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체 중에서 얼굴은 80개의 근육으로 되어 있다. 가장 많은 근육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특별한 기능을 가지고 있다.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해 낸다. 지나간 기억 속의 표정을 재구성해 내기도 한다. 그래서 얼굴을 보면 대충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요, 한 권의 책이다. 얼굴은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프랑스 소설가 오노레 드 발자크가 한 말이다. 미국 오하이오주립대학교 연구팀의 조사 결과, 사람은 얼굴의 각각 다른 근육을 다양하게 조합해 1만6384가지 특유의 방식으로 표정을 설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중에서 35가지만 모든 문화권에서 보편적이고 같은 의미를 표출하는 표정으로 받아들여진다고 한다. 얼굴에 해당하는 ‘πρóσωπον’(프로소폰)의 기본적인 의미는 ‘얼굴, 용모’이다. 광의로는 ‘사람의 나타남, 모습, 형상’이다. 배우의 가면을 의미했다. 얼굴은 우리말의 의미로 그 사람의 ‘얼’이 들어 있는 ‘굴’, 즉 마음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영혼이 거기 담겨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얼’은 영혼을, ‘굴’은 통로를 뜻한다. 그러므로 눈썹으로부터 턱밑까지의 구간은 영혼이 드나드는 통로라고 할 수 있다.
얼굴(面)은 사람(겔 10:14), 동물(창 30:40), 땅(창 1:29), 하늘(눅 12:56), 그리고 물(창 7:18) 등의 정면 표면 혹은 핵심 부분을 가리킨다. 얼굴을 보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얼굴을 아는 것은 인격적 지식을 나타낸다. 얼굴을 어느 구체적인 방향으로 두는 것은 특별한 진로를 따른다는 굳은 결의를 알린다.
프로소폰은 빈번하게 신인동형동성론적(anthropomorphic) 표현들에서 하나님의 용모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얼굴을 드시거나 그의 얼굴을 이스라엘에 비추시면 은혜와 평강을 의미한다(민 6:25-26). 감추는 것은 은혜의 거둠을 의미한다(신 32:20). 형벌의 진노 시에 죄인들로부터 얼굴을 돌이키신다(시 34:16).
사람에 해당하는 ‘ανθρωπος(안드로포스)’는 ‘위쪽으로’라는 의미를 지닌 ‘아나(ana)’와 ‘얼굴’, ‘가면’을 뜻하는 ‘프로소폰’의 합성어다. ‘얼굴’이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표현하기 위한 ‘가면’인 셈이다. 영어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person은 라틴어에 ‘가면’을 의미하는 persona에서 파생했다. 즉 ‘안드로포스’는 ‘얼굴을 위로 하고 하늘을 쳐다보는 존재’라는 의미다.
1. 하나님은 볼 수 없다
인간의 얼굴에는 두 가지 기능이 있다. ‘식별’과 ‘소통’이다. 지구상 68억 인구의 모습이 다 다르다. 서로 구분이 가능하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이 말없는 의사소통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숨긴다는 것은 소통 단절이다. 비유적으로 동의치 않음이나 무관심을 뜻한다. 얼굴을 보는 것은 친밀한 관계를 나타낸다.
고대 사회에서 범죄자들은 왕이 있는 곳에서 쫓겨났다. 왕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에 7:8; 참고. 삼하 14:24). 모세조차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이 허락되어 있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이다(출 33:20). 하나님의 뒷모습은 허락되었다(출 33:23). 그리스 신화에서 인간은 신들을 얼굴로 맞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디오니소스, 일명 바쿠스는 포도주의 신이다. 어머니는 세멜레(Semele)다. 아름다운 처녀 세멜레는, 밤마다 찾아와 자기가 바로 변장한 제우스라면서 제 몸을 걸터듬는 한 건달의 아기를 밴다. 아기를 배게 한 손님이 진짜 제우스신인지, 아니면 겁없는 사기꾼인지 궁금했던 세멜레는 제우스신에게 진짜 모습 보여줄 것을 요구한다. 그러자 제우스가 진짜 모습을 보인다. 제우스의 본 이름은 ‘뒤아우스(dyaus)’, 즉 빛이라는 뜻이다. 인간인 세멜레가 광명의 신을 보았으니 그 빛을 감당 할 수 없을 수 없었다. 세멜레는 Zeus의 온전한 엄위를 보고야 말겠다고 장담하다가 제우스의 번개·광채·열기 때문에 타죽고 말았다.
요한이 ‘그의’ 얼굴을 본다 할 때, 그의 얼굴이 하나님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어린 양을 가리키는지는 불분명하다.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임재 안에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유대교와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온전히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하나님과 중재자 없는 친교를 의미한다. 이 친교를 하는 데 하나의 장애가 있다. 하나님의 위엄과 인간의 한계 차이다. 하나님의 광채를 발하는 위엄은 인간이 하나님을 보고도 살아남을 수 없게 한다(출 33:20-23).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특별한 권리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때문에 그분의 얼굴은 위험을 내포한다. 에덴동산에서 범죄 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여 숨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얼굴 앞으로 나아온 죄인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계 6:16). 모세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뒤에서 볼 수밖에 없었다(출 32:23). 하나님께서는 그의 얼굴을 통해 보는 것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말씀을 통해서 자신을 제시하신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는 자는 죽게 되기 때문에(출 3:6; 20:19) 하나님을 보는 것을 금지 당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 역시 하나님의 음성은 들었으나 그 형상은 보지는 못했다(신 4:12, 15). 죄 많은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면 그는 죽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볼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의 초월성 및 그로 인한 하나님과 인간 간의 현저한 불균형 때문이다. 이것은 흔히 하나님의 불가시성이라는 견지에서도 포함된다.
2. 하나님과 어린 양의 얼굴을 보다
이스라엘 주변의 열방은 신의 얼굴을 우상의 얼굴로 만들어 숭배하였다. 초기 교회는 예수님의 얼굴은 그리지 않았다. 물고기나 어린 양, 보리이삭, 포도넝쿨 같은 상징물로 대신했다. 성전에서 예배자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였다고 할 때 비유적 의미로만 사용될 수 있었다. 신자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추구한다(시 42:3; 슥 8:21-22). 여기서 강조점은 무엇인가. 이목구비가 있는 얼굴이 아니다. 강조점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과 은혜를 확신하는 것이다.
동요 ‘아빠와 크레파스’는 “어젯밤에 우리 아빠가 다정하신 모습으로/ 한 손에는 크레파스를 사가지고 오셨어요”로 시작된다. 늦게 퇴근하는 아빠가 치킨을 사가지고 갔을 때 두 가지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손을 보는 아이와 얼굴을 보는 아이다.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는 신앙과 하나님의 손에 들린 것을 바라보는 신앙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면 하나님의 손의 은혜는 따라오게 돼 있다. 시편 105:4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매일의 과업으로 강조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그의 얼굴을 항상 구하라’고 촉구하신다. 기도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감을 의미한다. 이것이 최상의 관심의 문제다(시 27:8).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임재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돌아보심을 의미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성전에서 특히 하나님을 찾아야 했다.
Greco-Roman 세계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에 그 영혼이 신들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초기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서는 하나님을 보는 특권을 흔히 종말론적인 축복으로 생각했다. 요한복음 1:18에 본래 하나님을,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사람이 없지만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났다고 말한다. 새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최종적으로 ‘그의 얼굴’,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땅에서 ‘하나님의 얼굴’인 ‘성육신 세키나’이다(요 1:14).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에 대하여 획기적인 변화를 제공하셨다.
‘존경’을 뜻하는 respect'는 라틴어 respectus에서 나왔다. 다시(re) 보다(spectus), 즉 '바로 보다'라는 다소 쿨한 뜻이다. 우린 존중하기 위해 그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보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하나님을 바로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을 보다라는 관념은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참된 이해를 뜻한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의 캐치프레이즈가 된다. 종말론적 복으로 간주되었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을 보는 자’로 해석되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수여받은 모든 산 자들 중의 장자’이었기 때문이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고 말한다(창 32:30).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얼굴’을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 즉 직접적인 대면은 종말적인 소망이다. 오직 새 예루살렘에서만 이 소망이 온전히 이루어진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오직 그리스도만 하나님을 보았다(요 6:46).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볼 가능성 있다.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을 본 여러 사람들을 언급한다, 모세와 아론과 나답과 아비후와 이스라엘 장로 칠십 인이 시내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을 뵙고 먹고 마셨다(출 24:10-11). 사람이 자기의 친구와 이야기함 같이 모세는 하나님을 대면하였다(출 33:11). 하나님께서 모세를 자신과 대면하여 말하는 자며 자신의 형상을 보는 자라고 말한다(민 12:8). 삼손의 아버지 마노아는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으리로다”라고 말한다(삿 13:22).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는 가능성은 가장 예외적 가능성으로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주된 사상은 참으로 하나님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다(요 1:18; 요일 4:12). 하나님을 보는 것, 즉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은 성경의 가장 큰 소망의 정점이다. 회복된 에덴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영원히 살게 된다. 하나님의 얼굴을 볼 것이다. 모세는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령이 그들의 성화를 완성하실 때 그의 얼굴을 볼 것이다. 하나님이 그 백성을 호의적으로 보시고 기뻐하실 때, 주의 얼굴을 보는 일은 다가올 시대의 가장 큰 복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