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바르트(Karl Barth, 1886-1968)가 남겼다고 하는 유명한 말 가운데에는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이라는 말이 있다. 일반적으로 바르트의 발언을 신앙인은 성경에 대해서 뿐 아니라 세상과 역사에 대한 관심과 조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장대선 목사는 바르트의 주장을 성경에서 상황으로 순서로 이해했고, 당시 불트만 계열이 주장했던 “삶의 정황(Sitz im Leben)”의 해석법을 상황에서 성경으로 순서로 제시했다.

해석학에서 텍스트와 콘텍스트(text and context)의 관계는 매우 중요하게 다룬다. 성경 텍스트는 1세기 문서이고, 21세기 상황에서 어떻게 관계할 것인가?는 중요한 구도일 것이다. 그러나 1세기 저자가 21세기 독자에게 텍스트를 보냈는지는 큰 관건이 될 것이다. 그리고 1세기 저자와 1세기 독자의 관계 문제를 규정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문학 비평이 도입되면서 구조 분석을 진행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독자반응비평(Concept of Reader-Response Criticism)으로 전개되고 있다. 결국 텍스트의 의미를 규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합의한 것이다. 우리는 반틸 박사의 전제주의(presupposition)로 귀결할 수 밖에 없다. 해석자가 해석하는 목표(전제)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해서 무엇을 얻어 제공하려는 것인가? 해석자의 전제를 파악할 수 없다면, 질문하면 된다. 공적 사역자는 질문에 답해야 할 의무가 있다.

바르트가 제언한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은 신앙과 사회를 균형 있게 바라보라는 권고나, 성경에서 상황의 순서로 들어가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설교자는 성경과 신문을 들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으로 설교한다. 설교에 적용 부분이 있다고 제시하는데, 필자는 적용이 없어도 좋은 설교라고 생각한다. 설교는 삶의 상황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하여 주의 말씀을 듣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주의 말씀 들음”을 이루지 못한다면, 설교를 떠나 다양한 상황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으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설교에서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데, 어디에서 하나님 말씀을 들을 것인가?

바르트가 제언한 “한 손에는 성경, 한 손에는 신문을”은 자기 계시관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 바르트의 계시관은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구분하지 않고 하느님의 자유에 둔다. 즉 성경(특별계시)이나 신문(일반계시), 어디에서든지 바르트의 하느님은 자기 백성에게 말할 수 있고, 그 백성은 어디에서든지 자기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손에 성경, 한 손에 신문을 들고 있어도 하느님 말씀을 듣는 수준에 어떤 문제가 없다. 어떤 설교나 상황에서 하느님 말씀을 수납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불신앙이고 이단적이라는 것이 바르트의 주장이다. 정통 교회는 기본적으로 성경과 교리로 하나님 말씀을 수납하는 구도를 제언한다. 바르트는 설교하는 상황에서 하느님 말씀을 듣는 주체는 청자(聽者, a listener)에게 전적으로 주어진다. 그러나 개혁된 신학에서는 화자(話者, a preacher)와 청자(聽者, a listener) 사이에 성령의 내적 작용이 결합되어야 한다. 개혁파 그리스도인은 복음이 없는 화자에게서 복음을 들을 수 없다는 긴박한 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복음이 선포되어도 깨어있지 않는다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깊게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바르트에게는 자유가 있고, 필자는 매우 규범적이고 제한적이다.

장대선 목사가 제시한 것처럼 바르트의 해석 방법과 불트만의 해석 방법은 같지 않다. 방법이 같지 않으며 해석의 목표도 같지 않다. 불트만과 다르기 때문에 개혁파와 같을 수는 없다. 불트만을 대적했기 때문에 오스카 쿨만(Oscar Cullmann, 1902-1999)을 개혁파 분야에서 긍정적으로 수납하며, 구속사적 성경 해석이 활성화되기도 했다.

필자는 계시 이해에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엄격하게 구분할 것을 제언한다. 특별계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일반계시 영역에서 유익을 기대하지 않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 이러한 주장은 불트만의 수제자에서 돌아선 에타 린네만(Eta Linnemann, 1926-2009)에게서 잘 드러난다(에타 린네만, 『성경비평학은 과학인가 의견인가』, 송다니엘 역, 부흥과개혁사, 2010년). 린네만은 불트만의 지도로 “Gleichnisse Jesu. Einführung und Auslegung”를 발표했고, 숨바쿰라우데(summa cum laude, 최우등상)로 1961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여성 학자이다. 린네만은 51세에 회심한 뒤 인도네시아로 선교 사역을 했다. 그리고 두 권의 책으로 자기 이전 모든 작품을 정죄했다. 린네만이 거부한 <예수의 비유>는 지금도 비평학계에서는 잘 인용하고 있다. 린네만은 마가복음 우선설을 거부하고, 공관복음의 원자료설을 거부하고 독립성을 주장한다.

성경해석은 끊임없는 정진에 있다. 교회 사역자들이 많은 글쓰기를 해야 하지만, 근본적인 글쓰기는 끊임없는 성경 본문 다룸(handling)을 보여주어야 한다. 사역자가 성경을 해석하면서, 그 해석을 읽고 듣는 독자의 결과가 어떻게 나오는 것인가?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바르트의 신학을 수용하는 예장 통합, 바르트의 신학을 부정한다는 예장 합동의 열매가 유사하다면 어떤 포인트에서 문제가 있는 것이다. 둘 다 나쁜 확률은 상당히 높지만, 둘 다 좋을 확률은 거의 없다. 성경을 해석한 해석자와 따르는 사람의 열매를 보자. 바르트, 불트만 등등 당대 시대를 주도했던 현대신학자들의 열매가 100년이 되지 않아 보이고 있는데, 동성애를 넘어 상상할 수 없는 세계를 주도하고 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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