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뇌는 새로운 것에 끌리게 만들어졌다. 우리는 새롭거나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면 무의식적으로 주의를 집중한다. 새로운 것에 대한 탐구는 신경세포 사이에 새로운 연결을 만들고 ‘행복 호르몬’이라 불리는 도파민의 분비를 늘린다. 새로움은 옛 것의 자연적인 산물이 아니다. 시간이 가면 새로워지는 것도 아니다. 새로움은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로부터 온다.
‘새로운’에 해당하는 ‘카이노스’(καινός)는 이전에는 알려지지 않은, 전례가 없는, 믿기 어려운 것이 라는 성질상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특징을 표현한다. 성질상 보다 더 우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간적으로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지닌 ‘네오스’와 다르다. 네오스는 중국의 고전 ‘대학’에 아주 잘 나와 있다. ‘날로 새로워지고, 날이면 날마다 새로워지며, 또 날로 새로워져야 한다(苟日新, 日日新, 又日新).’ 카이노스는 앞서 지나간 것과의 차이를 강조한다. ‘새 노래’도 그러하다. 이것은 동일한 사람에게 ‘새 이름’을 주시는 것과 어느 정도 연속성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과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질적인 구별이 있다. 카이노스는 통상 시간적인 새로움이 아니다. 질적인 새로움을 강조한다. ‘아직 사용되지 않은’(마 9:17), ‘특별한’, ‘종류에 있어서 새로운’이라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처음’은 영원하지 않고 잠정적이다. ‘새로운’은 영원히 지속된다. 완전히 새로운 실재다. 처음 세상의 모든 부정적인 것들이 제거된다. 죄로 말미암은 모든 오점이 완전히 제거된다. 새로운 종류의 실존이 될 것이다.
1. 새 창조(New Creation)
창세기의 첫 두 장이 새로운 시작, 즉 처음 창조의 원형이라면 성경의 마지막 두 장은 새 창조 이야기로 환원하도록 한다. 성경의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의 하나님이다. 영구적으로 새로운 것을 행하는 분이시다(사 43:19).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시는 분이다. 그의 새롭게 하는 드라마는 천지창조로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까지 줄기차게 펼쳐진다. 요한에게 창조와 세상의 미래는 그의 메시지의 필수적인 요소다.
앞으로 올 최후의 세상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Platon의 이상의 하늘이나 먼 곳에 있는 파라다이스가 아니라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실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유토피아’의 그리스어 어원을 따지면 ‘좋은 곳’이기도 하고 ‘없는 곳’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성리학이 추구했던 이상 사회는 ‘백성들 모두 도덕군자가 되는 사회’였다.
성경에는 세 가지의 창조가 나온다. ‘태초의 창조’, ‘계속되는 창조’, 그리고 ‘새 창조’다. 태초의 창조로 시간과 공간이 시작된다. 창조는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전개된다.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된다. 모든 창조가 이렇게 하나님 안에서 미래의 완성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근본적인 믿음이다. 창세기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새롭게 조성됨으로 시작된다. 요한계시록은 새 창조로 이야기의 끝을 맺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새 창조에 대한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이 그의 창조 행위로부터 온 것이기 때문에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다.
요한이 본 ‘새 하늘과 새 땅’은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것과 비교해 볼 때, 질적으로 새로운 것을 말한다. 과거의 것보다 더 훌륭한 것이란 뜻이다. 카이노스는 ‘새롭게 변화하다’를 뜻하는 qen에서 유래하였다. 라틴어로 recens다.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패턴을 따른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흔적을 가지고 있었다. 옛 몸의 파괴가 아니다. 카이노스는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의 새로운 버전이 아니다. 질적으로나 본질적인 면에서 변화를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카이노스의 이러한 용례는 특히 신약성경의 종말론적이거나 구속사적인 전환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발견된다.
바울에게서 새 창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이루어진다. 죄에 대해 죽는다.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생명에 이를 때에 새 창조에 참여한다(고후 5:17; 갈 6:15). 미래의 피조물은 썩어짐의 종 노릇한데서 해방될 것이다. 하나님이 일으키신 자들은 영광스러운 변형에 참여하게 된다고 예견한다(롬 8:18-25). 신천지의 핵심 교리는 세 가지다. 6개월간 교육을 한다. 첫 번째 교리는 ‘신천신지’(新天新地) 교리다. 새 하늘과 새 땅, 즉 천국을 말한다. 천국이 땅에서 이뤄진다는 교리다. 이들은 1984년 3월 14일 이만희 교주가 경기도 과천에 천국을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신천지라고 부른다. 이만희가 쓴 ‘천지창조’를 보면, “거룩한 성이 하늘로부터 이 땅의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 즉 신천지에 내려온다고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고대 유대교에서 피조 세계의 재창조 또는 갱신이라는 주제는 이사야 52:17과 66:22에 국한되지 않는다. 최종적인 종말론적 행위로서 유대교의 묵시 문학들에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언급된다. 새 창조는 마지막 환상 주기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 전체를 절정으로 인도한다. 옛 것이 새 것으로 바뀌는 가장 광범위한 변화는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환상들에 나온다. 여기서 새로운 것은 물론 개개인도 종말의 때에 새롭게 변할 것이지만 궁극적으로 우주적인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이다.
2.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다
2005년 8월 개봉돼 관객 1000만 이상을 동원하고 대한민국 영화대상 6개 부문을 수상한 작품이 있다. ‘웰컴투 동막골’이다. 동막골 이야기는 ‘이런 세상, 이런 마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유토피아, 꿈의 마을을 그린 것이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우리가 영원히 꿈꾸어야 할 꿈의 마을이 새 하늘과 새 땅이다. 미래에 이루어진다. 요한계시록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하여 언급한다. 요한계시록은 일곱 교회가 직면하는 재난으로 시작한다. 인, 두루마리, 그리고 대접 심판, 바벨론의 멸망, 재림, 천년왕국, 최후의 심판에 이르기까지 요한계시록에 전개된 모든 단계는 목표가 오직 ‘새 하늘과 새 땅’ 이었다.
최후의 종말론적 대전투가 사탄과 벌어져서 어린 양의 모든 대적들이 패할 때 새 예루살렘이 나타나고, 새 하늘과 새 땅이 창조될 것이다(참조. 벧후 3:13). 구약성경의 새로운 것들에 대한 기대와 일치한다. 새로운 요소는 새 사람의 실현으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우주적 소망에까지 뻗치고 있다. 하나님은 새 질서와 새 세상을 창조하실 것이다. 현 세계와 비슷한 영원한 질서를 가진 물리적 실재의 한 형태가 될 것인지 여부를 알기는 어렵다.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본다. 하나님의 미래의 가장 광대한 예언 환상 중의 하나이다. 다른 선지자들처럼, 요한계시록은 인간의 미래가 세상의 미래를 포함한다고 생각한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영원히 계속될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실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예언을 끝맺는다(사 65:17; 66:22). 속박에 대한 첫 번째 환난이 일어났던 ‘이전’은 잊어지고 마음에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질적인 대조를 이룬다(사 65:18). 성취되기 시작한 이사야서의 예언이 미래의 언젠가 절정의 상태로 성취될 것이라고 천명한다. 이 환상에는 종말 이전의 교회 시대의 특징들은 묘사되지 않았다. 가시적·비가시적으로 위협하는 모든 형태가 부재함을 강조한다.
‘새 하늘과 새 땅’ 관념은 ‘처음 하늘과 처음 땅’ 간의 전통적인 이분법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원래 땅과 하늘을 사람의 영원한 거처로 창조하셨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땅이 죄와 사망 아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악의 결과를 완전히 뒤집는다.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게 한다. 요한이 강조하는 것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것이다. 베드로도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말한다(벧후 3:13).
신천지 이만희는 천년왕국과 ‘새 하늘가 새 땅’이 이뤄지는 곳이 신천지라고 가르쳐 왔다. 1984년 3월 14일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신천지’라고 부르는 것이다. 교리상 신천지 신도들에게 환난, 코로나바이러스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 온 세상에 전염병이 퍼져도 신천지 신도들은 감염되면 안 된다. 하지만 신천지 신도가 먼저 감염됐다. 무차별적으로 코로나19를 퍼뜨렸다. 이만희의 교리가 거짓말이라는 뜻이다.
새 창조는 처음 창조를 새롭게 하는 것인지 아니면 대체하는 것인가. 갱신이냐 대체냐. 옛 것과 새 것 사이에는 연속성과 불연속성이 공존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처음 것이 완전히 파괴되고 새 것으로 대체된다. 새 창조는 옛 창조와 불연속적이다. 전자는 후자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바다가 없다는 요소를 고려한다면, 요한계시록은 최소한 후자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듯 하다. 갱신하는 대응체가 될 것이다. 완전한 새로운 질서가 될 것이다. 약간의 연속성이 있을 것이다. 바울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는’ 것과 ‘신령한 몸’에 대해 말하듯이, 여기서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될지 거의 모른다. 현 피조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새 창조의 미래에 있기 때문에 이 둘은 또한 연속성이 있다. 만물의 최종적이고 전체적인 변화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이미지에 가장 생생하게 묘사되었다.
새 창조에서 요한이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새로운 세상인가 아니면 성도들인가. 새 하늘과 새 땅의 초점은 세상인가 아니면 인간인가. 구원받은 성도들이다. 새 창조에는 부활한 공동체 그 이상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와 관련이 있다. 이기는 자에게 주어지는 약속이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성취된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든 소망과 꿈이 실현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