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65) 새 노래(a new song)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로마에서는 대형 종교 행사부터, 전쟁 출병·개선 행진, 검투사 경기 등 국가 주요 행사마다 대규모 악단을 동원해 흥겨운 곡 연주로 참가자들 사기와 관객들 흥을 돋웠다. 음악으로 분위기를 띄웠기 때문에 ‘노래를 시작하다’를 뜻하는 라틴어 incanere에서 ‘분위기를 조성하다’인 incentivus(잉첸티부스)가 나왔다. 라틴어로 ‘~에 들어가다, 시작하다’를 뜻하는 ‘in’과 노래 부르다의 ‘canere’를 합친 말로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띄우다’를 의미했다. Incentive는 성과급이다. 새 노래는 무엇인가. 어린 양께 드린 노래다. 승리자를 위한 노래다. 새 노래는 모두 승리, 환희와 관련이 있다. “노래가 당신을 구원할 수 있나요?” John Carney 감독의 영화 ‘비긴 어게인’의 원래 제목이다. 영화에서는 상처받은 두 주인공이 노래 덕분에 다시 가슴 뛰는 인생의 꿈을 되찾는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다. 시편 전체에서 ‘새 노래’는 창조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심에 대한 찬양이다. 주제는 구원이다. 새 노래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도록 성도들을 부르시는 사실에 대한 찬양의 시다. 새 노래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에 대해 찬양한다. 이 찬양은 자주 현악기를 켜며 부른다. 승리의 찬가다.

 

누가 새 노래를 부르는가. 두 가지 견해를 가질 수 있다. 땅에서의 장면이냐 하늘에서의 장면이냐. 전자는 하늘 군대, 즉 천군천사의 노래로 본다. 천사인지 구속받은 자들의 무리인지 알 수가 없다. 장로들과 생물들과 함께한 천사들일 것이다. 후자는 구속받은 자들의 노래로 본다. 144,000이 부를 구원의 노래다. 구원을 경험한 그들만이 구원의 찬양을 하나님 앞에서 부를 수 있다. 구속받은 자들은 노래를 배워야 한다. 노래를 부르는 자들은 하늘 군대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그 노래를 배우는 자들이다. 144,000은 구원받은 이들의 전체 무리다. 앞으로 오게 될 화를 대비하여 인침을 받았다. 이마에는 어린 양과 아버지의 이름이 쓰여 있다. 표는 일차적으로 기본적인 충성을 나타내는 상징이다. 이 표를 가진 자들은 스스로 어린 양과 희생적인 사랑의 삶에 헌신했다. 이긴 자들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자신의 새 이름을 그들 위에 기록하였다.

1. 보좌 앞에서 부르는 새 노래

언제 새 노래를 부르는가. 새 노래는 이제도 앞으로 영원히 부를 노래다. 배워서 부를 노래다. 배워 영원히 부를 노래다. Mahatma Gandhi는 “내일 죽을 것처럼 살고 영원히 살 것처럼 배우라.”고 했다. 우리는 ‘영원히 살 것처럼’이 아니라 실제 영원히 산다.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는 자요 부를 자들이다. 왜 새 노래를 부르는가. 고대에서 전쟁에 승리하고 나서 노래를 부른 장면들이 나온다(대하 20:27-28). 새 노래와 그러한 승전가의 연관 관계는 드물게 나타난다(시 144:9-10). 노래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종말의 군사들이다. 세상을 이긴 자들이다. 거룩한 전쟁이 끝나면 승리한 자들이 축하는 것이 하나의 관습이었다(대하 20:27-28).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적을 홍해에 던지셨을 때 그들이 하나님을 찬양했다(출 15:1-21; 계 15:2-4). 이만희가 지었다는 ‘새 노래’가 있다. ‘새[鳥] 노래’다. 첫 구절이 “육천 년 깊은 밤 천계(天鷄)”로 시작한다. 국사봉 정상에는 있는 비석 하나에 “천계황지(天鷄黃地)” 글자가 새겨져 있다. 여기에서 따왔음을 알 수 있다. ‘천계황지’는 ‘하늘의 상서로운 닭이 땅을 지배하다’는 뜻이다. 자신이 지상을 지배하겠다는 뜻이다.

‘새 노래’는 요한계시록에 두 번 나온다. 어린 양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을 사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어린 양에 대한 찬양이다. 그 노래는 죽임 당한 어린 양에게 영광을 돌린다. 그리스도교 공동체 밖에 있는 자들은 십자가에 목 박힌 예수님을 찬양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새 노래는 어린 양을 자신의 피로 사람들을 속량하신 이와 동일시한다.

어디서 새 노래를 부르는가. 보좌 앞과 네 생물과 장로들 앞이다. ‘보좌 앞에서’는 ‘하나님 앞에서’를 의미한다. 보좌는 하나님 이름을 나타내는 완곡어법이다. 보좌와 보좌를 둘러싸고 있는 자들을 강조한다. 새 노래는 하늘에서 펼쳐지는 최고의 경배다. 이 노래를 부른 장소는 하늘 궁정이다. 새 노래가 불러져야 할 유일하게 적절한 장소다. 요한계시록에는 네 개의 찬송이 점진적인 과정을 거치며 펼쳐진다. 첫 번째 새 노래는 어린 양이 일찍 죽임을 당하여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린 것을 노래한다. 두 번째는 성도들이 짐승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을 찬송한다. 세 번째는 모세의 노래와 어린 양의 노래다. 최후의 심판 재앙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공의를 찬송한다. 네 번째는 메시야의 혼인 잔치를 찬송한다.

성도들은 어린 양의 피로 속량함을 받았다. 144,000은 어린 양의 피로 속량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어린 양의 희생의 혜택을 입었다는 의미이다. 어린 양의 노래를 이해한다. 그들이 어린 양에 의해 속량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믿음 안에서 인내의 값을 완전히 지불한 자들만이 뒤따르는 승리의 노래를 부를 준비가 된 사람이다.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승리다. 어린 양의 승리다. 성도들은 어린 양의 승리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짐승에게 매여 있거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속량함을 받은’ 것은 땅의 거주하는 자의 폭정과 짐승에게서 자유를 뜻한다. 144,000의 다른 이름이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어린 양은 몇 구절 앞에서 그들이 매매할 수 없었던 것을 보상해 주는 것 이상으로 그들을 속량, 즉 사신 것이다. 어린 양을 따르는 것을 보아 그들이 신자임을 입증한다.

2. 새 노래를 배울 자 144,000

송아지, 강아지, 망아지는 태어나자마자 네 다리로 일어서려 한다. 어미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 어미젖을 찾아간다. 다음 날이면 달리기 시작한다. 감각 운동을 담당하는 대뇌피질 영역은 태어나면서 이미 특정 형태로 연결된 뉴런 다발을 갖고 있다. 욕구에 따라 곧장 활성화되는 이 신경망은 태어나기 전에 형성돼 평생에 걸쳐 변화 없이 기능한다. 중국의 각급 학교 곳곳에 붙어 있다는 글귀다.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 이는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 ‘배움’과 ‘생각하기’는 어우러져야 한다. 공자의 논어에 있는 구절이다.

‘배우다’에 해당하는 ‘למד’(라마드)’는 ‘배우다’와 ‘가르치다’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 끊임없이 배우는 자만이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는 은유다. 기본 의미는 여기서 확실히 의도적이다. 통상적인 의미는 ‘배우다’, ‘가르침을 받다’를 의미한다. 좀 더 높은 비유적인 유형의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킬 수도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노래 또는 찬송이 언급되고 있으면서 그 가사가 인용되고 있지 않는 유일한 대목이다. 세 번의 새 노래는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144,000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수 없다. 이는 전쟁 시에 사용되었던 암구호나 신비주의자에게만 계시되었던 천사의 이름과 같다.

미국의 인류학자 Margaret Mead의 말이다. “어린이에게 가르쳐야 할 것은 생각거리가 아니라 생각하는 법이다.” 노래를 배우면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배우기 위해서 아니라 부르기 위해 배운다. 배우기만 하고 부를 수 없다면 얻는 게 없다. 강필효가 남긴 ‘어록’이다. “배움에는 삼환사실(三患四失), 즉 세 가지 근심이 있다. 미처 알지 못할 때는 듣지 못함을 근심하고, 듣고 나서는 배우지 못함을 근심하며, 배운 뒤에는 행하지 못함을 근심한다(學有三患四失, 未聞患弗聞, 旣聞患弗學, 旣學患弗行, 斯謂之三患).” 배우고도 실천에 옮길 뜻이 없다면 애초에 안 배우는 것이 낫다. 알고도 배울 마음이 없다면 아예 안 듣느니만 못하다. 몰라도 아쉬울 게 없으면 무지렁이 밥벌레로 살면 된다.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새 노래를 들었다. 저자는 그 노래 가사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들었지만 부를 수 없다.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가 144,000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노래를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배우지 않으면 부를 수 없는 노래다. 학(學)은 갑골문에서부터 등장한다. 새끼 매듭(爻) 짓는 법을 집(宀)에서 두 손(臼)으로 배우는 모습을 그렸다. 이후 대상을 강조하기 위해 아이(子)가 더해졌다. 매듭짓는 법은 달리 결승(結繩)이라고 한다. 인간 사회의 의사소통과 지혜의 전수를 위해 제일 먼저 말과 문자를 가르친다. 문자가 없던 시절에는 당시의 소통도구였던 매듭짓는 법을 먼저 가르치고 배웠던 것이다.

새 노래는 시온 산에 서 있던 구속받은 자들에게 가르쳐졌다. 하늘과 땅 궤도가 가장 적합한 시나리오다. 144,000명을 제외하고는 새 노래를 배울 수 없다. 자격 제한을 둔 이유가 무엇일까. 새 노래를 부를 영역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만 불러지기에 합당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미국의 기타리스트 Riley B. King의 명언이다. “배움의 아름다움은 그 누구도 그것을 빼앗을 수 없음에 있다.” 새 노래는 배우지 않으면 이해할 수도, 부를 수도 없는 노래다. 바울은 삼층천의 경험을 하였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라고 회상한다(고후 12:4). 144,000명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듣거나 이해할 수 없었던 그 무언가를 하늘에서 들었다.

미래학자 Alvin Toffler의 명언이다. “21세기의 문맹자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배운 걸 일부러 잊고, 다시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이다.” ‘배움’(learning)과 ‘교육’(instruction) 사이에는 매우 큰 차이가 있다. 전자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떤 존재가 돼야 할지를 기계적으로 훈련받는다. 후자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해야 하며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를 스스로 훈련받는다. 어떻게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는가.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 144,000명이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수 있다. 거짓 삼위일체의 미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늘에 거하는 자들밖에 이 노래를 부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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