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이다

십자가 고통의 무게는 사랑의 무게

고난당하신 금요일이다. 주님의 전신에 엉겨 붙은 검붉은 피가 망막에 어지럽다. 주님의 고통을 느껴보겠노라 고교시절에는 스테이플에 엄지손가락을 찍었고 군대 말년에는 마지막 공수유격 훈련을 받다가 5일차 종합 훈련하던 도중에 급성맹장으로 부산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수술을 받았으나 두 주가 지나도 회복되지 않고 오히려 수술 부위가 썩어 환부를 도려내야 했을 때 난 군의관에게 마취를 거부하고 생살을 도려낼 것을 주문했다. 신음소리 없이 이를 악물었지만 그 작은 고통을 어찌 십자가 고통에 감히 비하랴! 2017년 9월, 6cm로 급속히 자란 왼쪽 신장 제거 수술을 받고 회복실에서 지낼 때 통증이 심해 진통제를 이틀간 복용하고는 이내 중단했다. 고통을 견뎌보기 위해서였다. 수술 자국을 내려다보며 진땀나던 고통의 순간을 겪을 때마다 주님께서 감내하신 고통의 무게를 가늠해보았다. 측량할 수 없는 고통의 무게는 곧 사랑의 무게였다.

멜 깁슨이 만든 <The Passion of the Christ>가 영상 기술을 최대한 살려 고통 장면을 극대화시켜 많은 이들의 눈물을 뽑아냈지만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는 데서 얻는 내면의 고통을 능가할 수는 없다. 살이 찢기고 뼈가 부러져서만 고통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십자가를 제대로 묵상하면 주님이 당하신 극심한 고통의 일부를 절감할 수 있다. 성 프랜시스는 오상(五傷)의 고통을 실제로 겪는 신비 체험을 했지만 누구에게나 흔한 은총은 아니다. 피보다 진한 진실은 피 묻은 십자가가 형언할 수 없는 주님의 사랑의 속살을 우리에게 남김없이 보여준다는 점이다. 아, 할 수 있고 주님 사랑의 증거를 보여야 한다면 주님처럼 물과 피를 다 흘려 내 작은 사랑의 표식이라도 남기고 싶다. 지금 당하는 삶과 사역의 온갖 고난은 주님의 고난에 비하면 드넓은 대양에서 길은 한 방울의 물이다.

십자가 원근법, 극형의 현장-사랑의 현장

십자가를 묵상할 때 원근법을 활용하면 좋다. 멀리서 바라보면 사형수의 극형 장면이요 죄를 떠올리게 된다. 가까이에서 보면 하나님 사랑의 현장으로서 긍휼이 보인다. 죄의 박멸과 사랑의 실현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다. 주님은 세상의 죄 짐을 모두 짊어지신 죄인 괴수로 심판당하시고 메시아로서 인간이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하나님 사랑의 실체를 보여주셨다. 십자가는 영계의 현실을 완전히 뒤바꾸어놓았다. 타락 이후 인간의 영혼을 속박하고 있던 사탄은 철퇴를 맞고 혼절했다. 천상의 반란에서 당한 패배를 설욕하려고 오랜 동안 벼러왔던 사탄으로서는 의외의 사태에 충격을 받았다. 그가 맞장 상대로 기다려왔던 메시아는 유대인들이 기대했던 것처럼 칼을 가진 구세주였다. 천상의 군장(軍將) 미가엘에게 당한 패배를 주님에게서 설욕하려던 사탄의 절치부심이 여지없이 무너졌다. 십자가에서의 자발적 패배는 사탄이 예상치 못했던 ‘신의 한 수’였다.

십자가는 자기를 버리는 장소다. 살려고 발버둥치는 자리가 아니라 죽으려 목을 내미는 자리다. 모리아 산의 돌 제단에 결박당한 채 순순히 번제물이 되기로 아버지의 칼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겼던 이삭처럼 주님은 죽음의 칼을 드신 아버지 손에 자신의 영혼을 맡기셨다. 아버지의 입술이 내뱉은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 입다에게 번제물감으로 자신의 목숨을 내어놓은 무남독녀처럼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셨다. 그렇다. 사탄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님의 목숨을 취하셨다. 주님 스스로 생명을 버리셨다. 십자가의 능력은 버림과 자기희생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주님 가신 발자취를 좇는 그의 종들은 기필코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지 말고 맞아들여야 한다. 할 수만 있다면 더 많이, 더 자주, 더 확실하고 완벽히 죽어야 한다.

십자가 고난은 순전한 고난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육신의 고통이 극점을 향해 치닫고 있을 때 군병이 내미는 신 포도주를 마시셨다(마 27:48; 막 15:36; 요 19:29-30). 그러나 쓸개 탄 포도주는 거절하셨다(마 27:34). 마가복음의 기록에 따르면 몰약을 탄 포도주는 아예 받지 않으셨다(13:23). 어떤 학자들은 이 셋을 같은 것으로 간주하지만 다른 시간대에 이루어진 별개의 사건들이다. 마시고 마시지 않음이 분명한데 같은 사건으로 볼 수 없다. 신 포도주와 쓸개를 탄 포도주와 몰약을 탄 포도주는 명백하게 다르다. 이는 주님의 고난을 이해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언급들이다.

차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지면 관계상 생략한다. 단지 고난에 있어 섞인 것을 거부하신 주님의 의지는 참으로 놀라울 뿐이다. 고난을 경감시켜주는 포도주라 할지라도 다른 것이 섞인 것을 거부했음은 섞인 것을 싫어하시는 주님의 성품이 죽음의 순간에서까지 극명하게 드러났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고난이 순수하면 고난을 벗어나는 방도도 순수해야 한다. 순수한 고난에는 아무런 변명이나 회피가 있을 수 없다. 고난의 중심에서 고난자가 보는 것은 고난 속에서 빚어지는 진주의 영롱함이며 순백한 영혼의 모습이다. 애매한 고난일수록 아름답고 거룩한 고난일수록 성스럽다. 고난의 한도는 없다 최대치가 있다면 죽기까지다. 십자가 정신은 고난의 극점을 향해 전진하는 자기포기의 절정이다.

고난은 교회의 사명이자 특권

자신이 아니라 남을 위한 고난에는 고통을 넘어선 기쁨이 있다. 주님에게는 격심한 고난에 버금가는 큰 기쁨이 있었다. 바울은 골로새교회 성도들을 위해 받는 괴로움을 기뻐했다.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은 곧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이다. 죄 가운데 태어나 주님의 은혜로 새 생명을 얻은 성도가 자신을 위해 고난당하신 주님 위해 고난 받을 수 있음은 놀라운 특권이다. 바울은 자신이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남기신 고난으로 이해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불완전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상에 태어난 교회는 그리스도가 당했던 박해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동일한 고난을 겪는다. 주님의 몸 된 교회는 주님이 당하신 고난만큼 이 땅에서 고난당한다. 교회가 주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은 교회에게 맡기신 고난의 숙제 때문이다. 교회가 만민 구원을 위한 사명을 포기하지 않는 한 고난은 당연한 몫이다.

바울이 되기 전의 청년 사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데 앞장섰기에 누구보다 이 사실을 잘 안다. 교회의 박해자가 교회의 수호자로 변신하여 주님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육체의 온갖 고초를 겪게 되었으니 그가 느낀 감격이 어떠했으랴? 성경 역사나 교회사는 어떻게 마귀의 자식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박해자가 변하여 호교자(護敎者)가 되는지를 선명히 보여준다. 언제부터인가 교회 안에서 행복, 희망, 형통의 메시지가 호황을 누림에 비해 죄, 지옥, 심판, 고난, 십자가 등은 불황이라 여길 정도로 간간이 들릴 정도다. 오늘의 교회는 고난 이후의 영광을 누리느라 고난의 복됨을 잊어버렸다. 방금 부른 순교자의 찬양이 아직 여운으로 남아 있는데 고난과 죽음의 십자가를 외면함은 도리가 아니다. 영혼의 묵상에서 가장 중심을 차지해야 할 것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이 와도 십자가여야 한다.

십자가의 수치는 성도의 영광

은혜의 사람은 고난의 현장에서 투정부리거나 원망하지 않는다. 주님의 이름으로 고난당할 때에 받을 의인의 상을 알기 때문이다. 그 상의 크기와 의미를 알기에 신실한 종은 고난을 회피하지 않는다.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십자가는 목에 거는 것이 아니라 지는 것이다. 자신을 매다는 처형의식이 없으면 십자가를 천만 번 묵상하고 장기 금식을 수십 차례 행해도 아무 유익이 없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사형장으로 걸어가는 죄수의 위치에 자신을 두는 것”이라 해석한 스웨트(Swete)의 말은 옳다. 바울은 복음과의 만남은 늦었지만 십자가의 도를 일찍 깨달았다. 그에게 십자가는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십자가는 자신의 육성, 죄성, 부패성과 타락성을 매다는 형틀이었다. 그는 자신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수치스러워할 때 바울은 십자가를 공개적으로 자랑했다. 십자가에서 익힌 하나님의 사랑에 감복한 바울은 주님의 고난을 깊이 해석하고 자신이 받은 복음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전하는데 목숨을 걸었다. 그는 십자가의 복음을 전함에 있어 한 번도 주저하지 않았고 복음으로 인한 고난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고난을 맞이함에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고 이단의 괴수로 지탄받아도 당당하게 세상을 향해 우뚝 섰다. 오히려 벌레 같은 자신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지상 최고의 영광으로 간주하였다. 이런 자의식이 당신에게 있는가? 십자가를 향한 영광 의식이 분명한가? 십자가의 길을 거부하던 베드로가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힌 것은 십자가에 나타난 주님 사랑의 깊이와 높이를 알았고 그로 인한 수치가 곧 영광의 깊이와 높이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종교안에서는 어려운 일도 쉬워져

사흘 굶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 하루 금식이다. 당연히 아홉 끼나 음식을 섭취하지 않은 것이 세 끼니를 거른 것보다 힘들어야 한다. 그런데 거꾸로다. 이것이 굶식과 금식의 차이다. 금식이라 하면 몸이 초긴장을 하는 모양이다. 종교적 의미가 더해지면 쉬운 일도 어려워진다. 반면에 종교 안에서는 어려운 일도 쉬워진다. 살인의 경우가 그렇다. 사람이 가장 하기 힘든 일이 사람 죽이는 일이란다. 그런데 사상이나 신앙을 이유로 사람을 죽여야 할 경우에는 다르다. 역사의 페이지마다 붉게 물든 것은 이런 죽음들이 대부분이다. 사상적 이념이나 종교적 신념으로 사람들을 죽인 예가 얼마나 많은가?

구약의 전쟁사는 종교 갈등의 역사다. 십자군 운동과 이슬람의 크리스천 학살이나 제3제국의 인종 청소도 종교와 이념이 그 원인이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해묵은 분쟁도 종교 갈등이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오랜 영토 분쟁도 그 원뿌리가 종교 갈등이다. 잘못된 이념이나 신앙에 오염되면 자신도 모르게 살인귀가 되어버린다. 말로 죽이고 자신이 믿는 신의 이름으로 죽이고 기회만 되면 실제로 죽인다. 이슬람 신앙을 표방하는 소년 자살특공대들은 허리에 폭탄을 장착하고 어디든 불나방처럼 뛰어든다. 그것이 알라의 뜻이요 순교자로 떠받들어지는 순간 천상에서 엄청난 보상이 주어진다는 신념 때문에 앞 다투어 자살특공대의 선두에 서려 한다. 사람을 죽여도 아무 죄책감이 없고 종교적 희열에 빠진다. 두려운 일이다.

박해는 부흥을 번영은 쇠락을

현대교회는 박해가 사라진 평화로운 환경에서 고난의 의미를 잊어버렸다. 깨어 있지 않으면 안락함이란 가장 위험한 상태다. 잊으면 곧 잃는다. 망실(忘失)의 시간이 오래면 상실의 아픔을 겪는다. 교회는 지난 역사에서 배운 값비싼 교훈을 기억해야 한다. 박해가 교회를 허문 것이 아니라 번영과 부흥의 시대를 지나면서 교회가 쇠락의 길을 걷곤 했다. 모진 고난도 겪은 교회가 번영의 달콤함에 혹해서 무기력하게 무너지는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 역겨움을 느끼게 한다. 교회를 교회답게 지키고 강건케 만든 것은 오히려 모진 박해였음은 뼈아픈 역설이다. 교회는 너무 자주 같은 실수를 반복해왔다. 박해에서는 잘 견디고 이겼으나 부흥의 시대를 잠간 누리는 동안 무너지기 시작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 순간에도 교회는 같은 실수의 길을 걷지만 돌이킬 줄 모른다.

교회가 지닌 탐스런 열매는 언제나 고난 속에서 영근다. 고난으로 뺏기는 건 우리의 재물과 영예와 목숨이지만 고난으로 얻는 것은 비할 바 없는 영광과 능력과 순수한 영혼들이다. 한국교회의 영성은 성경공부, 새벽기도회, 부흥사경회 이전에 고난을 견디는 신앙에 있었다. 고난의 행군이 아무리 길고 험해도 교회는 살아남았다. 지금 한국교회가 처해 있는 위험은 역시 평안과 부흥의 시대를 잘 넘어서지 못함에 있다. 더욱 겸손하고 스스로를 낮추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초막절을 지킬 때 초막을 짓고 박한 식물을 먹으며 옛적 생활을 기억하려 했던 사실을 상기해야 한다. 이 시점에서 십자가의 원근법이 절실한 것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절묘한 중간점에서 죽음과 삶, 심판과 사랑을 공시적으로 묵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코로나바이러스로 전 세계가 죽음의 그림자와 실체 사이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미국의 확진자와 사망자 수가 정점을 향해 고공 행진 중이어서 이곳은 그야말로 비상상황이다. 봉쇄(lockdown) 조처가 더 연장되었고 그 이후의 추이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다. 진정 국면에 들어선 나라들조차 2차 감염 확산 우려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이 전대미문의 세계적 대재앙 국면에서 주님의 십자가를 이전보다 더 가까이에서 묵상함이 절실하다. 진노의 채찍질보다 감싸 안으시는 사랑의 뜨거운 손길을, 드센 긍휼의 기운을 가슴 때리는 전율로 느껴야 한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니고는 작금의 두려운 재앙을 벗어나거나 피하여 숨을 자가 없기 때문이다. 원하기만 하면 누구나 십자가 앞에서 모든 무거운 근심과 공포와 재앙의 짐들을 풀어놓는다. 그것이 우리에게는 복음이요 실질적인 구원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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