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창1:1-3, 요1:1-4,

Credimus in unum Deum Patrem omnipotentem; factorem coeli et terrae, visibilium omnium et invisibilium.

We believe in one God, the Father, the Almighty, maker of heaven and earth, of all that is, seen and unseen.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데,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입니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도식을 불식시키기 위해서 서두에 긴 설명을 두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설정하면, 아들 하나님 시대, 성령 시대로 구분하는 세대주의의 초기 구조에 이르게 됩니다. “성령 시대”라는 이해는 양태론(樣態論, Modalism)적 견해이기 때문에 위험한 발상입니다. 우리는 이단을 반대하기 때문에 정통이 된다는 구도를 매우 경계해야 합니다. 고대 교회 교리 논쟁을 보면 더욱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위인은 아폴리나리우스(Apollinarius)입니다. 그는 라오디게아의 주교였고, 니케야 회의에서 정통파에 섰지만(반 아리우스주의), 다음 단계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인성을 부인하게 되어 이단으로 정죄받았습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을 믿습니다. 한 하나님의 삼위는 모든 사역에서 동역하십니다. 그래서 창조 사역을 아버지께로 한정하여 이해하는 것은 주의해야 합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사역이기 때문에,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동역하셨습니다(WCF 4장).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창조주 하나님”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창조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을 제시하지 않았습니다.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작성할 때에 주안점은 아버지와 아들의 동일실체(homoousion)과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제시하는 것에 집중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성령도 하나님이시기 때문에(시 139:7-8, 고전 2:10-11, 엡 4:30, 롬 8:26-27, 요 14:16, 15:26), 창조가 하나님의 사역이라면 성령께서 창조에 동역하신 것입니다(창 1:2). 창조에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사역하십니다. 창조에서 창조 작정은 아버지께서, 창조 실행은 아들께서, 창조 이룸은 성령께서 하시는 구도로 이해합니다. 구속에서도 구속 작정은 아버지께서, 구속 실행은 아들께서, 구속 이룸은 성령께서 하시는 구도로 동일하게 이해합니다. 한 하나님, 아버지, 아들, 성령은 영원히 영광받기에 합당하십니다. 할렐루야.

우리말에서 “창조(創造)”는 단순하게 “만들다”는 뜻이 아니라,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단순하게 “만들다”는 어휘는 “제작(製作)”, “제조(製造)”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create와 made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경에서는 “창조”와 “만드셨다”로 구분하고(중국어 創造와 造)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신경의 ποιητήν(ποιέω)를 라틴어 factorem 영어 maker로 번역하였습니다. factorem의 2차 의미에는 author, creator, causa, constructor, architectus, compositor, conditor, inventor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ἀρχηγὸν(히 12:2)은 founder, author, prince 등의 의미입니다. author는 저자(著者)로 번역하지만, 신학적 의미는 “창조주”의 의미가 있습니다. maker(factorem)은 “~자” 명사입니다. factorem(창조주)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입니다.

기독교 창조주 신앙은 “무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신경은 아버지에 전능을 붙였지만, 창조주에 전능이 부착됩니다. 그래서 한글 번역자들은 그렇게 번역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와 “:”를 고려해서, “우리는 한 하나님을 믿는데,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주입니다”라고 번역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주 예수께서 “바다를 말씀으로 잔잔케하심”으로 창조주의 능력을 보여주셨고,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말씀하심으로 창조주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직접 예수께서 로고스(LOGOS)로 창조하신 창조주로 제시하였습니다. 성령께서 창조하심에 대한 명시적인 말씀은 찾기 어렵지만(욥 33:4, 시 33:6), 성령을 하나님으로 고백하기 때문에 창조에서 역할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무에서 창조하셨고, 창조하신 만물을 섭리(攝理)하십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기독교는 창조주 하나님을 믿음으로 창조를 이해하며 연구합니다. 그것은 이신론(理神論, deism)이 발발한 초기에는 그 기조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신론에 근거한 계몽철학은 이성제일주의(理性第一主義, rational principle)로 전개하면서 창조주를 이성의 소유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의 『종의 기원』(On the Origin of Species, 1859년)이 등장하면서 창조주를 거부할 합리적인 체계를 형성하였습니다. 진화론은 급속하게 확산되면서, 창조가 아닌 우연에서 세계의 시작이 구도화되었습니다. 1930년대 미국의 프린스턴 신학교에서도 진화론을 합당한 과학 가치로 수용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시대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부정하는 체계가 공교육까지 점유하고 있습니다. 2차 대전 이전까지 세계지성은 인간 이성의 위해(危害)를 잘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2차 대전이 지나면서 인간이 인간을 멸절시키고 지구를 파괴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 충격을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이성제일주의는 포기하지 않고, 이성의 힘으로 안전방책을 마련하기에 급급합니다. 2019년에 발생한 COVID19 Virus는 자체생명력도 없는 바이러스(RNA 바이러스)에 무너지는 인간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께 의존하거나 의뢰하지 않습니다. COVID19 이후로 기독교 교회는 급락할 것을 예견하기도 합니다. 창조주 믿음이 있다면, 창조주 하나님께 창조 세계 회복을 기도하며, 위탁명령을 받은 인간은 최선을 다해서 정진해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입니다(factorem coeli et terrae, visibilium omnium et invisibilium).

창세기 1장 1절에서 “하늘”은 복수형입니다. 서철원 박사는 창세기 1:1을 첫날로 보면서, 천사들도 그 때 창조되었다고 주석하였습니다(서철원, 창세기 주석 1권). 하늘, 보이지 않는 것에는 미세한 생물이나 원자 세계를 의미하는 것보다 영적 세계를 말할 것입니다. 미세한 생물은 과학 장비를 동원하면 볼 수 있지만, 영적 실체는 어떤 광학, 전자 장비로 볼 수 없습니다. 가끔 기계 장비로 이상한 모양이 잡힐 때에 영적 실체인가?라고 생각하지만, 기계 장비에 포착될 영적 실체는 없습니다. 영적 실체는 육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육안으로 보이는 것은 영적 실체가 아닙니다. 그래서 귀신(영적 실체)를 잡기 위해서 보이는 사람에게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은 많은 주의가 필요합니다. 보이는 어떤 양태로 귀신으로 단정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게놈 지도(Genome map)를 완성하며 양자역학(量子力學, quantum mechanics)으로 상상할 수 없는 지식 체계를 이루고 있지만, 미신과 허망한 생각은 더욱 증가하고 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것과 모이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습니다.

고대 교회에서 “창조주 고백”은 매우 간략합니다. 그럼에도 창조주 고백이 있는 것은 사도신조와 믿음의 규칙(Regula fidei)에 연속인 것으로 볼 수 있겠습니다. 사도신조에서는 Creatorem caeli et terrae(creator of heaven and earth)으로 제시했고, τὸν πεποιηκότα τὸν οὐρανὸν, καὶ τὴν γῆν, καὶ τὰς θαλάσσας, καὶ πάντα τὰ ἐν αὐτοῖς, πίστιν(Regula fidei, who made the heaven and the earth and the seas and all the things that are in them)로 고백하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창조 고백”은 필연적입니다. 그것은 현재 있음의 기원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이며, 시간의 마지막이 동일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계 1:8).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시작과 끝이라. 주, 곧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앞으로 오실 전능하신 분이 말하노라

현재 모든 있음의 원인이 창조주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causa prima). 창조주 하나님 고백은 매우 중요합니다. 제2원인(causa secunda)은 절대로 제일원인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범죄 이전에도 그랬는데, 아담의 반역 이후로 창조주 하나님을 바르게 믿고 아는 것은 구속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신학은 창조주 하나님에서 시작합니다.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믿음의 교부들이 작성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주기도문도 “하늘에 계신~”보다 주 예수께서 주신 기도문이라는 것은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신학적 사고를 한다면 반드시 자신이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시대에는 예수를 알아서 닮으려고 공부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믿어 섬김으로 닮아가며, 자기를 부정하며, 장성한 분량으로 양육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함께 자기 존재에 대한 긍정적으로 인정하며, 모든 것의 존재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인정하게 됩니다. 주의 백성은 모든 상황을 존재케 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하심을 믿습니다. 창조주 신앙은 창조 세계의 기원을 믿는 것에서 현재 상황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며, 마지막까지 변하지 않게 경영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Immutability of God). 바빙크는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독특성으로 분류하였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창조는 자존하신 하나님(aseitas)께서 이루신 것입니다(Independence, self-existence). 창조는 비필연적 세계(unnecessary-ness)라고 합니다. 창조 세계 안에서는 우연과 필연(contingency and necessity)으로 진행됩니다. 창조주께서 이루신 창조에서만 비필연적으로 일어났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불변합니다(Immutability, Unchangableness). 창조주 하나님도 변하지 않고, 창조를 잃어버리시도 않으며, 창조를 유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창조를 유지하시는 것이 개혁신학의 중요한 이해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무한하십니다(infinite). 무한하신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Eternity).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영원에서 말씀하심으로 창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종료되며 영원에서 창조가 공존하는 독특한 공간이 이루짐을 기독교가 이해하는 창조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시간과 공간에서 편재(偏在性, Omnipresence)하여 계십니다. 하나님의 편재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창조를 경영하시며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입니다. 주의 형상인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범사에 감사합니다. 이슬람교는 하루에 5번 메카를 향해서 기도합니다(라카-Rakat). 불교는 108배, 1000배, 3000배를 합니다. 기독교는 쉬지 않고 기도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은 독특합니다(Unity).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는 하나님만의 일입니다(unique). 하나님의 독특성은 단일합니다(unitas singularitatis). 하나님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볼 수 있지만, 하나님의 존재를 파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하나님의 성육신에서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성육신하신 하나님, 예수가 기독교에서 핵심이 됩니다. 톰 라이트가 말한 단일 계획(single plan of God)과 같지 않습니다. 라이트는 자기가 규정한 언약 개념(아브라함의 언약으로 세계를 이룸)으로 단순화시켰지만, 정통신학에서 단일성은 하나님의 존재자체와 사역의 신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독특성은 단순합니다(unitas simplicitatis). 단순성(Simplicity)의 반대는 복잡성(Complexity)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단순하지만, 인간이 볼 때에는 도저히 풀 수 없는 깊음이 있습니다(고전 1:18-25). 하나님의 창조는 하나님의 단순한 계획에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단순을 수행하는 인간은 겸손하고 온유하게 진행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단순하게 대답하지만, 단순하게 판단하지 않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광범위한 방대합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부르실 때에 창조의 한 부분에서 일하도록 부르셨습니다. 그 분야에서 자기 일을 수행함으로 창조의 백성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복음에서는 영혼의 양식을 창조에서는 육신의 양식을 공급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창조의 한 모퉁이에서 하나님의 오묘한 지식 체계를 탐구하며 즐거워하며 육신의 양식을 공급받습니다.

현재 있음의 근원의 모든 기원은 하나님이십니다. 이 문장이 너무나 두렵고 떨리지만, 고백을 피할 수 없습니다. 고백하고 뒤로 빠질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책임지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나약한 인간에게 세상의 무거운 짐을 부과하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 예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멍에를 주님과 함께 지고 갑니다(마 11:28-29). 그래서 창조에 대한 책임의 무거운 멍에를 가볍게 메고 나갑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 있는 부조리를 해결할 수 없는 우리의 무지와 무능, 무지와 무능에서 결코 핑계하지 않고 책임을 지며 나가야 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의 백성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분야까지 탐구합니다. 탐구에서 획득된 지식으로 하나님을 보다 더 알아가며, 가까이 가며, 영광을 고백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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