Solemn League and Covenant, 1643년)”으로 개혁된 종교로 한 왕국을 이루려 했지만, 청교도 혁명을 이끄는 크롬웰(Oliver Cromwell, 1599-1658)의 강한 군사력에 의해서 세 왕국은 묶어졌다. 크롬웰의 공화정이 중단되고 1660년 찰스 2세로 왕정이 복고되었다. 찰스 2세(Charles II(1630-(재위)1660-1685)는 브레다 선언(Declaration of Breda, 1660년 4월 4일 발표)으로 복귀했지만, 지키지 않고 국교회위주의 종교 정책(주교제도, 성직임명권)을 펼쳤다.

찰스 2세와 제임스 2세는 국교회를 중심으로 종교 정책을 전개하면서,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을 무참하게 박해했다. 찰스 2세는 1661년에 무효법(The Rescissory Act)을 포고하면서 1633년 에서(1634-1660까지 무효) 연속함을 천명했다. 1662년에 포기법(The Abjuration Act)으로 1638년의 국민언약(the National Covenant)과 1643년의 엄숙 동맹과 언약(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 of 1643)을 파기했다. 당시 찰스 2세의 명령은 그래함(John Graham)이 수행했는데, 언약도들은 그를 “Bluidy Clavers”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언약도 목사들은 1662년 추방되었고, 1663년에는 무력으로 탄압했다. 1679년에 드럼크록 전투(The Battle of Drumclog)에서 400-500명의 언약도들이 무력으로 항전하여 전사했고, 포로가 된 1,200명은 에딘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1638년에 국민 언약을 맺었던 장소의 마당에 지붕 없는 감옥에 투옥되어 겨울을 보내야 했다. 1685년에 찰스 2세가 죽고, 제임스 2세가 계승했다. 1688년 네덜란드 오렌지의 윌리엄(제임스 2세의 딸)으로 명예혁명(the Glorious Revolution)을 통해서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메리 2세와 윌리엄 3세(오렌지 공)에 의해서 통치되었다. 보드로(Robert Wodrow)는 1661-1688년까지 17년을 킬링 타임(The Killing Time)이라고 정의했다. 1689년 권리장전(權利章典, Bill of Rights)으로 왕권신수설은 중단되었고, 인간의 자연권이 천명되었다.

잉글랜드 왕 존은 1215년 대헌장(大憲章, Magna Carta)으로 왕이 법에 의해서 통제되는 것을 귀족과 협정했다. 권리청원(權利請願, Petition of Rights)은 1628년에 잉글랜드 의회가 찰스 1세에게 승인을 요구했지만(단기의회), 왕은 1629년에 의회를 해산하며 거부했다.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를 정복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왕은 스코틀랜드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11년간 단독정치를 마치고 의회를 소집했다(장기의회). 장기의회(Long Parliament)는 크롬웰이 의회에서 무력으로 반대파를 축출시키고 잔부의회(Rump Parliament)까지 운영하면서, 1653년에 해산시켰다. 1660년에 왕정이 복고되면서 의회도 다시 복구되었다. 대헌장(1215), 권리청원(1628), 권리장전(1689)는 세계사에서 중요한 정보이다.

1689년 관용령(Toleration Act)이 의회를 통과하며 종교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1690년 회복법(The Act of Settlement)으로 총회가 형성되었고, 스코틀랜드 국가교회로 법제화되었다. 1712년에 "성직 추천령"이 스코틀랜드 의회를 통과했고,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분열했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The Free Church of Scotland)는 성직 추천을 거부하면서 지금까지 소수로 유지하고 있다. 유력한 사역자들은 에벤에셀 어스킨(Ebenezer Erskine), 토마스 길레스피(thomass Gillespie), 토마스 찰머스(thomas Chalmers) 등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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