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최원영목사]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심이란 무엇인가?

  • 입력 2020.05.08 10:35
  • 수정 2020.05.08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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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없는자가 먼저 돌로 치라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춘천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등,  저서로서는 주기도문, 충성된일꾼되어가기, 십계명 등이 있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담임, 본헤럴드대표, 서울신학대학교신학박사, 춘천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 등, 저서로서는 주기도문, 충성된일꾼되어가기, 십계명 등이 있다.

코로나 이후 상실한 우리들의 마음을 달래줄 충분한 먹잇감이 등장했다. 허기진 맹수처럼 달려들어 발기발기 찢어 부서뜨리고 있다. ‘빛과 진리교회이야기이다. 기자들이 교회를 가십거리로 삼기에는 가장 좋은 사건이다.

교회는 거룩이란 성역으로 지금까지 공격하기에는 부담스러운 존재였는데, 그 성역을 무너뜨리고 흠집내는 것처럼 사회적 공분을 일으키는 아주 좋은 재료는 없다.

이성적인 진실의 규명은 지금은 거의 불가능하다. 온갖 똥 오줌 세례를 다 받은 후 처참하게 무너진 다음에 진실과 거짓의 차이가 들어날 것이다.

빛과 진리교회는 청년 사역으로 교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교회이다. 제자훈련과정에서 참가자들에게 인분을 먹이는 등 가학 행위를 일삼았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사회적 공분을 사고 있다. 빛과 진리교회의 담임목사의 양심의 소리가 사실인지? 아니면 교회 훈련과정에 가학 행위를 당한 분들의 양심의 소리가 사실인지? 본인들은 잘 알고 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

 

요한복음 6장에 한 여자가 음행하다가 현행범으로 잡혀 끌려왔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여자를 돌로 치라고 했는데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의 고견을 들으려고 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을 고발할 건수를 만들기 위해 예수님앞에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끌고 온 것이다.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예수님을 올무에 빠뜨리기 위한 계략인 것이다.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돌로쳐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려고 이 땅에 오신 분이다.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용서하고 사랑으로 품은 분이다. 모든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었다.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 여자를 죽음에 내 던지는 것이고,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지지 못하는 경우가 된다. 자신이 지금까지 해 왔던 모든 말과 행동들을 다 무너뜨리게 된다. 여자를 죽이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고, 그러면 종교지도자들에게 고소할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이 시험을 풀어가는 예수님의 방식을 함께 배우면 좋겠다.

예수님이 몸을 굽히고 손가락으로 땅에 글자를 썼다(6). 그리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7). 어떤 글자를 썼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모두 다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여자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9).

, 죽이려고 돌을 들고 서 있던 사람들이 다 떠났을까? 자신의 율법적 논리로 가득차 있던 그들이 생과 사의 죽음의 현장을 떠난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율법의 문제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양심에 호소한 것이다.

변화산기도원(춘천)
변화산기도원(춘천)

 

"양심이란 무엇인가?"

 

(1)양심[良心, conscience]헬라어로 쉬네이데시스이다. ‘’(함께)에이도’(알다)의 합성어이다. 양심이란 헬라어로 같은 생각’, ‘공통의 깨달음이란 의미이다. 민족, 언어, 신분, 성별에 관계없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나 생각, 혹은 만인이 다같이 옳다고 느끼는 생각이 바로 양심이다.

(2)영어로 conscience(양심)는 라틴어 conscientia(은밀한 앎)에서 나온 말이다. 양심은 은유적으로 voice within(내 안의 목소리)이다. 양심을 inner light(내부의 빛)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죄책감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은밀한 앎'이 아닐까?

예수님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돌에 맞아 죽을 운명인 여인을 죽음에서 건져 올린 것은 사람들의 양심에 호소한 것이다. 양심이란 내안에 있는 목소리이다. 양심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올바른 내면의 생각이다. 양심은 내안에 있는 선한 빛이다. 주님은 사람들의 마음에 있는 빛인 양심에 호소한 것이다. 돌을 들고 죽이려고 있던 사람들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돌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예수님은 여자여 너를 고발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10)라고 물었다. “주여 없나이다예수님이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1)고 했다.

예수님은 여인을 정죄하지 않았다. 비판하지도 않았다. 훈계하지도 않았다. 나무라지도 않았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주님이 여인에게 한 것은 여인의 양심을 일깨워주었다.

혼을 내고, 겁박을 하고, 모욕을 준다고 해서 화인 맞은 양심이 회복될까? 양심은 그렇게 회복되지 않는다. 양심이 부끄러우면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양심은 내 안에 있는 선한 목소리이다. 예수님은 여인의 마음에 잠자고 있던 목소리를 깨운 것이다.

변화산기도원(춘천) 숙소앞 정원석 사이에 피어 있는 아름다운 꽃....
변화산기도원(춘천) 숙소앞 정원

"당신의 양심에 진정성이 있는가?"

돌을 들고 간음한 여인을 죽이려고 있던 사람들은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들의 양심에 최소한의 진정성이 있었다.

예수님께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실 때, 반복하는 단어가 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네게 이르노니”(truly truly I say to you).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에 진정성이 있는가? 이것이 오늘 한국교회를 깨우는 바로미터가 되리라 본다. 양심에 화인 맞은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면 그가 속한 공동체는 희망의 싹은 사라질 것이다.

 

"가인의 죽어버린 양심"- 내가 동생을 지키는자입니까?

하나님이 동생을 죽인 가인을 불렀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9). 가인의 대답이 옳지 않다는 것은 우리 모두 안다. 가인의 대답이 아주 잘못되었다는 것을 안다. 가인의 문제는 무엇인가? 양심도 마비되었고, 양심에 진정성도 없다. 양심은 내면의 빛이다. 내면의 빛이 어둠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다.

양심에 진정성이 없다면, 모든 공동체는 무기력해진다.

 

 "양심을 지킨 요셉"

구약성경에 요셉은 진정성 있는 신앙생활을 삶에서 구현했다. 요셉은 양심을 지켰다.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 앞에서 요셉은 양심을 지켰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39:9).

신앙생활을 하면서 양심을 지킨다는 것은 축복이다. 우리가 진실로 행복했던 시절을 돌아보면 금방 그 이유를 깨닫는 것이 어렵지 않다. 언제 우리가 행복했는가? 양심이 회복되었을 때이다. 양심이 죽으면 사람이 추해진다. 그러나 양심이 깨끗하면 사람이 맑고 행복해보인다.

 

"삭개오, 양심에 진정성 회복"

삭개오는 세리장이다. 키가 작다. 부자이다. 세리는 당시 민족의 반역자이다.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걷어 로마에게 받치는 일을 했다. 세리는 친구가 없다. 유대인으로서 투표권도 없다.

삭개오는 돈도 많고 직업도 있지만 지독하게 외로운 사람이다. 예수님이 여리고에 오신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 다 큰 성인이 뽕나무에 올라갔다. 예수님이 뽕나무 아래에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며,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오늘 네 집에 유숙하겠다고 했다.

이 한마디에 삭개오는 양심이 회복되었고 양심에 진정성이 회복되었다. “주여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에게 주겠습니다.” “만일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네 배로 갚겠습니다.”

율법에는 두배로 배상하면 된다. 그런데 삭개오는 네 배로 갚겠다고 했다.

삭개오에게 무엇이 살아난것인가? 바로 진정성있는 양심이 살아난 것이다. 삭개오의 이름의 뜻이 무엇인가? 순결하다”, “깨끗하다는 의미이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회복한 것이다. 지금까지는 민족의 반역자로 죄인의 대명사로 손가락질 받으며 살았지만, 예수님의 인정으로 인해, 그의 마음의 양심이 회복되었다. 그리고 진정성있는 결단을 하였다. 가난한 자에게 자신의 재산을 50% 기부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속여 빼앗은 것이 있다면 4배로 갚겠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회복해야할 영성이 있다면 바로 진정성있는 양심을 회복하는 것이다. 고난의 계절에 진짜로 행복하게 살고 싶은가? 처방전은 아주 간단하다. 내 양심에 진정성이 있어야 한다.

미국 정치가이자 발명가인 벤저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이러한 말을 남겼다. Keep conscience clear, then never fear(떳떳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 두려워할 일이 없다).

양심에 진정성이 없다면, 모든 공동체는 무기력해진다. 교회를 교회되게 하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가는 힘, 공동체를 신뢰와 따스함으로 만들어가는 고리가 무엇인가? 양심에 진정성이 있을 때 행복이란 따스한 기쁨을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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