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는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하리라

  • 입력 2020.08.04 09:55
  • 수정 2020.08.04 14:35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71) 천년왕국(millenium)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로마 황제 중 최악의 인물을 고르라면 칼리굴라는 유력한 후보 중 하나다. 자신을 신으로 승격시키는 별난 행태를 보였다. 시민 앞에 신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즐겼고, 자신을 모시는 사원도 여러 곳 지었다. 나중에는 자신을 네오스 헬리오스, 즉 '새로운 태양'으로 찬미하기를 요구했다. 64년 여름, 네로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을 로마 도시 방화범으로 지목해서 책임을 덮어씌웠다. 그들이 유일신을 섬긴다며 로마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지 않았기 때문에 노여움을 탔다고 생각했다. 기름을 바른 나무 기둥에 묶어 놓고 불태워 죽이거나, 짐승 가죽을 뒤집어씌우고 굶주린 개의 먹이가 되도록 하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베드로와 바울도 그때 순교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로마 속담이 있다. “로마에 있다면 로마인의 방식으로 살라”는 말이 와전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어딜 가든 그곳의 문화를 존중하였다. 그 사회의 규범을 따랐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 다른 대상을 신격화하는 것은 거부하였다. 황제숭배는 거절하였다. 이로써 그들이 공적으로 지배 세력들에 의해 정죄함을 받았다. 그들의 죽임이 하나님의 대적자들에 의한 부정적인 심판이 실현된 것이라면, 그들의 부활은 하나님의 긍정적인 심판을 표현한 것이다. 목 베임은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지키기 위해 자기 생명을 버린 모든 자들을 대표한다.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죽임 당한 순교자들로 제한하는 것은 아니다. 로마제국은 두 가지 처형 방식이 있었다. 하나는 외국인과 하층민들에게 행하는 악랄한 징벌 방식이다. 십자가 처형과 야수들에게 내어줌이다. 또 하나는 주로 상층민에게 사용되었다. 칼이나 도끼로 참수하는 방법이다. 참수가 아마 순교에 대한 약식 용어였을 것이다.

순교한 이유는 요한계시록에서 종종 반복된다. 예수님의 증언과 하나님의 말씀이다. 예수님을 충성스럽게 증거 한 이유뿐이다. 순교로 끝나는 끔찍한 박해의 와중에서도 예수님과 복음 메시지에 대한 그들의 충성된 증언을 의미한다. 고난 받은 사람들은 마침내 보편적으로 왕 노릇할 것이다. 훨씬 더 오래 왕 노릇할 것이다. 승리를 증명한다. 비유적인 천 년 통치를 위해서뿐만 아니라 영원히 왕 노릇할 것이다. 순교자들은 타협을 거부한 자다. 미지근함을 이긴 자다. 믿음으로 견딘 전체 교회 대표자다. 교회 공동체를 포함하고 있는 집단이다. 모든 시대에 걸쳐 예수님에 대하여 신실함을 지킨 모든 자를 구현한 자들이다. 모든 성도들이 역사의 이 마지막 시기에 나타날 것이다.

1. 순교자는 살아서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리라

28세의 청년 플라톤은 스승이었던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어리석은 대중을 증오하게 된다. 훗날 그가 민주주의를 중우정치로 비판하고 ‘철인정치’를 내세우게 된 결정적 사건이 된다. 지혜로운 엘리트가 지배하는 유토피아다. 플라톤은 통치계급을 3계급으로 나뉜 이상국가를 제시한다. 수호자인 철학자, 국방·치안 등을 담당하는 전사·군인, 생산을 담당하는 시민 등이다. 국가의 목적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참된 정의는 이데아의 세계에 있다. 이데아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철인이다. 플라톤은 철학자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정의 사회라는 주장을 내놓다. 철학자는 이성적이고 지혜롭기 때문에 누구보다 나라를 정의롭게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자는 철인 또는 엘리트가 아닌 보좌에 앉은 자들이다. 순교자들이다. 죽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며 예수님을 믿었던 충성된 신자들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미래에 왕 노릇하는 것은 심판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는 말씀의 성취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은 이 약속을 열둘로부터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로 확대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판결에 동의하고 찬송함으로써 실제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 그들의 증언은 역사의 끝에 그리스도가 불경건한 자들을 심판하시는 근거가 된다.

요한은 보좌에 앉은 죽임 당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할 것이라 말한다. 요한은 환상적인 단계에서 사람들이 부활하여 천 년 동안 사는 생명을 받는 것을 본 까닭에 ‘천 년’ ‘생명 또는 살아서’ ‘부활’ 등의 용어를 채용한다. 요한이 본 대상들과 들은 내용은 환상에서 보고 들은 것이다. 문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되고 상징적으로 묘사되고 전달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살아난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할 곳은 어디인가. 하늘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분명하지 않다. 육체적으로 부활한 성도들이 천 년 동안 땅에서 통치하느냐 아니면 하늘의 영역에서 통치하느냐. 많은 논쟁이 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있다. 서너살짜리 아이들은 상상속의 세계와 현실을 넘나들며 살기 때문에 눈에 뻔히 보이는 거짓말 또는 꾸며낸 이야기를 한다. 아이의 거짓말을 듣는 순간 대부분의 부모는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생각해 따끔하게 혼을 낸다. 그다지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다. ‘세살’과 ‘여든’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일시적이기보다 상징적이다. 구약과 신약에서 ‘천년’이라는 숫자를 이해할 때 문자적·일시적 해석과 상징적·영적 해석 두 가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는 일시적인 은유적 용례다. 또 하나는 영원적 은유다. 언어는 뜻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이중적 성격을 띤다. ‘천 년’이라는 기간을 메시야 통치 기간이란 개념에 비추어 볼 때, 그 기간이 반드시 천 년이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천 년 동안의 삶의 조건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다. 다만 누가 그 가운데서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사실만 있을 뿐이다.

2.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노릇하리라

요한은 천년왕국의 생활상은 언급하지 않는다. 단지 그곳에 누가 참여할 것인가에 대해서만 진술하고 있다. 보좌에 앉은 자요, 심판의 권세가 있는 자요, 순교한 자들이다. 그들은 천년왕국 동안 심판과 통치의 기능을 행사할 부활한 순교자들이다. 천 년 통치는 죽은 성도들의 영혼이 ‘살아서’ 그리고 교회 시대 동안 시작된다. 그들은 제사장과 왕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한다. 요한이 다른 곳에서 대상을 확대한다. 그 나라의 왕 노릇을 할 자는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되고 이긴 모든 성도들에게 의해 공동으로 나눌 것이라고 천명했다.

천년왕국을 가리키는 millenium은 ‘천(千)’을 뜻하는 라틴어 mille와 ‘년(年)’을 뜻하는 annus에 근거한다. ‘천 년’에 해당하는 'civlia e[th‘(킬리아 에테)로부터 유래했다. ‘살아서 천 년 동안 왕 노릇한다’고 할 때 방점은 ‘살아서 그리고 왕 노릇하다’이다. 천년이 문자적이냐 아니면 영적이냐, 재림전이냐 후냐는 그다지 목숨 걸고 따질 문제가 아니다. 1,000은 10의 세제곱(the third power)이다. 이 숫자가 여기서 비유적으로 사용되었다면 그것은 단순히 상당히 긴 시대(long era)를 나타낼 수 있다. 최소한 이상적인 시대(an idea epoch)를 상징한다. 역대상 16장은 다윗이 아삽 사람들에게 언약궤에서 찬양하기 위해 세 가지 유형의 노래를 작곡하라고 말한다. 칭송(petition), 감사, 그리고 찬양이다. 시편을 지배하는 세 가지 유형들이다. 시편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천 대에 걸쳐 명령하신 말씀’인데(대상 16:15), 그 언약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며 ‘영원한 언약’과 동일하다고 노래한다(대상 16:17; 시 105:8-10).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성도들이 장차 받을 고난인 ‘열흘’간의 짧은 시련을 견딘다면, 죽도록 충성하는 자에게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쓰고 ‘천 년’ 통치라는 상을 받을 것이다. 인내(忍耐)의 忍은 심장(心)에 칼날(刃)이 박힌 모습을 본뜬 글자다. 칼날로 심장을 후비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바로 인내다. 유만주(兪晩柱)가 ‘흠영(欽英)’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는 감인세계(堪忍世界)에 태어났다. 참고 견뎌야 할 일이 열에 여덟아홉이다(我輩旣生於堪忍世界, 則堪忍之事, 十恒八九).” 감인(堪忍)은 참고 견딘다는 뜻이다. 사람이 한세상을 살아가는 일은 참아내고 견뎌내는 연습의 과정일 뿐이다. 그것으로 끝나는 허무한 세상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현재의 고난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한 영광이 있다(롬 8:18). 고난은 날(日)인데 통치는 해(年)로 주어진다. 고난의 열흘이 영광의 천년으로 보상받는다. 환난은 잠시며 가벼운 것이다. 영광은 영원하며 크다(고후 4:17).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주 샬롯에 ‘Billy Graham 목사 기념도서관’에는 루스 그레이엄 사모의 묘지가 있다. 소박한 비석의 글귀가 있다. “End of construction. Thank you for your patience. 인생의 공사가 이제 끝났네요. 당신이 인내해 주신 것 감사해요.” 공사 중인 자신의 인생을 인내해 준 것에 대해 감사한 것이다. 로마서 5:3은 ‘환난은 인내를 이루다’고 말씀한다. 환경이 척박하고 처한 상황이 어려워도 더 열심히 일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삶을 가리켜 ‘ὑπομονή'’(휘포모네), 즉 인내라고 선언한다. 사자성어로 소굴대신(小屈大伸)이다. 조금 굽혀 크게 편다. 잠욕구영(暫辱久榮), 잠깐 욕되고 오래 영예롭다. 조금 굽히고 잠깐 욕됨을 참아야 비로소 큰일을 할 수 있는 경륜과 역량이 깃든다. 그리스도인은 잠깐의 고난과 천년의 왕 노릇을 맞바꾸는 자가 아니다.

성도들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다스릴’ 약속은 성도들에게 권세가 주어질 것이라는 약속과 그리스도가 성도들에게 자신의 보좌에 함께 앉을 권리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성취다. 대한민국 헌법 제1조는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국민 주권(popular sovereignty)으로 시작한다. 국민이 다스리는가. 국민이 뽑은 소수의 대표가 다스리는가. 정치체의 규모가 일정 정도 이상이 되면, 이와 같은 대의정치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하늘나라는 성도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한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