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선 목사
장대선 목사

중세시대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서부유럽의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틀은 ‘소교구제’(parish)의 틀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소교구의 기본적인 성격은 강한 공동체성이었기에, 교회의 권징에 따른 교제권의 상실(excommunicatio)은 심리적 충격만이 아니라 사회적 삶에서의 단절이라는 치명적인 충격을 주는 일이었다. 즉 교회의 권징에 의한 교제권의 상실이란, 사회생활 자체를 불가능하게 하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소교구제의 성격은 종교개혁의 시대에 로마 가톨릭교회뿐 아니라 개신교 진영에서도 강력했었으며, 신앙과 경건에 있어서의 공동체성은 실질적인 면에서 아주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도시화로 말미암아 광범위한 인구이동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 모이는 현대 교회에 있어서의 교구제도는 중세와 종교개혁시기까지 계승된 제도의 공동체성과는 그 차이가 현격한데, 단적으로 그러한 교구에서의 교제가 상실된다고 해도 실질적으로는 전혀 불편하거나 피해를 입는 일이 없다. 심지어 무수히 중첩되어 있는 것이 교회의 교구제도적인 공동체성이기 때문에, 어느 한 곳에서 권징이 된다고 해도 얼마든지 다른 교회 공동체로의 이동이 가능하다. 그리고 무수히 많은 교단과 교파들로 말미암아 권징의 연계성 또한 단절되어 있기 때문에, 사실상 치리와 권징을 온전히 시행하기는 불가능한 것이 현대 기독교의 현실인 것이다. 물론 그러한 현대 교회의 한계는 결코 쉽게 회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중세나 종교개혁 시대와 같은 사회구조로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이다. 현대 교회가 아무리 공동체성을 회복하려고 노력한다고 해도, 중세나 종교개혁 시대만큼의 유기적인 공동체성의 회복은 필시 불가능한 것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공동체성이 기본적으로 영적인 교제(Koinonia) 가운데서 이뤄지는 것이니만큼, 인간 사회의 교제가 상실되는데 따른 충격을 주는 것은 어려울지라도 본래(본질)적인 교제의 의미 가운데서의 상실로 말미암은 충격은 여전히 유효할 수 있다. 즉 성도간의 친밀하고도 사회적인 교제에서의 단절로 말미암은 충격은 거의 무의미해 버렸을 지라도, 영적인 진리-성경의 참된 진리-에서의 단절로 말미암은 주림과 목마름은 여전할 것이기 때문에, 참된 말씀 가운데서 양육된 신자가 잠시 완고해진 경우라면 참된 말씀의 선포에서 단절시키는 것-출교-이 여전히 공동체성의 상실이 주는 충격요법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 조차도 인터넷이나 여러 매체들을 통해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것이 말씀 선포, 즉 설교가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바로 이 점에 있어서 현대 교회의 목회자들, 특별히 성경의 진리를 확고히 표명하는 장로교회들의 목회자들이 감당할 몫이 매우 크다. 장로교회의 목사들은 성도들이 영적인 진리를 충실히 공급해 주는데 힘써야 하는데, 마치 매일 먹는 밥과 같이 영적인 진리가 성도들에게 충실히 공급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잠시라도 진리를 공급받지 못하면, 마치 매일 먹는 밥을 먹지 못하게 되었을 때에 느끼는 배고픔과 같은 핍절함을 느끼는 자들이 되도록 성도들을 키워야 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인터넷이나 TV 등을 통해 얼마든지 접할 수 있는 것이 말씀의 선포이고 그러한 메시지를 접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신자들의 어머니라 칭하기도 하는 교회-로마 가톨릭과 같이 교회의 어머니로서의 마리아에 대한 개념이 아니라 신자들을 양육하는 교회로서의 개념-를 결코 드러낼 수 없으며, 어머니에게서와 같은 양육을 받지도 못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베드로 사도에게 “내 어린 양을 먹이라”(요 21:15)고 하실 때에, “어린 양”이란 곧 젖먹이 새끼 양을 일컫는다. 그러므로 말씀의 일꾼들이 주님의 새끼양들인 성도들을 먹이는 일은, 마치 젖먹이 새끼에게 젖을 먹이듯 쉴 새 없이 말씀의 진리를 공급하는 사역이다. 그리하여 잠시라도 그 진리를 공급받지 못하면, 젖먹이 새끼마냥 주리고 목말라 우는 자들이 되도록 성도들을 양육해야 한다. 그럴 때에 교회 공동체란, 진리의 양식을 수시로 공급받는 충만의 성격으로서 자리하게 될 것이며, 그러한 공동체에서의 단절이란 영적인 주림이요 목마름으로 말미암는 영적인 죽음의 고통임을 성도들로 하여금 사무치도록 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의 많은 기독교 신자들은 그러한 영적인 주림에 대해 알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영적인 채움을 이룬 경험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단의 경우처럼 거짓된 요설(hyperlogia)과 두려움을 획책하여 잡아두려는 의도에서 행하는 주림은 찾아볼 수 있어도, 참된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영적인 풍성함에서 떨어져 나감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영적 주림은 경험하지 못하는 것이 많은 신자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광야의 백성들에게 그들이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양식-manna-을 통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바에 관해, 신 8:3절 말씀은 이르기를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다.

그런즉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진정 육신과 심령을 살아있도록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주일에 행하는 예배에서 선포되는 메시지뿐 아니라 주중에 매일 성경말씀에 바탕하여 드리는 예배를 통한 영적인 유익 가운데서 비로소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던 바를 따라 온전하게 사는 것임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 점에 있어서 현대의 신앙은 개인과 가정의 경건의 의무들, 즉 개인적인 성경읽기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이뤄지는 개인예배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말씀과 기도와 교리문답으로 행하는 가정예배를 충실히 행하도록 하는 지도와 치리를 거의 경험한 바가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예배하기를 것을 거르는 일이 일상다반사인 것이 현대 신자들의 모습이기에, 말씀에 주린다는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실감하지를 못하는 것이다. 마치 끼니를 거를 때에 느껴지던 극심한 배고픔이 어느 시간이 지나면 느껴지지 않음과 같이, 말씀을 거르는 생활이 오래되니 말씀 가운데서 공급되는 영적인 유익을 거의 느끼지를 못하는 것이다.

지금 신자들의 공동체여야 마땅한 교회들은 성도들에게 과연 무엇을 먹이는가? 아니, 그러한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간 성도들이 과연 무슨 배고픔이나 목마름을 느끼는가? 혹여 배고픔은커녕 아무런 아쉬움과 불편함도 없는 이합집산은 아닌가? 이러한 모든 질문들을 현대의 교회들, 특히 장로교회의 간판을 걸고서 모이는 교회의 치리회-당회와 노회-들은 진지하게 숙고해 보아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내 양을 먹이라”(요 21:17)는 말씀에 앞서서, “내 어린 양을 먹이라”(15절)는 말씀을 먼저 들은 시몬 베드로와 같은 부르심을 받은 목회자들이야말로 이 모든 물음을 진지하게 자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성도들에게 들어도 그만 듣지 못해도 그만인 사람의 말들과 정보들을 전하고 있는지, 심지어 들어서는 안 될 요망한 잡설들로 억지로 설교를 때우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또한 자신의 설교를 듣지 못하는 것이 주리고 목마름임을 실감하도록 할 수 없는 가운데서 그저 안 들으면 별 수 있느냐는 식의 체념에 사로잡힌 채로 사역하는 자가 바로, 삯이나 축내는 삯군이라는 철저한 인식을 결여한 목회 사역자들로 말미암아 교회의 공동체성이 형성조차 되지 못하는 것임을 심각하게 인식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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