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Apostles) 그리고 속사도(續使徒, Apostolic Fathers)에서 교부들(Fathers of the Church)로 이어집니다. 속사도 시대는 17세기 교황주의(Catholicism)에서 개혁파로 회심한 프랑스의 장 코텔리에르(Jean B. Cotelier, 1629-1686)가 1672년 사도들과 동시대를 산 교부들의 작품집을 집필하면서 정립하였다고 합니다. 교회사를 속사도 시대(Post-Apostolic Age), 니케야 전 시대(Ante-Nicene Age, -325), 니케아 후 시대(Post-Nicene Age, 325-4511)로 구분하여 이해합니다. 이것은 미국에서 19세기에 편집한 ANCL(Ante-Nicene Christian Library, 10 Vol)에 근거한 분류입니다. Philip Schaff(1819-1893, 루터파)가 편집자로 참여했는데, 저는 Philip Schaff는 교회사에서 이해에 혼선을 준 학자라고 평가합니다. 한 예는 기독교 4대 문서를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Nicaeno-Constantinopolitan Creed), 칼케돈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로 이해하도록 한 것입니다. 단순 제시이겠지만 한국 교회에서 기독교 4 대문서라고 이해하고 있는데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사도신조와 아타나시우스 신경은 공교회에서 합법적으로 결의된 문서가 아닙니다. 아타나시우스 신경(Quicumque vult, Pseudo-Athanasian Creed)은 저자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문서입니다. 이것은 고대교회 역사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을 제시하는 한 단초(斷礎)이기도 합니다.

분명한 것은 예수께 12제자가 있었다는 것과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한 사울이 사도 바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의 제자들 중에서 교회사에 등장하는 인물은 사도 요한뿐인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는 성경에 등장하지 않으며, 사도 베드로의 제자 마가, 사도 바울의 제자 디모데, 디도, 누가 등이 등장합니다. 베드로와 바울의 제자들은(복음전도자) 성경 저자이어서, 성령의 감동으로 계시 문서를 남긴 분들입니다. 사도 요한의 제자들로 등장한 제자들, 가이오, 데메드리오도 교회사에서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교회사는 성경계시가 종료된 뒤로 이어집니다. 필립 샤프가 계시 시대(1권)와 교회사 시대를 구분 없이 교회사를 엮은 것도 난점입니다. 1권의 제목이 “Apostolic Christianity A. D. 1–100(사도적 교회)”인데,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까지 포함시킨 것은 바람직한 모습이 아닙니다. “사도와 사도적(Apostles vs Apostolic)”은 전혀 다릅니다.

교회사에서 등장한 사도 요한의 제자는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 -108)와 폴리갑입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어린 시절에 예수께서 어린아이로 지목한 그 아이라는(마 18:3) 전설이 있기도 합니다. 이그나티우스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제자로 70년부터 107년까지 37년 동안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감독으로 있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나바가 파송되어 사울과 협력한 교회이며(행 11장), 사도 베드로도 사역한 교회입니다. 안디옥 지금 터키 안타키야(Antakya)라는 작은 지방도시이지만, 1세기에는 시리아의 수도였고, 고대 교회에서 알렉산드리아와 견줄 수 있는 대도시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A.D 108년경 트라얀(Trajan, 98–117) 황제 때에 로마로 압송되어 원형 극장에서 순교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로 가는 길에 서머나를 경유할 때에 폴리갑을 만났다고 전해집니다(이그나티우스의 일곱편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교회 중의 하나인 서머나(Smyrna) 교회를 105년경에 사도 요한의 제자였던 폴리갑(Policarp, AD. 80-165)이 사역하였습니다. 터툴리안은 사도 요한이 폴리갑을 서머나 감독으로 세웠다고 이야기합니다.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이 친구라고도 하는데, 나이 차이가 약 50년 정도입니다. 고대 교회사 연표에서 연도가 정확하지 않은 것을 잘 감안해야 합니다. 폴리갑이 순교할 때 나이가 86세로 해서 출생과 소천을 정리할 것입니다. 폴리갑과 사도 요한의 직접 관계도 다수의 증언들이 있습니다. 서머나 지역이 당시에 큰 도시였고 안정적인 교회를 이루었다고 평가하는데(서머나 교회에서 이그나티우스와 교제를 이룬 주교, 장로, 집사가 있었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에서 서머나 교회는 환난과 궁핍한 상황으로 보고하고 있습니다(계 2:8-11). 지금 서머나(이즈밀)에 있는 폴리갑 기념 교회 건물은 로마 카톨릭이 1625년에 세웠는데, 지진과 화재로 훼손되었고, 1929년에 재건축된 것입니다.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의 신학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들에게 주어진 명예는 순교입니다. 순교보다 더 큰 신학이 없을 것입니다. 순교자의 믿음 고백으로 믿음이 유지되었습니다. 이그나티우스의 죄목은 알려지지 않지만 모진 고문을 당한 뒤에 짐승에게 찢겨서 순교하셨고, 폴리갑의 죄목은 “무신론자”였고 화형되어 순교하였습니다. 이그나티우스는 트라얀 황제 때에, 폴리갑은 『명상록』의 저자로 유명한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161-180)에 의해서 순교하였습니다.

<참고> 존 폭스, 『기독교 순교사화』, 양은순 역(서울: 생명의말씀사, 2005).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과 유사한 시대에 변증가 저스틴(Justin Martyr, 100-165, 유스티누스)이 있었습니다. 저스틴이 박해 받을 때에 프랑스 리용에서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저스틴은 폴리갑과 비슷한 시기에 순교하였습니다. 저스틴의 죄명을 알려지지 않았지만, “금지된 종교인 기독교를 신봉한 혐의”, 즉 그리스도인이라고 자기를 밝혔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스틴도 아우렐리우스에 의해서 순교하였습니다. 저스틴은 사마리아에서 태어났지만 30세 정도에 어떤 계기로 예수를 믿어 로마의 지성인과 정치가를 향해서 변증을 펼쳤기 때문에 변증가(Christian apologist)라는 별칭을 받았습니다. 로마는 저스틴을 악랄하게 고문과 처형했으며, 시신도 장례하지 못하도록 파수꾼을 세웠습니다. 저스틴의 앞에 “순교자”라고 명명한 것은 로마 시민들이라고 합니다.

리용의 주교였던 이레니우스(Irenaeus)도 A.D 202년에 목메임으로 순교하였습니다. 이레니우스는 서머나 출신이었기 때문에 폴리갑에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리용도 박해가 심한 지역 중 한 곳이었습니다. 리용의 주교 포티누스가 순교하자(178년), 후임으로 이레니우스가 들어가서 사역했고 순교하였습니다. 포티누스는 몬타누스주의에 효과적인 사역을 위해서 이레니우스를 적절하게 여긴 것입니다. 몬타누스주의는 열광적이고 근본적인 성향을 기본으로 독신, 재혼 금지하는 금욕적이었고, 금식, 순교강조, 깊은 회개등을 강조하였습니다. 몬타누스주의는 터툴리안(Tertulian, 155-220)이 가입할 정도록 강력하고 매혹적인 이단 집단입니다. 라은성 박사는 210-222년 경에 몬타니우스주의로 전향했을 것으로 추정하였습니다.

저스틴과 이레니우스는 순교자이지만 많은 저술을 남긴 사역자입니다. 저스틴과 이레니우스의 작품은 영어로 번역되어 공개되어 있습니다(www.ccel.org/https: //www.newadvent.org/).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