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에는 ‘천일양병 일일용병(千日養兵 一日用兵)’이란 금언이 있다. 하루 써먹기 위해 천 날 동안 훈련한다는 뜻이다. 영국의 윔블던 테니스장은 일 년에 두 주간을 사용하기 위하여 일 년 내내 준비하고 가꾼다. 왕이신 하나님이 아들의 혼인 잔치를 위해 천년을 하루 같이 준비하신다. ‘준비(準備)’라는 한자는 의미심장하다. 첫 글자 ‘준(凖)’은 ‘물’을 의미하는 삼수변(氵)에 ‘송골매 준(隼)’이 합성되었다. 물은 땅의 수평을, 송골매는 하늘의 수평을 뜻한다. 두 번째 글자 ‘비(備)’는 사람이 화살집을 허리에 차고 있는 모습이다. ‘준비’는 저 아래 강물 속에서 헤엄치는 물고기를 발견한 송골매처럼, 자기에게 주어진 소중한 하루를 위해 화살을 만들어 화살통 안에 가지런히 놓는 과정이다.
‘유비무환(有備無患)’은 있을 유(有), 갖출 비(備), 없을 무(無), 근심 환(患)으로 읽는다. ‘준비가 있으면 근심이 없다’는 뜻이다. 중국의 고전인 ‘좌전(左傳)’의 양공(襄公)에 나오는 “거안사위, 사직유비, 유비무환”(居安思危, 思則有備, 有備無患), 즉 “편안할 때에 위험을 생각하고, 생각을 했으면 준비를 하라, 준비를 해두면 환난이 없느니라.”이라는 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준비하다’에 해당하는 ‘ἑτοιμάζω’(헤토이마조)는 신부, 즉 새 예루살렘이 하늘의 신부 대기실에서 내려와 출현하는 것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 모든 신부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고 혼인 예식에 참여하는 건 아니다. 어린 양의 혼인 예식을 위해 자신을 준비한 신부만이 누릴 축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으로 예수님과 교회의 영적 연합이 시작되었다. 완전히 성취된 건 아니었다. 예수님의 재림 때 신랑과 신부, 그리스도와 교회의 완전한 연합이 이뤄질 것이다.
잔치를 곁들인 혼인식의 이미지는 유대인들에게 잘 알려진 하나님 나라의 이미지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비유에서 혼인과 잔치의 이미지를 사용하셨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비유를 신부 이스라엘에 대하여 사용하였다(겔 16:1 이하; 호 2:19). 신약에서는 교회에 적용하였다. 약혼한 여자는 혼인식을 준비하는 여자다. 자신에게 기름을 바른다. 예복을 입는다. 패물을 착용한다. 혼인 예식을 위해 자신을 준비한다. 혼인의 이미지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지칭하는 데 사용된다. 유사한 행동들이 언급되었다.
1. 어린 양의 신부로서 준비하다
‘큰 음녀’와 어린 양의 신부 간에는 명백한 대조가 있다. 어린 양과 그의 신부는 음녀 및 그 애인들과 대조를 이룬다. 신구약성경에는 이스라엘을 야훼의 신부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로 보는 이미지가 풍부하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혼인 이미지를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예수님과 관련된 자들에게 확대했다. 예수님의 비유에서 그를 신랑과 연결시킨다. 신랑이 있을 동안은 기쁨이 있을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간의 관계를 표현하는 혼인의 비유는 구약이 예언 문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배경은 주로 선지서에서 주어진다. 포로가 된 이스라엘은 만유의 주가 자신의 남편이며 자신을 다시 데려가실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함으로 위로받는다. “만군의 여호와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라 말씀한다(사 54:5).
일반적인 사회적 관례에서, 신부와 신랑은 약혼을 통하여 상호 간의 혼약관계로 결합된다. 남자는 자신의 아내에게 충실할 것을 약속하며, 여자는 자신의 충실을 맹세한다. 혼인 예식은 얼마 뒤에 진행한다. 혼인의 비유는 메시야가 그의 피로 사신 공동체, 곧 메시야 공동체의 치밀하고 파괴할 수 없는 연합을 암시한다.
성경이 기록한 시대의 혼인은 두 개의 주된 사건과 연관되었다. 약혼과 혼인이었다. 둘 사이에는 일정 기간의 간격이 있다. 그 기간 두 사람은 남편과 아내로 여겨졌다. 서로 신실함의 의무를 지켜야 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약혼은 결혼의 첫 단계이다. 법적인 단계이다. 약혼은 결혼 예식으로 완성된다. 약혼한 이후에는 약혼녀이면서 아내로 간주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약혼식에서 중대한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아내에 해당하는 ‘귀네’는 여자를 의미한다. 정숙한 아내, 혹은 정숙한 여자는 바로 바벨론 타락한 여자와 반대이다.
계약 사상은 신부의 개념에 함축되어 있다. 이는 각 파트너가 지켜야 할 의무로 시작하는 꼭 이행해야 할 약속과 관련 있기 때문이다. 고린도후서 11:2에는 교회가 순결한 처녀로 신랑인 그리스도와 약혼했다는 은유가 나온다. 약혼은 고린도 교인들이 믿고 회개했을 때 이루어졌다.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질 것이다. 혼인식이 거행되기 전에 성도들이 세상의 박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을 보존함으로서 ‘의로운 행실’을 행하여 준비를 완성했다는 의미이다. 링컨이 이렇게 말했다. “내게 여섯 시간을 주면 나무 한 그루를 베어 넘기겠다. 그중 첫 네 시간은 도끼날을 갈겠다.” Benjamin Franklin의 말이다. “Failing to prepare is preparing to fail.” “준비에 실패하는 것은 실패를 준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신부의 옷만 언급하고 있지만 신부 단장을 가리킨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는 어구도 신부 단장을 가리킨다. 칭의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원인적인 필요조건이다. 옳은 행실은 비원인적인 필요조건이다.
2. 하나님이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준비하시다
‘입은 거지는 얻어먹어도 벗은 거지는 얻어먹지도 못한다’는 속담이 있다. 빌어먹는 것도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가능하다는 뜻일 게다. 의식주(衣食住)라는 말의 순서에서도 알 수 있다. 우리 조상들은 먹고(食) 살기(住) 힘들 때도 의복(衣)은 신경 썼다고 한다. 남편이신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에게 사랑과 관심을 준다. 하나님은 자신의 신부를 위해 ‘구원의 옷’과 ‘공의의 겉옷’을 입힌다(사 61:10). 그리고 신부가 필요로 하는 패물을 제공한다. 가장 먼저 물로 피를 씻기고 다양한 옷과 화려한 왕관을 씌운다. 황후의 지위에 올린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신부처럼, 요한계시록의 신부도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는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을 입었다. 빛난다는 것은 영광을 묘사하기 위해 하얗고 빛나는 색을 말한다. 깨끗하다는 것은 새 예루살렘의 특성인 정결, 충성, 신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많은 연구는 세계 어디에나 신랑 쪽에서 신부의 가족에게 대가를 지불하는 이른바 신부값 문화를 갖고 있다고 한다. 양가의 관계를 공고히 해두자는 취지다. 신부가 잘 대접받을 것이라는 약조다. 신부의 가족에게 생기는 손실에 대한 대가이기도 하다.
교회의 옷은 흰 세마포이다. 이것은 큰 음녀가 입은 자주 빛과 붉은 옷 그리고 세마포 옷과는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깨끗한 세마포는 하나님이 신부에게 적합하다(겔 16:10). 이전에 언급된 흰옷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 옷은 순결, 거룩, 그리고 명예를 의미한다. 세마포는 제사장과 왕들의 옷을 만드는데 사용한 값진 천이었다. 그것은 빛나고 깨끗한 천이다. 지성소에 들어가는 대제사장이 반드시 입어야 하는 옷이었다(레 16:4). 성소에 들어가는 모든 사역자에게 확대되었다. 순결함과 의로운 행동을 상징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세마포는 고대 세계에서 사치품이었다. 큰 성, 즉 로마가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바벨론의 사치스러운 세마포 옷과 어린 양의 신부가 입은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는 대비되고 있다. 로마는 최전성기인 ‘5현제(五賢帝) 시대’는 사치향락이 팽배했다. 로마시대 정치가이자 역사가인 타키투스는 향락에 빠진 로마인을 각성시키기 위해 로마 지배를 거부하고 자유를 위해 죽을 각오가 돼 있는 게르만족을 부각시켜 로마인의 나약함을 지적하기도 했다.
요한계시록은 신부의 준비에 관한 사항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예수님과의 관계로 확대한다. 이 상황에서, 강조는 신부가 입게 될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 옷이다. 후에, 새 예루살렘의 환상에서는 신부의 예복에 있는 금과 보석들에 더 많은 관심이 주어질 것이다. 어린 양의 신부에게 빛나고 깨끗하고 세마포 옷을 입도록 허락이 되었다. 깨끗한 세마포 또는 흰옷을 입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한 정결의 과정이다. 또한 혼인식에서 신부에게 합당한 순결이다. 예배와 혼인의 장면들은 부활의 희망의 지칭한다.
혼인의 이미지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이 그에게 충실할 것을 기대하신다는 의미이다. 신부가 자신의 남편에게 충실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피조물과 맺었던 언약과 하나님이 이루실 평화를 연결시킨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장가를 간다. “영원히 살되 공의와 정의와 은총과 긍휼히 여김으로 네게 장가들며 진실함으로 네게 장가들리니”라는 선포로 종결된다(호 2:19-20).
신랑으로서 그리스도와 신부로서의 하나님의 백성, 즉 교회라는 은유는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매우 널리 사용되었다. 흰옷은 하나님 앞에 선 사람의 신분을 가리키는 이미지다. 독자들은 죄는 그들의 옷을 더럽혀서 하나님 앞에 서기에 적합하지 않게 한다고 경고 받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은혜를 입어 어린 양의 피로 그들의 옷을 씻어야 한다. 그와 같이 깨끗하게 하여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된다.
공자는 군자의 강함이 품은 덕을 말했다. “나라에 법도가 있으면 빈천할 때의 지조를 변하지 않고(國有道不變塞), 나라에 법도가 없어도 죽을지언정 뜻을 바꾸지 않는다(國無道至死不變).” 이것이 공자가 생각한 진정한 강함이다. 성도들의 옳은 행실을 상징하는 세마포 옷이 그리스도에 대한 순결의 표시다. 신부에게 옷이 제공된다. 그녀는 그리스도에 대한 진실됨과 충성으로 혼인을 위해 자기 자신을 준비해야 한다.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사람이 인생에서 성공하는 비결은 기회가 다가올 때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렇지 않은가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준비한 왕으로 비유하셨다(마 22:1-14). 왕의 혼인 잔치에 참석하는 자는 예복을 입어야 했다. 한 사람이 예복을 입지 않았다. 두 가지 경우다. 주인에 의해 깨끗한 옷이 공급되었으나 거절한 경우다. 아니면 부주의로 더러워진 것이다. 아무튼 깨끗한 옷의 의미는 그리스도에 대한 회개와 순종을 의미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