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논어의 ‘위정’(爲政) 편에서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신이 인격적으로 어떻게 성숙해 나아갔는가를 술회하고 있다. 전문은 이러하다. “나이 열다섯에는 학문에 뜻을 두고 서른에는 바로 선다. 마흔에는 미혹되지 않고 쉰에는 천명을 알며 예순에는 들음의 평정을 이룬다. 나이 일흔엔 마음대로 행해도 법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서의 마흔의 불혹은 사람을 파악함에 있어 자신이 만든 허상을 바탕으로 무턱대고 사랑하거나 미워하지 않는 단계를 가리킨다. 과연 사람이 마흔이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가. 조그만 유혹에도 흔들린다. 돈과 권력 앞에서 마구 흔들린다. 공자가 말한 바는 일상에서 자기 연마를 꾸준히 행함으로써 나이가 쌓일수록 자기를 제고시켜 가는 것을 어른다운 삶으로 제시했던 것이다. 공자는 40세를 불혹의 나이라 했지만 요즘은 유혹의 나이라고 한다. 100세 철학자 김형석 연세대 명예교수는 “60세쯤 돼야 철이 든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미혹’은 나이를 기준하지 않는다. 그 뜻도 뒤죽박죽을 의미하지 않는다. ‘미혹하다’에 해당하는 ‘πλανάω’(플라나오)는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는다. ‘길을 잃다, 속이다, 미혹되다’이다. LXX에서는 ‘혼돈시키다, 길을 잘못 인도하다, 방황하다’를 의미한다. 소경을 잘못된 길로 인도해서는 안 된다(신 27:18). 우상숭배에 빠지게 하는 종교적 미혹은 거짓 선지자들과 충성되지 못한 지도자들(신 13:6 이하; 왕하 21:9)이나 거짓 선지자들의 짓이다(호 8:6; 암 2:4). 미혹의 배후에 있는 개념은 ‘잘못된 길로 인도되다’이다. 대체로 방황하다를 의미한다. 행위나 말이나 글을 통해 ‘속이다’를 의미할 수 있다.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 목표의 부재를 가리킨다. 공자에게 ‘미혹됨이 무엇입니까?’라고 제자 자장이 물었다. 그 질문에 답하면서 ‘사랑할 때의 마음과 미워할 때의 마음이 완전 뒤바뀌는 그 자체’를 두고 미혹함이라 답했다.
1. 사탄은 천 년이 차도록 미혹하지 못한다
사탄은 감금된다. 감금 상태를 자세히 묘사한다. 기간은 천 년 동안이다. 쇠사슬에 결박된다. 무저갱으로 던져진다. 무저갱은 잠기고 인봉된다. 사탄이 땅에서 미치는 영향력에 문제가 생겼음을 암시한다. 사탄이 무저갱에 감금되고 인봉까지 되었으니 절대적 감금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다는 사상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이 사탄을 천 년 기간 동안 인봉하신 것은 교회가 미혹의 안전지대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미혹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참된 교회가 구원의 안전성에 해를 끼치지 못하게 하신다는 의미다. 미혹을 이길 수 있고 이겨야 한다. 이긴 자에게 주시는 상급이 있다. 비록 물리적으로 해를 당하고 미혹을 제외될 수 없다.
Aleksandr S. Pushkin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는 시는 잘 알려져 있다. 삶 자체가 우리를 속이지 않는다. 더불어 사는 사람이 우릴 속이는가. 마귀가 사람을 통해 우릴 속인다. 미혹한다. 공의의 하나님은 악이 계속해서 약한 자들을 괴롭히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다. 그러나 악의 대리자들은 땅을 지배하려는 그들의 시도를 멈추려 하지 않는다. 악한 범죄자들을 변화를 거절했기 때문에 공의는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그들의 행동이 종말을 고하기를 요구한다.
미혹하는 것이 주특기인 사탄과 연애할 때 철저하게 속이고 결혼하는 사이코패스와 닮은 점이 있다. 연애 상대를 장악하기 위해 이른바 ‘gas lighting’ 수법을 쓴다.(가스라이팅: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 속이고 혼란스럽게 해 상대의 확신과 현실감을 서서히 약화시켜 자기 의심에 빠지게 한다. 상대의 행동을 연구해 지배에 교묘히 악용한다. 사탄이 만국을 미혹하는 삼 년 반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함께 시작된다. 재림까지 계속된다. 사탄의 결박은 그의 모든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마귀와 그의 수하에 있는 귀신들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부각시킨다.
연대기적 관점에서 사탄이 종말을 고할 때가 언제인지 그들로 하여금 계산하도록 허락되지 않는다. 사탄이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사탄이 결박을 당하고 천 년 기간 동안 감금되는 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옹호하심을 신뢰하도록 용기를 준다. 사탄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쫓겨났다’는 것은 사탄을 모든 면에서 제한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사탄은 쫓겨남으로써 온 땅에서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것을 막지 못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요 12:31-32). 인내와 순교로 마귀를 대적하는 충성된 신자들을 감당치 못한다.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이는 것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이라 한다. 남의 눈과 마음을 ‘현혹(眩惑)’시키는 말이나, 근거 없는 ‘매혹적(魅惑的)’ 태도에는 함정이 있으니 조심할 일이다. ‘의혹(疑惑)’에 빠지면 혹독한 대가를 치를지도 모를 일이다.
구금의 목적이 무엇인가. 처벌을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다. 사탄의 행동의 한 가지는 이미 정지되었다. 그 행동은 그리스도가 승천하고 사탄이 하늘로부터 쫓겨나서 그의 영향력이 지상으로 제한됨으로 끝이 났다. 사탄의 행동의 두 번째 형태는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이다. 그는 주권은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땅의 파괴자에게 속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도록 사람들을 꾀었다. 만국을 속였을 때, 그들은 인간 권위자들을 신격화했다. 그리고 바벨론, 즉 로마의 물질주의적이며 폭력적인 길을 따르도록 유혹했다.
2. 사탄은 천 년이 차도록 무저갱에 결박당하다
고대 그리스인은 신을 두 부류로 나눴다. 논리, 질서, 이성의 신과 광기, 성욕, 폭력의 신이다. 전자는 올림푸스에 사는 제우스, 아폴론, 아테네 등 12신은 질서를 유지하는 신이었다. 후자는 숲이나 계곡에는 동물적 폭력성과 성욕, 식욕을 대표하는 신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숲의 정령 pan이다. 목동의 신이기도 하다. ‘공포’ 또는 ‘당황하다’는 뜻인 panic은 pan에서 유래한 말이다. 숲의 정령의 주무기는 사람을 미혹하는 것이다. 미혹된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춤을 추고 술에 취하고 사랑에 빠져 숲을 헤맨다. 미혹이란 ‘무엇에게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헤매다’라는 뜻이다. ‘혹시나 하며 기대를 거는 마음’이 바로 ‘미혹될 혹(惑)’ 자이다. 글자 모양을 보면 ‘혹시나(或) 하는 마음(心)’이 깔려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하다. 아담이 혹시나 하며 기대를 거는 마음으로 사탄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음으로 모든 사람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천사가 용을 잡아 결박한다. 무저갱에 던져 넣는다. 거기서 용은 천 년 동안 있게 된다. 만국을 미혹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천년이 마칠 때 즈음에 그가 잠깐 동안 다시 풀려나게 될 것이다. 미혹에 대한 주요한 공간적 의미는 목자 없이 길을 잃고 멸망하는 양의 모습이 소개된 곳에 사용되었다 또는 길과 결합된 곳에서 가장 뚜렷이 나타난다. 그러나 미혹은 공간적 의미가 아니다. 항상 신학적 의미다.
사탄의 최후 패배는 두 단계를 거쳐 일어난다. 첫 번째 단계는 무저갱에 천 년 동안 갇혀 있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세세토록 불못 속에 던져지는 것이다. 무천년 학자들이 주목하고 있듯이, 요한계시록 대부분의 내용을 연대기적으로 연속적인 기사로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인, 나팔, 대접 등은 그 처음과 완성에 있어서 병행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또한 천 년 동안 사탄을 결박하는 것은 현재 기간 동안 사탄이 맹렬하게 속이고 죽이는 활동을 하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다. 사탄이 강제로 결박되어 무저갱에 감금한다는 모티브는 고대의 다른 전쟁 신화들에 속에 병행을 갖고 있다. Hesiod의 Theogony를 보면, Zeus와 그의 동맹군이 타이탄족을 정복한 후에 패배한 자들을 땅 밑에 가두고, 그 후에 지하 세계에 관한 묘사가 나온다. 천년이라는 결박 기간은 사탄의 계획을 변경시키지 않는다. 악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천 년 기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거역하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성향을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인봉하다’는 절대적인 감금을 의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어는 다니엘 6:17과 마태복음 27:66에서의 일차적인 의미이기도 한 ‘주권 행사’라는 일반적 사상을 의미할 수 있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들 144,000명에게 인을 친다는 것은 그들을 모든 면에서 보호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다. 단지 영적이고 구원론적인 면에서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사탄이 성도들을 투옥하고 죽이는 삼 년 반이라는 시간은 환상의 세계에서 짧다. 대조적으로 사탄이 결박당하는 천 년 기간은 광대하다. 이것은 새 창조의 시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한다.
사탄이 강제로 결박되어 무저갱에 감금한다는 모티브는 구약의 본문이다.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심판을 묘사하고 있는 이사야 24:21-22이다. 이사야는 전 세계적인 심판이라는 주제를 언급한다(사 24:16b-23). 심판의 날은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로 가득 찬 날이다. 모든 권세, 영, 마귀, 악의 세력이 하늘에서 쫓겨나 ‘깊은 옥’에 갇힐 것을 예언하였다. 이사야 본문과 관련된 모티브는 다음과 같다. 악인들의 감금이다. 기간은 ‘여러 날’이다. 감금이 끝난 뒤에 최후의 형벌을 받을 것이다.
천 년 동안 만국은 더 이상 사탄의 미혹하는 영향력 아래 있지 않는다. 그들은 더 이상 미혹당해 하나님께만 속하는 경배를 황제께 드리는 우를 범하지 않는다. 천 년이 끝날 것을 바라보면서, 요한은 잠깐 동안 사탄이 반드시 놓이게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다. 목자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보호와 인도를 받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함으로써 길을 잃어버릴 위험에 처하게 된다. 믿음의 주요 영혼의 감독이시며 목자이신 예수님의 인도와 돌봄이 없는, 즉 미혹을 받아 길을 잃고 방황하는 것은 죄다. 믿음과 진리로부터 벗어나 마음이 미혹되는 것은 죄를 짓는 것이며 동시에 죄악을 초래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