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칼럼】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사는 사람은 영원히 아름답다

  • 입력 2020.05.12 09:42
  • 수정 2020.05.12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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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59) 보호(protection)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고대 세계에서 인침은 소유권과 보호 특권을 의미했다. 신들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인침을 행하는 자에게 특별한 권한이 주어졌다. Greco-Roman 세계의 수많은 이교 숭배들에서 숭배자들은 자신들이 신에게 속해 있음을 표시하기 위하여 인침을 받았다. 144,000이 인침을 받은 것은 그 이상이다.

십사만 사천은 요한계시록 6장 결론에서 던진 질문의 대답이다.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누가 설 수 있는가. 오직 하나님의 인을 맞은 종들이다. 그 수가 144,000명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심판 중에 보호를 받을 것이다. 문자적인 이스라엘을 묘사하지 않는다. 요한 당시 대부분의 12지파는 유명무실했다. 기대는 했지만 재구성은 불가능했다. 하나님의 종들이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시련의 때에 성도들을 어떻게 지키시는 지를 설명한다. 인치심의 배경인 에스겔 9장에서 표를 그리는 것, 즉 인침을 받는 것은 다가오는 진노에서 보호를 받는 기능을 한다. 그 진노는 바벨론에 의해 야기된다. 표가 없는 충성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로 인해 고난을 받는다. 요한계시록에는 최후의 심판과 상의 수여 앞에 일어난 일이다. 144,000명은 하나님의 인을 받은 하나님의 종들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종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그들이 구원받은 공동체 전체를 구성함을 시사한다. 하지만 그들은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다.

유월절 당시 히브리 사람들은 문에 있는 어린 양의 피로 된 표식이 있었기에 재앙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에스겔 9장과 14:12-23처럼 이스라엘 가운데 남은 의인들을 물리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표를 그리는, 즉 인침을 받는다. 할례는 옛 언약 아래서 그런 인의 역할을 했다(롬 4:11). 하나님의 성령은 새 언약 아래 하나님의 백성을 자신의 소유로 인 치신다(엡 1:13-14). 요한은 인침을 받은 자를 본 것이 아니라 들었다. 144,000명의 환상을 본 것이 아니다. 에스겔 9:6의 표도 인간의 눈에 보이는 표를 의미하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은 에스겔서와 같은 의미로 그 말을 사용했을 것이다. 요한 인침을 받은 수가 정확하게 144,000이라는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그후 보려고 하였다는 것을 예상한다. 정확한 것은 그가 본 것이다. 셀 수 없는 많은 무리다. 이 환상은 보다 유대적 용어로 표현한 것이다. 동일한 그룹을 나타내기 위한 의도이다.

인은 다른 모든 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칙령들을 법적으로 인증하는 표시다. 자신의 것에 표시를 하는 도구다. 인을 받은 자들은 신구약에서 모든 성도를 나타낸다. 이 인은 어린 양과 하나님의 이름이다. 믿음으로 이기는 모든 이들에게 약속된 선물이다. 짐승의 표와 정반대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소유권과 보호를 상징한다. 144,000의 인침의 주된 목적은 무엇인가. 다가올 심판에서 믿는 자들이 보호될 것임을 확신시켜 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인은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뜻이다(딤후 2:19). 소유권은 보호를 수반한다. 인침은 보호를 수행하는 방법의 하나다. 가인이 받은 표나 바벨론 유수 이후에 생긴 teffilin, 즉 성구함은 가시적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은 상징적이다. 비가시적이다. 하나님에 대한 헌신이 표식 혹은 인으로 발달되었다. 대제사장은 황금으로 패를 만들어 그 위에 “야훼께 성결”이라고 새겨서 관 위에 맺다.

어린 양이 인을 떼는 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에겐 심판의 ‘인’을 떼는 것이다. 구원받는 자들에겐 하나님이 그 인을 붙이신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심판을 위하여 인침을 받는다.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구원을 위하여 인을 받는다.

1. 하나님의 소유와 보호

처음 네 환난 중에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이 보호하신다. 인간은 지성과 감정, 그리고 의지의 측면에서 완전하지 않다.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 불안하고 조그만 일에도 상처를 받는다. 계획을 세워도 끝까지 가지 못한다. 반면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신다.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 인내하라고 권함을 받는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인을 치신다. 환난 중에서 그들을 보호하실 것이다. 성도들은 미래의 하늘의 상을 받을 것이라는 약속을 받는다.

요한은 출애굽기와 에스겔서의 표를 염두해 두었을 것이다. 고난과 박해에서 물리적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과 구원을 보호하는 것이다. 인침을 받음으로 어떤 효과가 있는가. 스트레스가 부정적인 역할을 하든 긍정적인 역할을 한다. 중요한 것은 스트레스가 어떤 결정적인 ‘신호’라는 것이다. 기존의 자극을 피해야 한다는 신호, 혹은 자극으로부터 무언가를 배우라는 신호, 내 삶을 돌아보라는 신호일지도 모른다. 환난은 신호다. 두 가지 반응이 있다. 믿음으로 반응할 수 있다. 믿음이 강해질 수 있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사탄의 세력이 해할 대상은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이다. 신불신자 모두 물리적 환난을 당한다. 전자는 정결케 한다. 후자는 마음을 완악하게 만든다. 하나님을 대적한다.

“인간은 일어난 사건 때문이 아니라 그 사건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철학자 에픽테토스의 말이다. 인침을 받는 사람은 땅에 임하는 심판에 대한 시각을 달리한다. 사건 배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다. 현재의 고난 속에 장차 영광을 바란다. 육체적 안전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인침을 받았다는 건 믿는 자들의 보호와 구원을 말한다. 144,000을 구원의 티켓으로 여기지 않는다. 제한된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그 인이 필요한 것이다. 144,000명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름이 ‘이마에 기록된’ 사람이다. 어린 양의 피로 속량함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은 충성되게 따르는 자를 보호하신다. 요한계시록 전체에 일관되게 흐른다. 핵심 주제다. 아무런 조건 없이 단순히 그들은 ‘종들’이다. 하나님의 종들이다.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보호를 받는다. 모든 신자들 혹은 증인들을 나타낸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말씀이다. “네가 나의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또한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니”는 말씀이다. “오직 이마에 하나님의 인침을 받지 아니한 사람들만 해하라.” 인과 나팔과 대접 심판 속에서 구체화된다. 구원받지 못한 자에게만 심판이 임한다. 하나님의 인 치심을 받은 자는 제외된다.

 

2. 인침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보호를 받는다

요한이 ‘수’를 들은 곳이 두 곳이 있다. 본 것(see)이 아니라 들었다(hear). 144,000과 마병대 2억이다. 전자는 영적인 전투를 위해 준비된 하나님의 종들이다. 하나님의 군대다. 예수님을 따르는 군대다. 후자는 세상 군대 숫자다. 하나님의 군대는 세상 군대에 열세다. 압도당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을 맞은 자들이 반드시 이길 것이다.

인침을 받는 것과 보호를 받는 것은 동전양면과 같다. 땅에 거하여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다. 육체적인 안전이나 박해에서 예외가 아니다. 심판에서 보호다. 둘 다 채워지는 것이 강조된다. 순교자의 수가 채워질 것이다. 인침을 받은 자도 지파별로 인침을 받기에 채워진다. 하늘에서 내려온 성 예루살렘의 길이와 너비와 높이가 각각 12,000스다디온과 성곽은 144규빗이라는 숫자는 거룩한 공동체를 가리킨다. 숫자는 상징적이다. 12는 완전수다. 1000 역시 완전수다. 완전함을 강조하는 이중적 방식이다. 교회가 이스라엘 유업을 계승할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강조해 준다.

이만희는 유재열의 장막성전, 백만봉의 재창조교회 같은 종말론집단의 신도로 있으면서 종말론 교리를 터득했다. 그 핵심은 요한계시록의 자의적 해석이다. 1980년 창립된 신천지는 앞선 종말론 종교처럼 최후의 날을 특정 날짜로 못 박았다. 1987년 9월 불발, 1991년 역시 불발하자 날짜를 특정하기보다 14만4000명이란 숫자가 채워지는 날로 삼았다. 그래서 6개월 동안 믿게 하는 핵심교리가 144,000명 교리다. 144,000명만 제사장 권을 받아 세계를 다스리며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영생을 한다고 한다. 인생 최대의 꿈이요 목표다. 상징과 비유로 가득한 요한계시록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기이한 결론을 얻게 된다. 신천지 신자만 이십오만명이 넘는데 일부는 구원받고 나머지는 구원을 못 받는 모순이 발생한다. 신도 수가 이를 넘어서자 교주의 축복을 받고 순교자들의 영과 ‘신인합일’을 이뤄 1000년 이상 죽지 않고 육체영생을 누리게 될 신도의 수로 바꿨다. 인을 맞는 방법도 제시한다. 이만희를 구원자로 믿어야 한다. 실적을 쌓아야 한다. 이 교리는 유재열한테 배운 12지파 144,000명 교리다. 신도들을 혹사하고 있다.

144000명은 보호와 죽임을 당한다. 아이러니하다. 진노에서 보호받는다. 악한 원수들에 의해 박해에 노출된다. 하나님의 진노에서 보호를 받는다. 짐승의 진노에서는 보호를 받지 못한다. 인과 나팔과 대접 심판을 받는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박해를 겪는다.

‘왜 많은 미국 대통령이 희망차게 시작했다가 실망 속에 끝을 맺나’라는 질문에 하버드대 교수 출신 Elaine C. Kamarck는 ‘대통령은 왜 실패하는가’는 책에서 간결하게 답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서 중요한 부분을 소홀히 취급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은 실제로 무엇이 중요한지 깨닫도록 독자를 이끌어 간다. 땅의 것이 중요한지, 아니면 하늘의 것이 중요한지. Lothar J. Seiwert는 ‘단순하게 살아라’의 저자다. 그는 삶을 중요한 일과 급한 일을 축으로 4개 범주로 나눈다. 중요하고도 급한 일, 중요하지만 급하진 않은 일, 중요하진 않지만 급한 일, 그리고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일로 분류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정작 가장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투자하는 건 중요하지도 급하지도 않은 일이란 것이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영혼은 보호하신다. 혹독한 고난은 허락하신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신다. 눈동자같이 지켜 주신다. 신약성경은 이 문제에 상당한 지면을 할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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