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의 고요함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된다

  • 입력 2020.05.26 07:58
  • 수정 2020.05.26 2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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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61) 고요(calm)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말은 생각과 감정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인간의 가장 깊은 감정은 대개 말이 아닌 고요함 속에 자리한다. 고요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의미와 가치를 함축한다. 종종 백 마디 말보다 침묵이 더 무겁고 강렬하게 받아들여진다. 어린 양이 마지막으로 일곱 째 인을 떼자 ‘하늘이 반시간쯤 고요’해 졌다. 땅이 고요한 것이 아니라 하늘이 고요하다. 하나님의 심판의 기원이 하늘 성전이다. 땅의 영역이 배제된 것은 아니다(참조. 시 76:8). 유대교 전통이다. 다섯 번째 하늘에서 천사들이 밤에는 하나님을 찬송한다. 낮 동안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찬송하는 것을 하나님이 들으시기 위해 조용해진다고 주장한다. 요한계시록에 천사들의 찬송이 잠시 중단되었다고 언급한다. 하늘이 고요하다. 하나님의 행동을 숨죽이며 기다린다. 기대가 담긴 침묵이다. 최후의 심판이 행해진다. 성도들의 간청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다. 기도의 응답을 위한 고요함이다. 이 고요함은 점강법(anticlimax)의 역할이 아니다. 드라마에 서스펜스(suspense)를 더한다. 어린 양의 승리는 죽음을 통해 얻어진다. 그가 허락하신 구원은 부활에서 절정에 이른다. 하늘이 고요할 때 다른 사람들의 폭력에 의해 고통을 당했던 순교자들의 기도가 응답된다.

고요할 뿐 유일하게 내용이 없다. 나팔과 대접 재앙이 일곱 째 인의 실제 내용인가. 고요함은 아무런 내용이 들어 있지 않음(emptiness)이 아니다. 심판을 나타낸다. 일곱째 인에는 ‘아무런 내용이 없다’라고 할 수 없다. 일곱 나팔로 채워져야 한다고 이해해서는 안 된다. 관련된 구약 본문이나 유대 문헌 중 어느 곳에서도 고요함에 내용이 없다는 암시가 전혀 없다. 고요함은 극적인 중단이다. 인 심판 환상의 완료이다.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일곱 째날 안식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쉬시는가. 계시의 중단인가. 역사의 과정에 나타난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비밀스러운 목적의 온전한 계시에 대한 반응인가. 역사의 끝에 있을 인간의 경외에 찬 침묵인가. 그리스와 로마의 예배자들은 기도가 드려질 때 침묵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배자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온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다. 자신의 전통에 속했던 경외의 고요함을 준행했다. 초점이 변하였다. 더 이상 제국의 신들에게 경배하지 않는다.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 양께 경배한다.

1. 고요함은 최후의 심판이다

유대인 제사 의식에서 기도하기 전 준비 행위로 갖는 의식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제사장의 속죄 제사 또한 고요함 속에 드려졌다. 유대 전승에 따른 것이다. 지상의 희생 제물은 고요함 가운데 드려진다. 하늘의 제물도 마찬가지다. 하나님 앞에서 특별히 기도문의 특정 어구들을 낭송하는 동안 침묵해야 한다(시 62:1; 합 2:20). 그리스 전통에서 침묵은 때로 기도의 준비 의식이었다. 요한은 고요함 뒤에 순교자들의 향과 기도로 실제 제사 드리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천사들이 조용해야 성도들의 기도 소리가 들리는 것은 아니다. 고요함은 경외의 표시로 여긴다.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찬송하던 천사들이 찬양을 멈추고 악한 자들에게 최후의 심판을 선언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조용해졌다. 최후의 심판을 간구하는 성도들의 기도의 응답이다. 하지만 심판이 시행되기 전과 후에 잠잠해진다. 두루마리는 일곱 인을 모두 뗄 때까지 펼칠 수 없다. 종종 고요함을 그 뒤에 이어지는 일련의 나팔 심판을 좀 더 인상 깊게 하려는 극적인 휴지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다. ‘고요함’에 해당하는 ‘σιγή’(시게)는 어떤 사람이 말하지 않기로 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일상적이고 비신학적인 방법에 사용된다. LXX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고대의 한 견해에 의하면, 하나님의 본질은 시게이며 오직 침묵으로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54세에 달한 제갈량이 여덟 살 아들에게 내린 문장이 ‘계자서(誡子書)’ 가장 빛을 발하는 가르침이다. “무릇 군자(君子)는 고요함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고요하지 않으면 먼 곳에 이르지 못한다(夫君子之學 靜以修身, 非寧靜無以致遠)”고 말했다.

구약성경에서 고요함이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다. 한나의 기도다. 종말론적 소망이 표현된다. “악인들을 흑암 중에서 잠잠하게 하시리니”(삼상 2:9). 엘리야는 크고 바람, 지진, 불을 만났으나 하나님이 계시지 않고 세미한 소리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만난다(왕상 19:11-12). 기도와 고요함에서 절정에 이른다.

고요함에 두 가지 핵심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심판을 숨죽이며 기대하는 것이다. 향과 성도들의 기도가 드려질 때다. 하늘에서 의식적인 고요함이 있었다. 고요함은 직접적으로 제단에서 모든 성도들의 기도와 합하여 향을 드리는 행위로 인도한다. 땅에서 고난 받는 성도들의 기도가 들려지기 위함이다. 하늘에서 끊임없이 들려진 찬송이 중단된다. 하늘이 반 시간쯤 고요해진다.

2. 하나님의 심판을 기다리다

하늘이 고요하는 동안 하나님은 활동하신다. 하나님과 대화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고요함은 무념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불의를 냉철하게 직면함과 동시에 그 불의를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이다. 이런 유머가 있다. 어느 성악가가 노래를 부르다가 숨이 막혀 죽었다. 이유를 알고 보니 악보에 쉼표가 없었다고 한다. 악보의 쉼표도 음악의 일부다. 악보뿐 아니라 문장에도 쉼표가 필요하다. 쉼표 없이 사도신경을 외우면 숨이 넘어갈 것이다. 쉼표가 없으면 감동의 느낌표도 사라진다. 하늘의 고요함이 없었다면 숨이 넘어갔을지 모른다.

고요함은 심판이 언도되는 하늘 성전 및 희생 제단과 관련이 있다. 고요함의 의미가 더욱 강조된다. 구약에서 동일하게 사용된 부분과 연결된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의미,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는 감정, 말 없는 고요함에 역설적으로 내포된 수많은 말, 표현되는 말보다 더 중요한 의미는 내면에 남아 있다. 고요함이 있는 그곳에 가장 많은 말이 남아 있다. 고요함을 이해하기 위한 인내심은 희박해졌다. 촉박한 시간 속에 고요함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말의 부재를 불안해한다. 잠시의 쉼표가 어색해 불필요한 언어로 메운다. 고요함 뒤에 이어질 진지함이 부담스러워 가벼운 말로 감추려 한다.

구약성경 저자들은 ‘고요함’을 하나님의 행동의 임박함에 대한 예견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으로(사 4:11; 합 2:20), 또한 임할 하나님의 심판에 기이한 두려운 외경으로으로 본다. 어느 누구도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심판의 어마어마한 공포가 바로 그 고요함이 전하려는 요점이다. 진노의 큰 날에 있을 징조들이 주어진 후, 마지막 인을 뗄 때 고요함은 하나님의 심판이 곧 있을 것이라는 긴장감 있는 기대 같이 보인다. 재앙에 대한 공포가 아니다. 최후의 심판 이전이나 이후에 있는 고요함이다. 고요함이 최후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다. 최후 심판이 하나님이 하늘 성전에서 행하신다.

유진 피터슨은 “잠잠히 하나님을 바라는 침묵은 창(槍)끝으로 바위를 뚫게 할 만큼 강력한 것이며 불순종과 의심의 돌짝밭을 뚫고 내려가 견고하고 조용한 하나님의 말씀에 도달하는 통로가 된다”고 말했다. 히틀러도 전략적 침묵의 대가였다. 군중 앞에서 5분씩 가만히 있다 군중이 잔뜩 신경을 집중하면 그제야 말을 꺼내곤 했다. 다섯 미국 대통령의 연설문을 쓴 James Humes는 ‘링컨처럼 서서 처칠처럼 말하라’에서 “침묵이 말보다 소리가 크다”고 했다.‘고요’는 전략적 침묵은 아니다. 구약 배경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고요함은 극적인 심판과 연결되다. 고요함은 심판에 대한 반응이다. 어느 누구도 말로써 하나님의 심판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그 고요함이 전하려는 요점이다. 일곱째 인이 바로 이러한 심판 사상이다.

히브리어에는 하나의 단어가 ‘침묵을 지키다’와 ‘파괴하다’라는 의미를 모두 포함한다. 고요함과 멸망을 모두 함축한다. 고요함은 때로 신적 현현의 전조다. 고요함의 한자는 침정(沈靜)이다. 고요함에 잠기는 것은 입 다물고 침묵한다는 말이 아니다. 뜻을 깊이 머금어 자태가 한가롭고 단정한 것이야말로 참된 고요함이다. 성경에서 고요함은 광범위한 영역의 감정, 태도, 상태 등을 표현한다. 고요함은 존경과 경외(욥 29:21; 합 2:20)을 표현한다. 하나님이 하늘 성전에 계시기에 온 땅과 육체는 그 앞에 잠잠해야 한다. 잠잠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요한계시록에서는 여기서만 고요함이 임한다. 기도가 제단에 드려지기 전이다. 하나님의 현현에 대한 일반적인 언급과 다르다. 아마도 진노의 날 이전의 짧은 기간의 슬픔을 가리킬 것이다.

스위스의 작가 Max Picard는 ‘침묵의 세계’에서 고요함을 인간의 가장 탁월한 미덕이며 하나님의 인격을 만날 수 있는 ‘신비의 문턱’이라고 비유했다. 고요함은 인간과 하나님이 공유하는 영역이며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고요의 문’을 열라는 것이다. 하늘의 무리들이 사건들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며 숨죽인다. 경외심과 두려움을 의미한다. 천사들은 하나님을 찬양한다. 때로 경의의 침묵으로 엎드린다. 고요함 자체가 예배의 형식이다.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에게 심판을 내리신다.

‘가장 아름다운 인간은 고요한 존재이다.’ 18세기 독일의 미술사학자 빙켈만이 말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 참된 아름다움과 고요함을 확인하라고 했다. 요한은 어린 양이 일곱째 인을 뗐을 때 하늘의 고요함에서 아름다움을 경험하게 된다. 하늘에서 천사들과 장로들과 생물들이 크게 그리고 쉼없이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찬양을 드린다. 극적인 고요함은 대조를 이룬다. 신학적 적절성이다. 중요한 극적 효과를 창출한다. 일곱째 인에 포함한 사건은 없다. 하늘만 고요할 뿐이다. 아무런 내용이 들어있지 않다고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 간단함 때문에 일곱째 인이 세 일곱 재앙 시리즈 중에서 최후의 심판을 보여주는 첫 번째 언급으로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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