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니 그들과 함께 계신다

  • 입력 2020.09.08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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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76) 장막(Tabernacle)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하나님은 아담을 고독한 존재로 만드셨다. 고독은 타락의 결과가 아니다. 노르웨이 베르겐 대학 철학교수인 Lars Svendsen은 ‘외로움의 철학’이란 책에서 “외로움의 근간에는 결핍이 있지만, 고독은 다양한 경험, 생각, 감정에 열려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고독한 본성을 주신 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단독자로 세우기 위함이었다. 우리를 유일한 가치이자 인격적 가치로 만드신 것도 인격 대 인격으로 만나기 원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나시고 함께 하시기 위해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온다. 한 특정한 집단을 위함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아니다. 장막이기에 사독계 제사장도 아니다. 사람들 또는 백성들이다. 모든 민족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를 광야의 장막과 연관시킨다. 종말의 성전에 대한 에스겔의 환상에도 불구하고(겔 40-46) 요한계시록은 성전 또는 장막이 가장 우선적으로 상징하는 것은 구조나 규모가 아닌 하나님께서 사람들 또는 백성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만 관심을 기울인다(겔 43:7-12).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 가운데 있다는 것은 레위기 26:11-13이 성취된 것이다. 이 약속은 옛 예루살렘에 주어졌다. 배교 때문에 잃어버린 것이다. 신천지처럼 장막성전이 있으면 천국이고 그 주소가 한국이라는 것은 비상식적이고 터무니없는 해석이다. 강조점은 지상에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다. 하나님과 그의 백성 사이의 밀접한 관계에 있다. ‘사람들과 함께’ ‘그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에게 있다. 세상에선 어디에 사느냐, 어떤 집에 사느냐, 얼마나 크냐, 인프라가 좋으냐에 사활을 건다. 하나님의 장막은 하나님과 어린 양 그 자체다.

1. 하나님의 장막이 하늘에서 내려오다

찬송가 222장은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로 시작한다. 제목이기도 하다. 영어 가사는 ‘God be with you’로 시작한다. 방점이 다르다. 1500년 전까지 ‘God be with you’는 인사말이었다. 그 후 축약형으로 God, b, w, ye를 썼다. good evening의 영향을 받아 ‘good-bye’로 변형되었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는 기원문 또는 기도문이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기원이 아니라 실재가 된다. 텐트처럼 임시가 아닌 영원히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의 장막이 되어 주시는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장막의 모양이나 크기에 전혀 언급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은 하나님과 어린 양이 그의 백성의 성전이 될 것이며 그들은 더 이상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될 것이다. 하늘로부터 들은 큰 음성은 레위기 26장의 말씀이 성취된 모습이다. “내가 내 성막을 너희 중에 세우리니...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니라”(레 26:11-12). ‘하나님의 장막’은 사실상 출애굽 당시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유형화된다. 또한 성막과 성전을 상징했던 ‘세키나’를 번역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영광을 가리킬 때 사용한다.

The Jewish tabernacle and priesthood (1874)
The Jewish tabernacle and priesthood (1874)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하나가 된다. 하늘과 땅이 하나로 결합되므로, 거기서 하나님이 이제 실제로 자기 백성들과 함께 거하신다. 성경 전체는 하나님과의 더 긴밀한 관계를 갈망했다. 구약 성경에서 그것은 장막과 성전에서 펼쳐진 세키나 임재에 집중되었다. 세키나는 두 단계를 거쳐 완성된다. 첫 단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실’ 때다(요 1:14). 요한은 예수님을 성막의 성취로 여기도록 의도한다. 하나님은 진실로 인생 중에 거하시는 분이시다. 신약성경에서 그것은 예수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세키나 임재에 집중되었다(요 1:14). 하늘은 이제 ‘새 땅’이 되었다. 옛 질서의 불행들이 다시는 없을 것이다. 신약성경에서 요한계시록 외에 스케노오를 유일하게 사용하는 경우다.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곳에 사람들이 아들의 영광을 보았다. 둘째 단계는 ‘하나님이 백성들과 함께 있을’ 때다. 하나님과 백성간의 교통이다. 교주 이만희는 자신이 육신을 입고 오신 성령이라 주장한다. 성경에 맞지 않는다. 성령이 육신을 입고 다시 이 땅에 오신다는 예언은 없다. 성령이 다시 성육신하시지는 않는다.

2.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하나님의 장막이 내려올 때 그 장막에 들어갈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이스라엘 백성인가, 아니면 사독계 대제사장인가. 구약시대는 특정 인물들만 접근이 가능했다. 하나님의 임재는 지성소의 언약궤 위에 있었다. 그 지점은 너무 거룩해서 대제사장 외에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다. 대제사장도 1년에 한 번만 속죄일에 백성들을 대표해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장막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함께 하는 대상은 대제사장이 아닌 ‘사람들’이다. 이스라엘도 아니다. 사람들과 함께 있음을 보여 준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하나님을 알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장막은 더 이상 하늘에 있지 않고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이 장막은 더 이상 심판의 근원이 아니다. 이 장막은 성소의 특징을 가진 성 전체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내려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내려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다. 임시 처소로서 텐트가 아니다. 하나님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은유다.

 

하나님의 장막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데 그 모양이 어떠한가. 우주선처럼 생겼을까. 신천지의 정식 명칭은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다. 이만희 교주가 1984년 창설한 교파이다. 신천지는 홈페이지에서 “모세가 하나님이 보여주신 하늘의 형상을 기준으로 이 땅에 장막을 지었듯이, 오늘날의 신천지도 약속의 목자가 영계의 천국을 보고 그와 같이 이 땅에 창설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모세가 하늘 성전 원형을 보고 성막 모형을 지었다. 장막 원형이 내려올까.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장막과 에스겔 선지자가 말한 열두 문이 있는 성을 동일시한다. 차이점이 있다. 하나님의 성은 에스겔의 성보다 천 배나 크다. 천배나 큰 장막이 하늘을 덮으면서 내려오는가.

인류는 오래전부터 거주지 마련에 사활을 걸었다. 거주지는 인류의 정체성이었다. 자신이 사는 집이 자신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집이라는 공간에 안주한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즉 하나님의 장막이 어떠한지 관심이 없을 수 없다. 모양, 크기, 시설 등에 시선을 끌 수 있다. 요한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을 자세히 보았다. 눈을 의심케 하는 일이 일어난다. 그 성 안에는 성전이 없다. 성전이 없다는 말은 장막이 없다는 말이다. 성 전체가 성전인가. 도성이 하나님의 장막인가. 한 때 하늘 도성의 형태가 솔로몬의 성전의 지성소와 같이(왕상 6:20), 정육면체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러나 성 전체가 성전이라는 해석은 요한이 말하는 바와 다르다. 요한은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이라 말한다. 하나님의 장막은 곧 하나님 자신이다.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장막에 하나님과 어린 양이 계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천지의 핵심 교리는 세 가지다. 6개월간 교육을 한다. 첫 번째 교리는 ‘신천신지’(新天新地) 교리다. 새 하늘과 새 땅, 즉 천국을 말한다. 천국이 땅에서 이뤄진다는 교리다. 이만희가 쓴 ‘천지창조’를 보면 “거룩한 성이 하늘로부터 이 땅의 천국 곧 새 하늘과 새 땅 즉 신천지(新天地)에 내려온다고 하였다”고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이에 대한 하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가시적인 하늘 성전이 아니다. 예루살렘이 물리적 성전이 없는 구속사적 이유가 무엇인가. 구약의 물리적 성전이 늘 지향했던 최종적이고 영원한 성전의 형태가 하나님과 어린 양이라는 데 있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바로 성전이다. 요한은 하나님의 장막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이것이 곧 하나님이 사람들과 함께 하신 것이라 한다. 신천지는 이만희가 있는 곳이 천국이라 믿는다. 신천지 신도들은 영어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한다. 천국이 있는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 되고 한국어가 세계 공통어가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어린 양이 새 예루살렘이요 하나님의 장막인데 그 자리에 늙고 무식한 이만희를 앉혀 놓고 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함께 하는 것은 곧 하나님 자신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시편 46: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에서 ‘하나님의 성’은 ‘지극하신 이의 성소’와 병행을 이룬다. 하나님의 성은 새 예루살렘이다. 하나님의 장막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의미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개념에서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과 장막 위에 구름이 내려온 사건을 하나님과 결혼 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 개념이 이제 보다 고양된 방식으로 반복된다. 하나님은 장막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 사람들 가운데 계신다. 그는 실제로 거기에 임재하신다. 실제로 시내 산과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장막을 지쳤다. 하나님의 장막이 광야에 있다는 이미지는 결혼 관계를 함의하고 있다. 19:7-8에서 어린 양과 그의 신부의 혼인을 이해하는 배경의 일부분이다.

시내 산에서 맺어졌던 언약이 이제 비로소 성취된다. 하나님의 장막이 우리와 함께 거한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거하신다. 그의 영광스러운 임재 아래서 내려온다. 일시적 거주를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과 더불어 영원히 함께 하신다. 코로나19로 비대면이 일상이 되었다. 타인에게 말 거는 일조차 힘든 시대다. ‘두려움 없는 복음전도’ 저자 John C. Lennox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과 명예교수는 말한다. “대세를 역행하며 헤엄치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그러나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신다. 우리의 대화를 인도하고 모든 두려움과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우리를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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