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코로나 바이러스로 야기된 일련의 사태들 가운데서 한국의 기독교회들은 신앙의 면면에 있어서 그동안 생각하지 못했던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예컨대 ‘온라인(online) 예배’라는 방식을 공적인 예배에서 차용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와 더불어서, 최근 불거지고 있는 소위 ‘온라인 성찬예식’과 같은 것의 타당성 문제가 그야말로 터치고 나오듯 불거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일찍이 사무엘 밀러는 그의 책 장로회 제도(Presbyterianism, 1835)에서 “우리는 주님의 만찬을 개인적으로 행하지 않는다.”고 하는 명제와 함께 온라인 성찬과 같은 변형된 성례에 대한 분명한 답을 주고 있다.

먼저 사무엘 밀러에 따르면 장로교회 사역자들의 경우에는 일반적으로 병자, 죽어가는 자, 그리고 개인의 집에서 사적으로 성례를 행하지 않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그들은 이 규례의 준수사항을 그 속성이 매우 교회적이며 공동체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성찬’(communion)으로서, 교황주의자들 가운데서 행하는 ‘단독 미사’(solitary mass)의 아이디어(idea)는 불합리하다.

2.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개인적 성찬(private communion)을 행한 것을 본 적이 없으며, 결코 보증할 수도 없다. 사도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떡을 뗀” 일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예배의 모임을 표현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교회 건물이 없었기에, 개인의 집에 모여서 함께 예배를 드렸다. 다락방 같은 곳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개인의 가정에서] 다 함께 모여서 성찬을 행했던 것이다. 그들은 한 곳에서만 모일 수가 없었고, 또한 핍박을 피해 이 곳 저 곳으로 옮겨 다녀야만 했다. 당시의 예배 형편이 그러했다.

또한 한 집에 사람이 다 모이기에 비좁을 경우에는, 여러 집으로 나누어 예배를 드리기도 했다. 그래도 병상에 누워있는 한 개인에게 성체를 상징하는 성찬을 가져다주었다는 것을 읽을 수 없다. 반대로 감동을 받은 사도가 병자의 심방을 지시하면, “교회의 장로”가 가서 기도를 했다(“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그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그를 위하여 기도할지니라.”약 5:14). [그 때에] 그들에게 성찬을 행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 『사무엘 밀러의 장로회 제도』(서울: 고백과문답, 2019), 182-189.

사실 사무엘 밀러에 따르면, 역사적으로 로마가톨릭교회에서 사적인 성례로서 성찬을 허용한 역사에는 ‘화체설 교리’(doctrine of Transubstantiation)와 더불어서 병자의 임종과 관련한 일련의 미신적인 관행들의 배경이 깔려 있다. 그러므로 사무엘 밀러는 사적인 성찬 시행의 금지와 관련하여 병자들과 임종 시의 상황에 대한 부과적인 설명을 덧붙이고 있는데, 그 설명은 또한 다음과 같다.

“3. 만일 죽어가는 사람이 간절히 성찬을 시행해주기를 원하는 경우에, 즉 임종 시에 받는 성찬(viaticum), 혹은 임종을 예비하는 것이나, 믿음을 받아들이겠다는 일종의 약속의 경우라도 성찬식은 개별적으로 행하지 않는다. 그들의 소망을 따라 적어도 많은 경우에 있어서, 그들에게 외적인 상징물을 의지하라고 격려하는 것은 구세주의 공로보다 더 의지하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런 관점은 분명 비 성경적이고 거짓이며, 영혼을 속이고 무너뜨리는 행위이기에 결코 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반면에 죽어가는 사람 옆에 성찬의 물건으로 기념하는 것이 이러한 [비성경적] 관점을 더욱더 선호하고 바란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사역자가 인간이 만든 종교적인 창안물로, 양심의 가책도 없이 이런 행위를 하는 것이 얼마나 부주의하며 불경건한 것인가?

장대선 목사
장대선 목사

4. 만일 이러한 행동이 시작되었다면, 그 끝은 어디에서 내야하겠는가? 모든 사람들은 예외가 없이 누구나 죽을 때에 가장 심각하다. 아무리 죄가 많고 패역한 자라 할지라도 실낱같은 소망이라도 붙잡고 싶어 한다. 그러나 모든 지혜자들은, 죽음의 순간에 회개한 사람들의 진심을 의심한다. 의식 있는 사역자라면,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

판단을 통해 그러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선을 긋고, 이 규례의 적합성을 따져야 할 것인가? 이러한 주제를 두고, 병자와 논쟁하고 따지며 말다툼을 해야 할 것인가?

만일 죽어가는 사람이 지식도 없고 믿음도 없어서 이러한 성찬을 행하기를 거부한다면, 그 때에는 환자를 흥분시키지 말고, 그 친구를 고통스럽게 하지 말고, 영벌이라는 심판이 있음을 선포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

한편으로, 우리가 양심의 가책을 누르고 그들의 소원을 따라, 성찬에 적합한 자인지 점검도 없이 성찬을 행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은혜의 외적인 상징을 의지하게 하고 죄 가운데 잠들도록 유인하여, 그들의 영혼을 망치고 속이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 다를 바가 있겠는가? 지켜보는 사람은 치명적으로 상처를 받을 텐데, 날마다 하나님 앞에 이러한 큰 죄를 지어도 되는 것인가?

5. 모든 경우, 병상에 누워있는 자들에게 그들이 성도이든 죄인이든지 간에 이러한 성찬 행하는 것을 중단함으로써, 우리는 의식 있는 사람이 받을 심각한 당황스러움을 피해야 한다. 죽어가는 사람은 물론 그 주변의 친구들에게 여러 가지로 가중된 악을 피해야만 한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에 그럴싸한 인상을 남기는 것 보다는 위대하고 살아있는 진리, 즉 구세주의 완벽한 의와 속죄 제사만이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성경적 근거임을 말하고자 한다.

이러한 믿음이 없이 형식적인 규례만 지키는 것은 아무런 소용도 없다. 비록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우리가 그들이 정한 규정을 이행하는 모임에 참석하는 자격을 박탈당한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영원을 위하여 안전하다. 이 정서가 끊임없이 엄숙하고 정교해질수록, 사람의 영혼을 더욱더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죽음이 임박한 시간에 피난처로 그 어떤 외적인 의식을 의지하게 만드는 권면이나 행위에 동의할수록, 우리는 가장 비성경적이고 사람을 속이며, 치명적인 일에 동의하는 셈이다.”

이러한 설명들 가운데서 사무엘 밀러는, “장로교인들은 이러한 근거를 받아들이고, 모든 일반적 사례들(ordinary cases) 가운데서 이러한 원칙을 고수한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런데 사무엘 밀러는 공동의 회중 가운데서가 아니라 사적인 장소에서 성찬을 시행하는 예외적인 경우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종종 성찬의 특권을 오랫동안 누린 후에도 교회의 독실하고 모범적인 교제가 몇 년 동안, 아마도 몇 년 동안 병상에 갇히게 되었거나, 혹은 평범한 형태로 성찬을 누릴 수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장로교 사역자는 교회의 장로를 데리고, 병상에 누워있는 사람의 친구 6명 정도를 데리고 교회의 대표를 만든 후, 병실에서 그 사람을 위해 성찬을 행할 수 있다.”고 하여 소규모라도 회중을 구성하여서만 성례를 시행하도록 하고 있어서, 목회적이고 현실적인 예외의 경우를 광범위하게 확대해석하지 않도록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경우는 “오랫동안 누린 후에도 교회의 독실하고 모범적인 교제가 몇 년 동안, 아마도 몇 년 동안 병상에 갇히게 되었거나, 혹은 평범한 형태로 성찬을 누릴 수 없는 경우”로 분명히 한정된다. 그러한 경우를 결코 보편적으로 인정되도록 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코로나 사태로 말미암아 한국의 일부 교회들 가운데서 제기되고 있는바 소위 ‘온라인 성찬예식’의 경우에는, 오히려 사무엘 밀러가 거부한 개인적인 성찬의 시행에 해당하는 부적절한 것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무엘 밀러는 “우리는 주님의 만찬을 개인적으로 행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말미에 이르기를, “우리가 그 문[예외적인 문]을 연 순간, 특별한 예외가 아니라면 이러한 성찬의 요소[빵과 포도주]를 평생 동안 성찬과 관계없이 살아온 사람에게 전달하는 행위로써 마치 천국으로 가는 여권을 얻은 것처럼 생각하게 하는 것은, 아무도 그 끝의 결과를 알 수 없는 유혹과 남용의 길을 고속도로처럼 닦아놓는 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엄중히 경고하고 있다.

이러한 사무엘 밀러의 가르침을, 코로나 사태에 직면해 있는 한국의 교회들은 귀담아 듣되, 그저 관련된 문구로서만이 아니라 신학적인 맥락과 원리를 정확히 이해하는 가운데서 규정적으로 파악하고 이해해야만 할 것이다. 바로 이를 위해, 하나님의 섭리는 사무엘 밀러와 같은 역사적인 인물들을 통해 이미 풍성한 글들을 남겨 주셨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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