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모든 영장류 중에서 울 수 있는 유일한 존재다. 출생 직후의 첫 호흡도 울음으로 시작한다. 이때 눈물은 나오지 않는다. 아직 눈물샘이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태어난 아기들은 아무리 울어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아기들이 눈물을 흘리게 되는 것은 조금씩 주위 사람들을 알아보면서 웃기 시작하는 때부터다. 랍비에게서 있어서 웃음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자기 긍정과 자기 확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눈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은 누구나 때로 눈물을 흘리며 살아간다. 눈물이 흔한 사람도 있고, 박한 사람도 있다. 마음이 여린 사람은 눈물을 안고 산다. 남의 아픔이나 괴로움, 슬픔 같은 걸 그냥 넘기지 못하고 자주 눈물에 젖는다. 눈물은 강한 감정의 표현이다. 대개는 슬픔의 표현이다. 성경에서 눈물은 대개 울음과 불가피하게 연결되어 있다. 눈물이 통곡과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더 자주 등장하고 더 많은 이유들을 가지고 있다.
영국인의 특성 중 하나가 ‘Stiff Upper Lip’이다. ‘단단히 다문 윗입술’이라는 뜻이다. 영국인이 뭔가를 꾹 참고 견딜 때 보여주는 모습이다. 아무리 감정이 북받치고 화가 나도 굳게 윗입술을 물고 참아야 한다고 어릴 때부터 배운다. 우리 민족은 감정 표현을 억누르는 데 익숙하다. 특히 ‘대장부는 눈물을 보여서는 안된다’는 인식이 아직도 굳게 자리 잡고 있다. ‘남자는 평생 세 번 눈물을 흘린다’지만 실상 여자보다 남자의 눈물 양이 더 많다. 먼저 남자는 눈물을 분비하는 분비꽈리세포가 여자보다 커서 눈물이 더 많이 만들어진다. 또 눈물과 가장 연관이 깊은 호르몬도 남성호르몬이다. 울산의대 강릉아산병원 정신과 백상빈 교수는 “남자의 평균수명이 더 짧은 이유 중 하나가 여자보다 덜 울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고 말했다.
1. 모든 눈물이 씻겨 질 날이 있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통치와 사탄적 세력의 통치 사이의 투쟁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고 사망을 제거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승리를 보여준다. 왕권이 확립되었다. 그의 보좌는 우주 밖이 아닌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있다.
익명의 음성의 마지막 말은 사람들에게 인내하고자 하는 동기를 불어 넣으며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신다’는 하나님의 대한 믿음을 갖게 한다. 그 언어는 독자들에게 세상에 있는 그 누구도 환난으로부터 면제되지 못함을 말한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실 때 하나님의 백성들이 누리게 될 유익들을 묘사한다. ‘만물의 옛 질서’의 일부였던 눈물, 사망, 애통, 고통이 이제 지나가 버렸다. 이런 것들은 이제는 역사가 되어 버린 이전 질서에 속한 것일 뿐이다.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눈물’을 중심으로 두 분류로 극명하게 나누인다.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고 하나님과 함께 하는 복을 받는 자들이 있다. 반면 바깥 어두움에 던져지는 자들이 있다. 전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다. 후자는 ‘슬피 울며 이를 간다.’ ‘울다’라는 동사가 ‘눈물을 흘리다’로 번역되기도 한다. 창세기 27:38에 에서가 소리 높여 운다. 히브리서에서는 명백하게 ‘눈물을 흘리다’라고 기록되었다(히 12:17).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은 풀무 불에 던져지고 ‘울며 이를 간다’(마 13:42, 50). 왕의 혼인 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는 사람은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두운 데에 던져지게 될 때 ‘슬피 울며 이를 간다’(마 22:13). 주인이 밤중에 늦게 오리라고 여기고 폭행하고 외식하는 자는 벌을 받게 되는데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고 말씀한다(마 24:51). 한 달란트 받아 땅에 묻어 두었던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긴다.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간다(마 25:30).
Simon & Garfunkel의 노래다. ‘Bridge Over Troubled Water’(험한 세상에 다리가 되어)에는 이런 가사가 나온다. ‘당신이 지치고 초라하다 느낄 때/ 두 눈 가득 눈물이 고일 때/ 내가 닦아 줄게요.’ 하나님의 백성은 이전에 겪었던 시련으로부터 영원한 안식을 받는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하나님이 닦으실 눈물이 없이 살았던 자들은 영원히 슬피 울 것이다. 영원히 눈물을 흐릴 것이다. 눈물은 나트륨 성분 때문에 짠맛이 난다. 그중에서도 분노의 눈물이 가장 짜다. 슬피 울며 이를 갈고 있으니 분노와 고통만 만들어 낼 뿐이다. 분노에 차면 교감신경이 흥분해 수분이 적고 나트륨이 많은 눈물이 나온다. 눈물이라고 해서 모두 순수한 것만은 아니다. ‘눈물의 역사’를 쓴 역사학자 뷔포는 “침묵과 언어 사이에 눈물이 흐른다”고 했다. 눈물은 감동이고 절제지만 격정이기도 하다.
하나님을 뵙는 것은 모세에게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고 말씀하신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으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면 하나님과 함께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신다.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면 이 특권이 이기는 자에게 주어진다. 조선시대는 왕을 알현하고 보고하는 인원은 5명 이하로 제한했다. 이처럼 왕을 알현하는 것은 또는 그의 앞에 나아가는 것은 큰 명예다. 왕이 그의 수고를 치하하고 얼굴에 묻은 얼룩을 닦아 주거나 볼에 젖은 눈물을 닦아 주는 것은 큰 영광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뵙는 것은 에스겔 1장에 묘사된 바와 같은 형태를 제외하고는 전례가 없다.
2. 하나님이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닦아 주시다
하나님의 영원한 왕권이 확립될 뿐만 아니라 복이 임하는 환상이 그의 종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이 영원한 복을 부정의 방식으로 묘사한다. 사람은 생존을 위해 긍정적인 신호보다 부정적인 뉴스에 더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운다. 웃음을 주신다고 하지 않고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 주신다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새롭고 영광스러운 질서를 묘사하고자 한다. 그것이 무엇을 대체한 것인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리가 처한 현재의 상태에서는 거의 경험할 수 없다. 전혀 새로운 것을 묘사하는 방법이다. 이 세상에서는 모든 눈물을 닦아줄 수 없다.
김현승 시인의 ‘눈물’은 네 살 된 아들을 병으로 잃은 아픔을 믿음으로 달래며 쓴 시다. 시인은 하나님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라 그 분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이라고 생각했다. 무등산에 그의 시비(詩碑)가 서 있다. 널리 알려진 ‘가을의 기도’가 아닌 ‘눈물’이 새겨져 있다. 시인은 눈물을 ‘옥토에 떨어지는 생명’이라 말한다. 시의 마지막 부분이다.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라고 노래한다. 하나님이 지어 주시는 ‘새로운 나의 눈물’은 감정적인 눈물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눈물을 닦아 주시는 위로와 평안일 것이다.
요한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하신 약속과 유사한 용어를 사용한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눈물을 씻기신다는 약속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에서 더 깊이 성취된다. 그곳은 사망이 없다. 고통이 사라진다. 죄의 옛 통치는 깨진다. 하나님 자신이 장막에 머무는 임재로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실 것이다. 이사야는 회복된 시온에 대한 묘사를 ‘슬픔과 탄식이 사라지리로다’라고 표현한다. 요한은 거의 같은 언어로 최종적이고 온전한 회복을 묘사한다. 하나님이 ‘모든 눈물을 눈에서 닦아 주신다.’ 더 이상 죽거나 애통하거나 울거나 아프지도 아니할 것이다. A.D. 1세기 Palestine에 휘몰아쳤고, 쿰란과 같은 공동체에 자주 임했던 전쟁, 박해, 살해, 재난을 고려하면, 그 약속의 중요성이 과장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정확히 음녀, 즉 바벨론의 경험과 반대된다.
승리한 성도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밤낮 섬기며 서 있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보좌 가운데에 계신 어린 양이 그들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눈에서 씻길 모든 눈물은 어떤 눈물인가. 과학자들은 세 가지로 구분한다. 기저 눈물(basal tears), 반사 눈물(reflex tears), 그리고 감정의 눈물(emotional tears)이다. 감정이 복받쳐 흘리는 눈물은 단순히 자극을 받아 흘리는 눈물과 성분이 다르다.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볼 때 눈물이 나온다. 감정의 눈물이고 ‘영화 눈물’이다. 영화 눈물과 양파 눈물을 두고 18세기말 프랑스의 화학자 라부아지에가 눈물에 관한 최초의 과학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전자가 스트레스 호르몬인 카테콜아민이 더 많이 함유된 것으로 나타났다. 카테콜아민은 혈관을 수축시켜 심혈관에 부담을 준다. 즉 눈물이 스트레스 호르몬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이 호르몬이 몸에 쌓이면 소화기 질환, 심근경색, 동맥경화가 생기고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가 높아진다. 모든 눈물은 어떤 눈물인가. 슬픔의 눈물이 아니다. 고난과 희생의 눈물이다. 눈물은 땅에서 실패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며 하늘에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으로 인해 땅에서 흘렸던 고통의 눈물이다.
고정희의 시 ‘상한 영혼을 위하여’는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로 시작한다. 이 시에서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는 시구가 있다. 시인은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구원이 하늘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기에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고 말했을 것이다. 성도들이 ‘영원한 눈물, 영원한 비탄’이 없다고 말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굳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언약이 주어진 이후에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진다. 그 안에 속하는 성도들에게 유익이 주어진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에게 주실 평강과 기쁨이 중심을 이룬다. 첫째가 하나님이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시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