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눅 23:1-12] 빌라도와 헤롯이 친구가 됨(마 27:1-2, 11-14; 막 15:1-5; 요 18:28-38). 무리는 빌라도에게 예수를 끌고 가서 세금을 거부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이라고 공언했다고 반역죄로 고소했다(1-2절). 대제사장은 예수를 신성모독죄로 규정했는데(눅 22:66-71), 고발한 내용은 로마 반역죄였다. 유대인은 예수를 “자칭 왕”이라는 죄목으로 빌라도에게 고발했다. “자칭 왕”이란 항목은 고발할 부분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빌라도는 “자칭 왕”이 아니라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요 19:21-22절) 십자가형을 언도했다(눅 23:38).

빌라도는 예수께 “유대인의 왕인가?”라고 질문했고, 예수는 “네 말이 옳다(You have said so)”고 대답하셨다(3절). 우리말에는 긍정으로 번역했지만, 빌라도 “너의 말이다”라고 이해할 수 있다(참고 요 18:28-38). 빌라도는 죄없음을 선언했다(4절). 누가는 매우 간략하게 이 부분을 전개했다. 그것은 헤롯과 조우(遭遇)를 제시하기 위함일 것이다(눅 23:8-12). 빌라도는 예수가 헤롯 지경의 사람인 것을 알고 예루살렘에 온 헤롯을 불러 심문하도록 했다(7-8절). 헤롯은 예수 보기를 구경거리로 생각해서 매우 기뻐했다(8절). 그런데 예수는 헤롯이 묻은 여러 심문에 어떤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9절). 결국 헤롯은 빌라도에게 다시 보냈다. 누가는 빌라도와 헤롯이 원수에서 그날은 친구가 되었다고 보고했다(12절). 빌라도와 헤롯은 친구가 되기 힘든 위치였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날에 빌라도, 헤롯, 대제사장, 사두개인, 바리새인, 헤롯당, 서기관, 무리들이 모두 친구가 되었다. 예수께서 죽으심은 가룟 유다의 배반과 함께 원수였던 빌라도와 헤롯 그리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 열심당, 헤롯당까지 친구가 되어야 한다.

2. [눅 23:13-25] 빌라도의 판결. 사도신경에서 고백하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심” 대해서 어떤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 대체로 “빌라도 치하에서”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받으심”은 정확한 내용이다. 고대 교회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우리만큼 알지 못했을까? 왜 교회는 본디오 빌라도를 고백하는 내용에 포함시켰을까? 그것은 예수께서 로마 제국에 의해서 죽임 당함을 알려주며, 결정한 사람의 책임을 알게 하는 것이다. 피해 의식이 아니라 제국의 위정자일지라도 하나님을 반역할 위치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제국 안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두려움 없이 믿음의 정진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본디오 빌라도는 로마 제국의 총독이었다. 로마 군인들은 군병들도 자부심을 가질 정도로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 총독이라면 어떠할까? 그런데 그 총독이 민중들의 소동에 심장이 떨렸다. 그리고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꼼수를 부렸다. 그런데 오히려 악독한 죄인 바라바를 해방시키고 죄없는 죄인 예수를 십자가 형(刑)을 언도했다. 빌라도의 법정은 가장 명예로운 로마 법정에서, 가장 어리석음과 나약하고 악한 판결이었다. 그 빌라도의 판결이 우리의 죄를 사하는 계기가 되었다(O felix culpa). 하나님의 경륜의 신비는 가장 악랄한 인간에게서 가장 심오한 하나님의 경륜이 운행되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제국의 총독이 식민지 주민들에게 비굴함과 대조적으로 낮고 천한 그리스도인은 천지의 대주재의 자녀로서 담대하게 철권통치의 왕 앞에서 주 예수를 고백할 수 있다.

무리들과 본디오 빌라도는 반역자를 풀어주고 무죄한 예수를 죽임에 일치했다. 반역자를 죽여야 한다는 일치된 마음에서, 반역자를 풀어주었다. 그리고 무리의 함성을 따라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 놓았다. 군인은 국민을 보호하는데 자기 생명을 바치겠다고 맹세한 인격이다. 최소한 제국의 명예, 황제의 명예를 위해서 충성을 다해야 한다. 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위정자는 존재 이유가 없다.

3. [눅 23:26-56] 골고다 길,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 장사되심. 사도신경에서 죽으심 음부강하(descendit ad inferna)가 있는데, 복음서에서는 무덤에 안치됨까지만(53절) 진술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서에서는 무덤에 안치된 뒤에 부패 과정이 없음을 고백했다(WCF 8:4). 로마 카톨릭주의는 음부강하를 주장하고 있는데, 사도신경에 그 흔적이 있다. 우리나라 사도신경에는 음부강하가 없는데, 음부강하를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필자는 그 주장을 하려면 콘스탄티노플 신경을 고백하는 것이 더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빌라도는 피동적으로 십자가 형을 언도하고 집행시켰다(25절). 빌라도의 법정에서 골고다 언덕까지의 길은 지금은 비아돌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로 순례코스가 되어 있다. 순례를 통한 영적 유익을 기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에 예수 수난을 기념하는 교회당들이 있다. 아르메니아 정교회(오리엔탈 정교회) 등 여러 종파들이 골고다 지역을 점유하고 있다. 무덤교회(聖墓敎會: Church of the Holy Sepulchre)는 중요한 부분들은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로마 가톨릭 교회가 차지하고 있으며, 콥트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는 덜 중요한 부분들을 맡았다. 주의 십자가도의 도(道)는 ‘길’에 있지 않고 ‘성령’에 있다.

예수는 고난의 길을 갈 수 없을 정도로 피폐된 상태였다. 그래서 길 가에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강제 징발되어 십자가를 대신 지고 올라갔다(26절). 시몬은 가장 황당하고 억울한 사람이었지만 가장 복된 사람이었다(막 15:21).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진 십자가는 인류에서 가장 위대한 사건 옆의 최종 목격자로서 법적 증인이 되었다.

여자의 큰 무리가 예수의 뒤를 따랐기 때문에 예수를 페미니즘(feminism)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다. 예수의 사도에는 여성이 없다. 여성이 있고 없음이 차별이 아니다. 평등이라면 남녀 6:6으로 구성해야 한다. 페미니즘 시대, 여성은 자기 권익을 위해서 호주제 폐지, 간통죄 폐지, 낙태죄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여성이 자구적으로 보호 체계를 갖출 것이 아니라, 상호 사랑과 존중으로 보호를 받는 것이 인격적이다. 여성 스스로 보호하는 것보다 가족을 이루어 함께하며 인내와 신뢰를 이루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다. 페미니즘 시대에 남성과 여성의 평등이 아니라, 다수의 성지향성을 인정해야 할 형편이다. 그래서 Gender 화장실로 세 구분이 되는데, 그것을 평등이라고 인정하는 성수자가 있는데 이해하기 어렵다. LGBTQ... 등은 각 성별은 개별 지향성으로 생각해야 하는데, 성수자라는 커다란 카데고리에서 연맹을 맺고 있다. 성소수자가 자기 보호를 위해서 연맹하는 것은 결국 자기 보호를 위해서 권력자(결집된 힘)가 되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는 것이다. 예수를 페미니스트나 중립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다. 예수,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신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께서는 울며 따르는 여인들에게 마지막 날의 위험을 말씀하셨다. 사형 집행은 죄인 두 사람도 함께 집행되었다(39절). 어쩌면 두 사람은 좀 더 생존할 죄수였을지도 모른다. 그 중 한 사람은 뜻밖에 예수 옆에서 낙원을 허락받았다(43절). 두 사람은 처음에는 예수를 모욕했지만, 한 사람은 예수께 기억을 요구했다(Jesus, remember me when you come into your kingdom. 42절). 예수께서 죄인에 대해서 무엇을 기억해야 할까? 십자가 옆에 있는 죄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을 믿은 것이다(39절).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것은 조롱할 것이 아니라 믿어야 할 것이다(40절). 한 죄인은 예수께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고 조롱했다(39절). 예수는 자신을 구원하러 오신 구주가 아니다.

우리시대에 예수를 예수로 보는 부류가 많으며, 타종교에도 그리스도가 있다고 주장한다(종교다원주의). 오히려 예수는 그리스도로 보지 않고 선지자로 주장한다. 우리는 믿음과 행위 문제에서 이 부분에서 많은 혼란을 갖는다. 행위로 구원 얻을 수 없는 사람이 선포한 복음을 믿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 또한 행위로 우리를 구원하시지 않는다. 흘리신 피의 사함으로 우리 죄를 구속하셨다. 그래서 자신이 아닌 우리를 구원하셨다. 우리 사역자는 우리를 구원하시길 바라며, 너희의 구원을 추구하지만, 복음을 듣고 구주 예수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 부족한 행위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 선포된 복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예수에 대해서 무지(無知)하여 불신하고, 조롱하는 시대이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며, 은혜를 구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자는 구원을 받는다(롬 10:13, 골 3:17). 그렇기에 십자가의 도를 힘써 전해야 한다. 십자가에서 한 강도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또 사울이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 누구도 구원받지 않음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육시에 해가 빛을 잃고 구시까지 계속되었다(44절). 성소의 휘장 한 가운데가 찢어졌다(45절). 예수께서 큰 소리로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 뒤에 숨지셨다(46절). 백부장이 이 모습을 보면서 예수를 의인으로 선언했다(Certainly this man was innocent!, 47절). ESV, NASB는 innocent로 다른 번역에서는(KJV, NIV) a righteous man으로 번역했다. 구경하던 사람들도 가슴을 치며 돌아갔다(48절). 예수를 아는 자들과 갈릴리로부터 온 여자들은 멀리 서서 장면을 보고 있었다(49절).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은 가슴을 칠일에 있었고, 제자들은 숨어 있었다.

공회 회원인 선하고 의로운(a good and righteous man)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시체를 요구했다. 누가가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심문 과정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사본이 있다.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있었다(51절). 그가 빌라도에게 나가 예수의 시체를 요구한 것은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 실현을 포기한 것이다. 요셉은 빌라도의 허락을 받아 세마포에 싸고 장사한 적이 없는 바위에 판 무덤에 예수를 장사했다(53절). 그날은 안식일의 준비일이었다. 갈릴리 여자들이 무덤과 시체를 보고 돌아가 향품과 유향을 준비했다(55-56절). 그리고 계명을 따라 안식일을 준수했다. 그 안식일은 무교절에 있었고 예수는 죽음의 담을 넘으셨다. 무교절 기간 안식일 다음날은 초실절인데, 그날에 부활하셨다.

4. 전능하신 하나님, 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죽음에서 구원하고 생명을 주시기에 합당하시나이다. 주께서 죽으신 십자가를 볼 때 마다 나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부정하나이다. 주의 길을 가게하옵시고, 울며 좌절하지 않고 입을 주의 이름을 증거하게 하옵소서. 죽음 앞에 담담하게 주를 증거하며 주와 함께하게 하소서. 나의 생명을 다해 주의 복음을 전하겠나이다. 능력과 지혜와 정결을 주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date. 2nd. 2020.04.29. 형람서원 고경태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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