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 5:1-11]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도행전 4장 32절에 등장한 ‘바나바’(나비의 아들)는 예루살렘 교회에 유력한 사람이 되었다. 예수께서는 재물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하셨다(마 6:24). 그런데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이 아닌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싶었다. 그런데 사람을 속일 수 있지만 하나님은 속일 수 없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빼고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행동은 죄이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람에게 인정받으려는 것도 심각한 죄이다.

속이는 일은 남편이 주도했고, 아내도 동의했다(2절). 아나니아는 전답을 판값을 가지고 베드로에게 내 놓았다. 베드로 사도는 아나니아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여 성령을 속임을 지적했고, 아나니아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행 5:5). 그리고 세 시간 뒤에 아내 삽비라가 나올 때에 땅값에 대해서 물었고 아나니아의 아내 삽비라도 속임이 없다고 주장하여 죽었다. 성령을 속이는 행위를 한 부부를 정죄했다. 그래서 교회는 더욱 성장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은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한 뒤에 발생한 아간 사건과 유사하다. 여리고에서는 아간의 죄악을 몰라 작은 아이 성에서 패배했지만, 예루살렘 교회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를 파악해서 동일한 죄에 빠지지 않았다. “지도자의 무지는 용서되지 않는다”.

[교회의 헌금 수납 원리: (1) 교회는 바른 예물을 수납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거짓 예물을 분별하는 매뉴얼을 만들어야 한다. 드려진 예물을 조건 없이 취득하지 않는다. 까닭없는 헌금은 거절한다. 주님의 교회는 규정한 범위를 넘어선 과도한 헌금이 들어왔을 때에는 반드시 제직회를 열어서 수납한다. (2)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소득을 주 앞에 내놓지 말라. 부정한 방법으로 취득한 방법은 부정한 형제에게 주어라(눅 16:10). (3) 부정한 재물을 탐하면 교회는 부패하여 패망한다.]

[교회 권징의 원리. 사도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는 것을 알았고, 공개적인 판단으로 정죄했다. 모든 사안을 그렇게 처리한 것은 아니다. 교회의 권징은 성령으로 진행해야 함을 제시한다. 교회의 권징은 범죄한 자를 징계하여 회복하게 하려하는 것과 지체들에게 경각심을 주는 것이다. 그럼에도 죄가 도입되면 죄가 감소되지 않는 것은 특징이다. 교회의 권징은 공개적 권징과 은밀한 권징이 있다. 장로파는 당회에서 권징을 목사와 치리장로가 협력하여 진행한다. 권징체계를 갖고 있는 교파가 장로파이다. 로마 교황주의는 고해성사방에서 사제가 단독으로 판결자를 알지 못하는 수준에서 진행한다. 장로파의 권징은 공개적 권징과 은밀한 권징을 잘 분별해서 진행해야 하며, 개인 자격으로 권징하는 것이 아니다. 권면(상담)과 권징은 전혀 다르다. 권징은 교회에 부여된 사법권이다.]

2. [행 5:12-16] 사도들이 표적을 일으키다.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서 많은 표적과 기사가 발생했다. 솔로몬 행각에 모였고 백성들은 칭송했다. 믿은 사람이 큰 무리를 이루었다(14절). 예루살렘 교회는 5,000명에서 큰 무리로 성장했다. 몇 년의 시간이 경과되었을 추측하기도 한다. 수 많은 병든 자들이 베드로 사도에게 나왔고, 그림자라도 닿기를 바랐다(15-16). 그것을 사도들이 기뻐했을까? 사도행전은 말하지 않지만 사도들은 많은 사람이 모임이나 병나음을 기뻐하지 않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많은 무리를 피하신 것처럼 사도들도 많은 무리를 좋아하지 않았을 것이다. 많은 무리들과 함께 있지만, 그 무리들은 말씀이 아닌 병치료를 위해서 나오는 것을 불쌍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에게 주어진 권위는 병을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이나 병자들이 복음 전하는 일에 방해가 되는 모든 사안을 주의해야 한다. 사도들은 주 예수의 이름을 증언하기 위해서 세움받은 직분자들이다(행 6장). 그들은 구제에 쌓여 복음을 전하지 못하자 구제의 직분을 구분했다.

3. [행 5:17-42] 산헤드린(사두개인)과 율법사 가말리엘(바리새인). 사도들이 예수 부활을 증언하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들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했다(17절). 결국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18절). 기적이 일어나면 구원이 일어날 것처럼 생각하지만, 사도들은 옥에 갇혔다. 기적은 구원으로 인도하는 것과 고난으로 인도하는 길이다.

사도들이 갇혔는데, 주의 사자가 옥문을 열고 이끌었다(19절). 참고로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옥문이 열렸지만 나가지 않았다. 베드로는 감옥 문을 열고 나갔지 알 수 없지만 간수들이 볼 때에는 문이 닫혀 있었다(23절). 주의 사자는 옥에서 빼내어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도록 인도했다(19절). 옥에 갇혀 있을 사람들이 없자 적지않은 소동이 일어났다(24절). 그런데 제자들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25절). 성전맡은 자들이 베드로를 강압적이지 못하게 체포했다(26절). 사두개인은 사람의 눈치를 보는 부류였다. 사두개인들은 사도 베드로를 다시 공회 앞에 끌어다가 심문했다(27절). 사도 베드로는 전과 같이 말을 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행 4:18, 5:28). 그리고 예수를 당신들이 죽였는데, 우리 조상의 하나님께서 살리셨고, 이스라엘에게 회개와 죄사함을 주시려고 “우두머리(author)와 구주(Prince and Savior)”를 삼으셨다(30-31절). 그것을 공회 앞에서 증언하는 것이 임무이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성령께서 이 일을 한다고 고백했다(5:32). 사도 베드로의 마지막 고백은 멋진 문장이다. καὶ ἡμεῖς ἐσμεν μάρτυρες τῶν ῥημάτων τούτων καὶ τὸ πνεῦμα τὸ ἅγιον ὃ ἔδωκεν ὁ θεὸς τοῖς πειθαρχοῦσιν αὐτῷ.(32절,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에게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사도 베드로는 자기가 한 증거가 성령께서 증거하시는 것으로, 듣는 자가 성령과 베드로가 동일시되는 것처럼 들릴 수 있지만, 베드로 사도의 극진한 믿음과 겸손 그리고 담력을 보여주는 문장이다. 모든 믿는 자에게는 성령이 있음을 증거한 것이고, 성령이 임하면 예수 증인이 됨의 필연성을 고백한 것이다(행 1:8). 예수의 이름과 성령의 권능을 함께 증거한 것이다. 사도 베드로께서 아들을 증언함으로 성령의 권능으로 아버지께 영광이 된다.

※ 사도행전에서는 복음이 흥왕하면 필연적으로 복음전도자는 그곳에서 떠나게 된다. 이는 현재 교회가 사도행전 교회를 적용할 때 주의해야 할 점이다. 사도행전의 교회 형성 원리이지 현재 사역자의 사역 매뉴얼이 아니다.

4. [행 5:33-42] 가말리엘의 경륜. 가말리엘이 성전에서 펼친 경륜에 대해서는 찬반이 나뉜다. 필자는 가말리엘을 기회주의 자세로 평가하고, 불가지론적(不可知論, agnosticism) 발언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진리는 정치적이지 않다. 정치는 매우 신중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지만, 진리는 자기양심을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학문하는 사람으로 진리를 드러내기 쉽지 않음은 양손에 떡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학문은 진리이고, 생활은 정치이다. 학문하는 사람은 생활도 학문이 되어야 한다(학행일치,學行一致). 학문을 하는 학도는 자기 지식의 한도에서 최선의 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가말리엘은 힐렐의 손자로 당대 최고의 학자이다. 바울이 가말리엘에게 배웠다고 하는 말에 의해서 힐렐 학파로 분류하지만, 유력한 학자들은 샴마이 학파로 제시한다(김세윤, 큄멜, 케제만 등). 메이천 박사는 디아스포라 자유주의 유대교(a liberal Judaism)가 아닌 엄격한 유대인으로 분류했다. 엄격한 유대인은 이방인에 대해서 포용적이지 않았다. 힐렐과 샴마이가 원리는 같겠지만 방법은 전혀 다르다. 바울이 가말리엘의 문하에 있었다는 것은 샴마이와 힐렐을 융합한 “유대인 중의 유대인”이라고 보아야 한다.

가말리엘은 사도들의 표적과 부각되는 현상이 드다(36절)와 갈릴리의 유다(37절)와 유사한 현상일 수 있다고 제시했다. 시간이 지나면 흩어질 것이라는 것이다(38절). 우리말로 “두고봐야 한다”는 것이다. 가말리엘이 두고 보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복음을 놓고 두고 봐서 판단하겠다는 자세는 부당하다. 복음에는 예와 아니오로 답하게 되어 있다. 가말리엘은 하나님과 대적하지 않도록 주의하는 경건한 자세를 가졌다(39절). 당대의 최고의 선생이 하나님께 대적되는 사안인지 아닌지도 판단할 수 없는 것이다. 필자는 최근 정치적 발언을 일삼는 어떤 목사에 대해서 결코 인정할 수 없는 위인이라고 규정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정치적 발언을 습관으로 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아니오”라고 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수의 이름은 오직 구원에 이르는 진리이고 생명이고 영생이다.

가말리엘은 당대 최고의 인물이었는데, 사도들을 처리할 때 매우 합리적인 방식으로 처리했다. 산헤드린 공회는 가말리엘의 경륜을 옳게 여겼는데, 사도들을 채찍질을 했다(40절). 무고한 자를 채찍질한 것은 자기 체면을 위해서 불법을 자행한 것이다. 가말리엘은 하나님을 대적할지 모르는데 막지 않았다. 사도들은 그러한 능욕을 개의하지 않았고, 애매한 고난을 오히려 기뻐했다(41절). 그리고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않았다(42절). 성전과 집은 예루살렘 교회가 가진 두 가지 회집 형태를 의미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성전과 집, 밖에서는 회당과 집 형태로 구성하다가, 집으로 고착된다. 성전(회당)과 집이 병행될 때에는 유대인에게 먼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며, 회개를 선포했다. 그러나 집 시대에는 이미 믿은 자들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이 복음을 전파한다.

5. 전능하신 하나님, 성령의 권능을 주옵소서. 진리의 빛이 세상의 블랙홀에 빨려 빛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블랙홀 속에서 빛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어둠의 예루살렘에서, 그 어둠의 중세에서 빛을 발하신 것처럼, 우리 시대에도 빛을 발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에 이르게 하옵시고, 위로와 평안을 얻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경태 목사, 본지 논설위원
고경태 목사, 본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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