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 3:1-10] 성전 미문 앞 걸인을 일으켜 세웠다. 사도 베드로와 요한은 9시(오후 3시) 기도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1절).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았다. 성전 미문(the Beautiful Gate)에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시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구걸하는 사람을 두었다(2절). 그는 기도하러 들어가는 베드로와 요한 사도에게 구걸했다(3절).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약간의 돈을 바라는 못 걷는 사람에게 은과 금이 아닌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음을 선물했다( In the name of Jesus Christ of Nazareth, rise up and walk!, 6절). 당사자뿐만 아니라 기도하러 가던 모든 사람들도 놀랐다. 그 사람은 성전으로 걸어서 뛰면서 들어가서 하나님을 찬송했다(7절). 걷지 못하는 사람은 뛰며 하나님을 찬양했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놀랐다(And they were filled with wonder and amazement at what had happened to him, 8-10절).

2. [행 3:11-26] 솔로몬 행각에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 나은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고, 모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곳이 솔로몬 행각(Solomon's Colonnade)이었다(11절). 베드로와 요한이 걷지 못하는 걸인을 일으켜 세운 기적을 도구로 복음을 전도하는 방식은 계시기간이 임시시대(Extraordinary Era)에 가능한 것이고, 일반시대(Ordinary Era)에는 기적을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적당하지 않다. 사도들은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기적과 표적을 사용하여 교회를 세우지만, 사도들을 계승한 교회는 사도들이 확립한 복음을 근거해서 전도해야 한다. 천주교(로마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이 아닌 사도의 직분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 개혁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계승하여 사도적 교회(The Apostolic Church)를 이룬다. 18세기부터 발생한 신비주의는 기적과 표적으로 사도적 교회를 제시한다. 사도는 예수께 받은 직분, 기적과 표적으로 복음을 전했다. 그러나 사도를 따르는 교회는 사도가 전한 복음으로 복음을 전한다. 복음의 영광은 어떤 직분이나 능력으로 대체하거나 비교할 수 없다(요 1:1-4).

솔로몬의 행각은 성전 바깥뜰 동편의 벽을 따라 지붕과 기둥 만 있는 구조물로, 이방인들의 출입이 허용된 지역이다. 행각(行閣, Colonnade)은 쉽지 않은 어휘인데, 궁궐에서 볼 수 있는 회랑(回廊) 혹은 주랑(柱廊), 열주(列柱) 등으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 베드로의 첫 일성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였다. 예수를 주목하도록 지시했다(13절). 그리고 예수를 거부한 것에 대한 지적과 예수의 이름의 능력을 증언했다(13-16절). 그리고 부지 중 행한 것으로 회개를 촉구했다(19절). 세례 요한이 촉구한 회개와 다른 회개이다. 사도 베드로가 촉구하는 회개에 순종하지 않으면 더 이상 기회가 없다. 예수의 구속 사역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베드로의 두 편(행 2장과 3장)의 설교는 복음의 대략이 있다.

먼저 사도 베드로는 현상에 놀라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권능이나 경건이 아님을 밝혔다(12절). 걷지 못하는 사람을 회복하신 것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신 것이다(12-13절).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려고 했지만 너희가 거부했다(13절). 그리고 악한 살인자를 놓아주기를 구했다(14절). 생명의 주(근원, 창조주)를 죽인 것이다(you killed the Author of life, 15절).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다(15절). 이 일에 대해서 내가(베드로)가 증인이다(참 행 1:8).

사도 베드로는 그가 그의 이름을 믿었다고 제시했다(16절). 그리고 믿음은 예수로 말미암아 난 것이라고 제시했다. 예수로 말미암은 믿음도 복음 전도자를 통해서 전달되었다(16절). 복음이 그 사람을 완전히 낫게 했다. 복음은 병자를 치료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지만, 유대인에게 표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표적은 유대인에게 필요한 것인데, 계시 시대에 한시적으로 유효한 기능이다.

사도 베드로는 자기 민족이 알지 못하여서 행한 것이라고 제시했다(17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성경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 모르고 한 행동이라는 것은 위로가 될 수 있고 모욕이 될 수 있다. 회개한 사람에게는 위로이고, 거부한 사람에게는 모욕이 될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에 대한 확실한 적통을 주장하는 유대인에게 새로운 선지자에 대한 해석은 달갑지만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심의 표적은 유대인의 무지를 충분하게 증거했다. 사도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권면했다(19절).

사도 베드로는 죄사함을 이루신 주님은 메시아, 즉 예수께서 이루신 사역임을 증거했다(20절). (참고 번역이 쉽지 않은 구문이다. 계 1:7절-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과 유사하다.)

사도행전 3:19-20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悔改)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愉快)하게(->개정 새롭게) 되는 날이 주(主)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또 주(主)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豫定)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

(ESV) Repent therefore, and turn back, that your sins may be blotted out, that times of refreshing may come from the presence of the Lord, and that he may send the Christ appointed for you, Jesus,

신약성경에서 예수께서 오심이란 “현재”형은 쉽지 않은 이해이다. 승천하신 주 예수께서 오신다는 개념은 쉽지 않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나 사도 요한은 사용했고, 바울과 동역한 누가가 증언했다. 사도들이 갖고 있는 동일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그리스도의 현재성” 혹은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한 이해는 현대신학에서 중요한 이슈이다. 로마 교회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성찬에서 구현하려고 했고, 현대신학은 일상생활에서 구현하려고 한다. 그러나 개혁파는 전도자에게 생명을 주는 복음의 내용이 전달됨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죄사함의 역사로 구현하려고 한다. 그것을 사도행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the faith that is through Jesus, 16절) 제공된 믿음이라고 제시했다.

사도 베드로는 이 구원경륜이 이미 계시(구약성경)되었다고 증거하고 있다(21절). 예수께서 모세보다 나은 선지자임을 밝혔다(22절).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를 믿지 않을 수 없다(요 5:46, 17:2). 모세는 그 선지자(that prophet)의 말을 듣지 않으면 멸망 받을 것이라고 확정했다(23절). 선지자의 시초인 사무엘의 반차를 이어받은 모든 선지자들도 동일하게 증언했다(24절). 베드로는 이스라엘은 선지자들의 자손이고, 하나님께서 조상 아브라함과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고 규정했다(25절). 사도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선지자를 죽인 민족이라고 밝히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의 자손으로 설득했다(참고 스데반의 설교).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난 자녀들이다. 그것은 창세기, 갈라디아서, 그리고 모든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다. 혈통적 아브라함의 후손을 주장하는 것은 정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유대인들의 주장이다. 지금 유대인은 동유럽계 백인종 혼혈인 아시케나지와 유대 민족이라고 하는 지중해, 중동계 셈족 세파라디 계열이다. 아시케나지는 전 세계 유대인의 80%를 차지하고 있으며, 핵심 유대인이다. 그리고 지금은 모든 인류가 유대인으로 개종이 가능하다. 즉 유대인에게 12지파 의식이나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참고, Arthur Koestler의 1976년, The Thirteenth Tribe).

고경태 목사
고경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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