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인체만 해도 그렇다. 어른은 체중의 60여%가 물이다. 갓난아기의 경우 80%가 넘는다. 인체의 절반 이상이 물이다. 물 없는 인생은 상상할 수 없다. 물은 인간과 가축뿐 아니라, 작물을 위한 관개에도 절대 필수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물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다. 아무리 많은 영양분이 있어도 물이 없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물은 영양물질을 녹여 그것을 체내에 원활하게 공급함으로 생명체를 키우고 생존시켜 준다. 그런 점에서 물은 생명의 젖줄이다. 생수는 생명을 유지하고 회복시키는 것과 동어의가 되었다. 영원히 계속적으로 흐르는 물로서 샘물은 풍성하고 억누를 수 없는 자연적인 공급의 원리를 구체적으로 보여주신다. 특히 생수는 요한복음에서 중요하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다소 다른 생명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전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흐른다. 후자는 예루살렘으로부터 흐른다.
성경은 종종 하나님을 향한 영혼의 소망을 묘사하기 위해 갈증이라는 이미지를 사용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라고 노래했다. 찰스 부코스키 시인 ‘그건 어쩔 수 없어 (No help for that)’ 시는 “가슴속에 결코 채워지지/ 않는 자리가 있다”라고 시작한다. 누구에게나 어쩔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渴症)이 있다는 뜻이다.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탄산이나 설탕이 아니라 맹물이다. 맹물처럼 순수하고 무자극적인 것에 익숙해져야 갈증을 느끼지 않듯이 삶도 맹물처럼 맑고 순수하고 천진스러울 때 비로소 지루함과 따분함의 허덕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물처럼 흔한 것도 없지만 물처럼 중한 것도 없다. 성경과 코란 등 동서고금의 경전이 물을 생명의 원천이요, 파멸과 회생의 상징으로 표현한 것도 이 같은 물의 패러독스 때문이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다(렘 2:13). 생수의 강이요 생명수라고 불릴 수 있다. 다윗은 시원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영혼의 목자로 노래한다(시 23:2). 영적인 삶과 내적인 샘은 사마리아 여인에 대한 예수님의 제안에서도 나타난다. 목이 말라 우물물을 구하는 수가 성 여인에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요 4:14). 성경의 샘물들이 가진 중요성의 일부는 우물들이 샘물 근처에 위치했다는 것이다. 수가성 여인은 눈에 보이는 야곱의 우물을 보았다. 예수님은 물이 가득한 샘을 생각한 것이다(잠 8:24).
1. 하나님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주신다
생존 본능만큼 강한 것은 영적인 본능이다. 영적인 본능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능력이다. 목마름을 느끼는 능력이라는 의미다.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한 것처럼 영혼이 하나님과 붙어 있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 하는 본능이다. 영적인 본능이 있는 자가 목마른 자다. 하나님을 갈망한다. 하나님으로 인해 목말라 한다. 은유적으로, 목마름은 영원하신 하나님이 가지신 생명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와 같은 목마름은 하나님과 함께한 생명의 장애물, 즉 죄와 사망이 새 예루살렘에서 부활을 통해 극복되었을 때에 온전히 충족된다.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남아공 작가 나딘 고디머(Nadine Gordimer)의 말이다. “진실이 언제나 아름다운 건 아니다. 아름다운 건 진실에 대한 목마름이다.” 하나님이 생명수 샘물을 누구에게 공급하시는가. 거짓과 세상에 목말라 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리스도에게 향하는 자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수 샘물을 주실 것이다. 새 창조 시에 생명수 샘물은 하나님과 참된 교제 중에 있는 죽임이 없는 생명의 약속을 간직한다.
우리 몸은 60~70%가 물로 이뤄져 있다. 수분이 2%만 모자라도 우리 몸은 갈증을 느끼게 된다. 수분이 3~4% 정도 부족해지면 어지럼증, 피로감, 변비 등을 잘 겪게 된다. 혈액은 90% 이상이 수분으로 이뤄져 있다. 물은 하나님의 복과 영적 원기 회복을 상징한다. 물에 대한 갈망은 영적 욕구를 나타낸다. 요한계시록에 의하면, 생명수를 마신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생명으로의 부활을 의미한다. 이사야 55:1은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고 초청한다. 이사야는 구원을 새 출애굽이며 시온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풍부한 물을 주어진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물이 새 예루살렘으로부터 흐른다. 그곳에서는 생명의 풍요로움이 주어진다.
몸속 물이 부족하면 혈액량이 줄어든다. 이는 혈압 저하로 이어져 어지럼증을 유발할 수 있다. 또, 몸속의 필수 아미노산이 세포 곳곳에 잘 전달돼야 신진대사가 활발해져 피로감을 잘 느끼지 않는데, 이 필수 아미노산을 운반하는 게 체내 수분이다. 수분이 부족하면 피로감을 잘 느끼게 되는 이유다. 하나님은 목마른 자의 갈증을 해소해 주시며 영원토록 솟아나는 생수의 근원이다. 우리는 ‘목마른 자’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도록 도전을 받는다. 목마른 자에게만 유일하게 생명수 생물이 주어질 것이 때문이다.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생명수 생물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생명수 샘물로 이끄는 분은 목자가 되신 어린 양이다. 두 가지 모티브다. 전자는 초대다.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마시라는 초대다. 후자는 생명수다. 이사야의 ‘샘물’은 이제 ‘생명수 샘물’이 되었다. Palestine의 건조한 기후에서 시원한 물을 제공하는 샘물은 원기 회복과 만족을 나타내는 생생한 상징이었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물은 하나님이 주시는 최고의 축복인 영생과 연관 된다
2. 하나님은 생명수를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신다
미국의 작가 엘리자베스 오 코너(Elizabeth O'Connor)는 ‘여덟 번째 창조의 날’에서 하나님이 7일간 세상을 창조하신 다음 날인 여덟 번째 날을 창조의 날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열망이 세상의 갈망을 만나 새로운 창조를 만들어가는 날이라는 것이다. 사실 8일은 세상의 갈망과 나의 열망이 만나는 날이다. 열망이 갈망을 이끌어 가는 날이 바로 여덟 번째 날이다. 일상이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에 맞는 삶이다. 이런 삶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다. 하나님을 찾고 갈망하는 삶이 열망의 삶이다. 손종태는 ‘갈망’에서 ‘갈망은 창조주를 향한 인간의 근원적 목마름’이라고 한다. 이 책에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주신 본질적인 갈망 중 하나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목적, 내 삶의 운명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그것을 찾고자 하는 본능적인 갈망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것을 찾을 때만 진정한 만족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갈증이 날 때 짜릿한 탄산과 달콤한 설탕이 들어 있는 이른바 ‘청량음료’를 마시고 싶은 것은 욕망이다. 욕망을 따르면 오히려 갈증을 더 부추길 뿐이다. 갈증을 해소하는 것은 탄산이나 설탕이 아니라 생수다. 영혼의 갈급함을 해소할 수 있는 것은 생수가 아니라 생명수 샘물에서 마시는 것이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만이 샘물 근원에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수 샘물로부터 자유롭게 마실 수 있는 사상은 이사야 49:10에 뿌리를 두고 있다. ‘생명수 샘물’이라는 모티브가 첨가되어 있다. 요한은 강조를 위하여 마지막에 ‘값없이’를 덧붙인다. 이중의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목마른 자는 ‘대가 없이’ 또는 ‘자유롭게’ 생명수를 마시게 되리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값없는 선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더위에 주리거나 목마르지 않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이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할 것”이기 때문이다(사 49:10).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는 이는 샘물 근원으로 갈 수 있다. 자유롭게 마실 수 있다.
조선 중기의 이언적(李彦迪)이 지은 원조오잠(元朝五箴)의 끝부분에 나오는 구절에서 우물과 샘물을 구분하고 있다. “井不及泉 九仞奚益 學不希聖 是謂自畫(정불급천 구인해익 학불희성 시위자획)”. ‘우물을 파는데 샘에 이르지 못하면 아홉 길을 판들 무슨 쓸모가 있으랴’는 뜻이다. 우물과 웅덩이에 비교해서 샘물은 계속적으로 솟아나 흐르는 특징을 지닌다. 샘물은 단순히 물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다. 물의 풍성함을 대표한다. 시편 74:15은 “주께서 바위를 쪼개어 큰 물을 내시며”라고 억수같은 물과 연관시킨다. 이사야는 “여호와가 너를 항상 인도하여 메마른 곳에서도 네 영혼을 만족하게 하며 네 뼈를 견고하게 하리니 너는 물 댄 동산 같겠고 물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샘 같을 것이라”고 말하였다(사 58:11). ‘근원’은 땅 속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를 의미한다. 샘물을 뜻한다(14:7). 샘물은 우물뿐만 아니라 때를 따라 내리는 비와 대조적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수 샘물을 주신다, 또는 생수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은 시기나 장소와 상관없이 언제 어디에서나 제한 없이 넘쳐흐르는 생수의 복을 주신다는 선언이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목마른 자에게 주시는 생명수는 하나님 및 그리스도와 영원히 교제하는 생명이다. 이 교제는 어린 양의 구속의 죽음을 믿는 믿음과 어린 양의 구속의 사역을 꾸준히 증언하는 사람들이 누리게 된다. 이러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만이 은혜에 근거하여, 또는 ‘값없이’ 물의 샘, 즉 하나님의 구원의 임재로 나아갈 수 있다. 영적인 목마름을 느끼는 능력,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능력, 하나님 아니면 살 수 없다고 말하며 하나님을 목말라 하는 능력이 현대인에게는 부족하다. 영혼은 목말라 죽어간다. 선조들은 달랐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일에 목숨을 걸었다. 영혼이 목말라 죽어가는데도 목마름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영혼 없는 생존 기계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