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여 년 전, 영국 옥스퍼드대학교의 한 강의실에서 시험이 진행 중이었다. 문제는 칠판에 적혀 있었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든 기적에 담긴 종교적이며 영적인 의미를 서술하시오.” 한 학생이 한 줄만 써서 제출했다. “물이 자신의 주인을 만나자 얼굴이 붉어졌도다.” 이런 답을 쓴 사람은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Byron)이다. 생명나무가 주인인 어린 양을 만났다. 생명수 강에 뿌리를 내리고 열매를 맺었다. 생수의 강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창세기는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 그들이 에덴동산의 생명나무를(창 2:9) 먹고 영생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불 칼을 든 천사가 지키도록 했다고 말한다(창 3:22-24). 그 나무로부터 먹을 수 있었다면 아담이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추측건대 그 나무는 그곳에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냈다. 이제 에덴동산과 생명나무는 보좌에서 흐르는 생수의 강과 생명나무로 묘사된다. 새 예루살렘에 강과 길이 서로 나란히 펼쳐져 있다. 그 사이에 생명나무가 있다.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는 성의 주요 도로를 규정한다. 일차 특징은 생명이다.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생명 주심의 현존을 상징화한다. 생명나무는 큰 심판 때까지 누구에게도 이 나무를 만지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따라서 종말의 때에 신실한 자들, 요한계시록에서는 이기는 자들이 생명의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는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묵시적 사고에서, 생명나무는 의로운 자에게 주어질 것이다. 선택받은 자를 위한 것이다. 거룩한 장소, 야훼의 성전으로 옮겨질 것이다.
에스겔서와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임재가 공개적으로 거하는 것을 그리고 있다. 처음 창조에 있는 동산의 확대된 재건이다. 에스겔서의 성전의 일부로 묘사된, 장식된 종려나무와 그룹들은 에덴동산의 상황을 암시한다. 생명나무는 요한계시록에서 5번 사용된다. 생명나무 이미지는 낙원 이미지와 더불어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했을 때 그들로부터 분리된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임재를 상징한다. 잠언에서 생명나무는 생명을 주는 ‘지혜’의 속성과 의로운 삶에 대한 상징이 되었다.
1. 생명나무와 어린 양의 십자가
생명나무의 ‘나무’는 어린 양이 달려 죽임을 당한 ‘나무’와 관련이 있다. ‘나무’를 나타내기 위해 흔히 사용되는 말은 ‘덴드론’(dendron)이다. 하지만 생명나무에 해당하는 ‘나무’는 ‘ξύλον’(크쉴론)이다. 크쉴론은 잘린 나무, 나무로 만든 것, 또는 살아 있지 않는 나무를 말한다. 생명나무는 강가에 한 나무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강의 양편 제방에 일렬로 늘어서 있는 많은 나무를 가리키는가. 집합명사의 단수형인가. 한 ‘생명나무’는 ‘생명나무들’를 가리키는 집합적 언급일 가능성 많다. 에스겔과 요한계시록 모두 집합적 의미의 단수 ‘나무’를 표현한다. ‘강좌우’에서 자라는 것의 묘사와 일치한다. 한 그루가 강 좌우편에 있다. 나무에 관사가 없는 것도 집합적 의미를 한층 더 암시한다. 요한계시록은 에스겔의 많은 나무들을 에덴동산처럼 한 그루의 생명나무로 변경시켰다.
유대인들은 ‘나무’와 ‘십자가’를 구분하지 않았다. 나무에 달리는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는다는 율법의 끔찍한 진술을 적용시켰다(신 21:23). 베드로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나무, 즉 크쉴론이라 부른다. 우리의 죄를 담당하기 위해 나무에 달린 예수님을 하나님이 다시 살리셨다고 선포했다(행 9:30; 10:34). 바울 역시 나무, 즉 크쉴론에 달린 자는 저주 아래 있는 자인데,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저주를 대신 받으시므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하심을 외친다(갈 3:13). 그 나무는 다른 사람에게 생명을 주었다.
요한계시록의 생명나무는 단수형이다. 그러나 아마도 이 단어는 집합적인 의미로 취해졌을 것이다. 에스겔 47:12에는 ‘온갖 종류의 과실나무’는 단수다. 이를 반영하는 에덴의 생명나무도 단수다. 처음 동산에 생명나무는 한 그루였다. 두 번째 동산, 새 예루살렘에서 많은 생명나무가 되었다. 처음 동산은 천지창조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두 번째 동산에서는 전 지역이 포함된 것 같다. 이것은 아르테미스 신전의 배경과 대조를 이룬다. 생명나무와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한 나무 이미지는 아르테미스나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의 우상숭배와 음행에 대한 또 다른 반대 증거다. 죄인들의 참된 피난처는 다산과 생명의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 나무가 아니다.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달린 나무, 즉 십자가다. 여기에 구원이 있고 생명이 있다. 단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이 ‘생명’을 제공하는 ‘나무’가 될 수 있다. 어린 양은 ‘죽임을 당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교가 약속한 것을 구약의 소망들의 성취인 죽임 당한 어린 양이 달린 나무, 즉 십자가만이 전달할 수 있다. 신성시 되는 나무들과 작은 숲은 Greco-Roman 세계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에베소 뿐 만 아니라 서마나 역시 나무 성지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임재의 회복을 가져다온 십자가의 구속의 결과를 언급한다. 십자가 자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생명나무는 과거 십자가에 닿을 내리고 있다. 미래의 영원한 영광 속에서 실제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2. 생명수 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
생명나무는 어린 양에서 흘러나온 생명수 강 좌우에 있다는 것은 아르테미스 숭배에 직접 도전을 가한다. Greco-Roman 세계에서 신성한 나무가 샘 위에 자라고 몇몇 샘들은 치료의 효능이 있다고 알려졌다. 전승들에 나오는 신성한 나무들은 에베소와 서머나 같은 도시들, 그리고 다른 장소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들은 일반적으로 Zeus, 아테나, 그리고 아르테미스와 연결되어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터키 Ephesus에 있다. 신은 반드시 자신의 기반이 될 특별한 신전을 갖고 있다. 그리스 신화의 특징이다. 제우스의 올림푸스 신전, 아폴로의 델피(Delphi)처럼, 그리스 모든 신들은 자신만의 고유영토를 적어도 하나는 갖고 있다. 아르테미스 신전은 원래 나무로 지은 ‘나무 사당’이었다. 신약성경 시대에 아르테미스의 상징은 대추야자였다. 대추야자는 성경에서 ‘생명과 풍요’를 상징한다. 중국인들이 성경을 번역하면서 중동이 원산인 대추야자를 몰라 중국 남부에 서식하는 종려나무로 이름을 바꿨다는 설이 있다. 대추야자 열매는 그야말로 나뭇가지가 꺾일 정도로 주렁주렁 열린다. 때문에 오래전부터 다산의 상징이었다. 아르테미스는 올림포스 12신의 하나다. 다산(多産)·순결·달의 여신이기도 하다. 21개에 달하는 달걀 모양의 가슴이 주렁주렁 달려 있다. ‘생명’을 상징했다. 대추야자 나무는 연 200~250㎏의 열매를 거의 100년간 생산한다. 먹거리가 부족한 사막 사람들에게 대추야자는 당분과 탄수화물 공급원이다. 때문에 사막이나 광야 사람들은 이를 ‘생명나무’라 하여 숭상하고 있다.
일곱 교회는 각각 이기는 자에게 대한 약속으로 끝난다. 이기는 자들에 대한 약속은 22장에 등장하는 종말론적 환상에서 성취된다. 에베소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는 것이다. 상징으로 보인다. 낙원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는다는 정확한 의미는 죄 용서와 그에 따르는 하나님의 친근한 임재의 경험을 묘사하는 장면이다.
생명나무는 길 가운데로 흐르는 생명수 강 좌우에 있다. 생명수 강과 생명나무는 새 예루살렘의 변방이 아닌 중심 지역 한 가운데 있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친교를 전달하는 것이 성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에베소교회의 이기는 자에게 주신 약속은 낙원과 생명나무이다. 낙원은 원래 울타리로 둘러싸인 정원 또는 공원을 묘사하는 페르시아 말이었다. 종교적인 의미를 함축하게 된 것은 유대세계에서다. 마지막 날에 최초의 에덴동산의 복원을 상징했다. 낙원은 원래 페르시아 말로 기쁨의 정원을 뜻하는 말이다. 에덴동산이 기쁨의 정원이다. 2장에서 시작되어 22장까지 생명나무 주제는 계속된다. 이기는 자는 그들의 신실함에 대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는다. 성도들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된다. 최후 에덴에서는 저주가 파기된다. ‘오는 세대의 생명’, 즉 신적 생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어진다.
생명수 강의 발원지는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이다. 생명수는 ‘오는 세대의 삶’, 즉 신적 생명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임재로 인해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친근한 교제에 들어갈 수 있는 생명을 얻게 된다. 요한계시록에서 낙원은 종말적인 상태를 상징하는 말이다. 그곳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 하나님과 백성은 죄가 상에 들어오기 이전에 존재했던 완벽한 교제를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친밀한 임재하심에서 오게 되는 경험을 말한다. 죄 용서함을 묘사한다. 성경의 결론에서 다시 한번 반복되어 나타난다.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임재가 이미 시작되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한다. 그 회복이 미래의 어느 시점에 절정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한다.
유대인의 사고에 따르면, 낙원과 생명나무는 종말의 때에 다시 나타날 것이다. 요나단 탈굼에는 하나님이 의로운 자를 위하여 에덴동산을 준비하였으며, 그들은 이 세상에서 율법의 교리를 행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나무의 열매를 먹게 되었다고 진술한다. 에스겔 선지자는 성소로부터 흘러나오는 강 좌우에 있는 ‘각종 먹을 과실나무’를 보았다(겔 47:12). 유대 묵시 문헌을 보면, 생명나무는 하나님이 자기를 따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생의 상징이었다. 신약성경에서 ‘나무’는 매우 빈번하게 십자가나 생명나무를 가리킨다. 두 이미지는 당연히 서로 연계되어 있다. 생명을 일으키고, 하나님의 생명, 즉 오는 세대의 생명을 상속받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나무,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