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69) 혼인 잔치(the wedding supper)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지금은 한·중·일 모두 주로 결혼이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이전에는 결혼이란 말보다 ‘혼인(婚姻), 가취(嫁娶), 혼가(婚嫁), 혼례(婚禮), 성혼(成婚), 혼취(婚娶), 가약(佳約)’ 등의 다양한 용어를 더 자주 사용했다. 음은 다르지만, 뜻이 같은 단어가 많았다. 결혼을 그만큼 소중하게 여겼다는 증거가 된다. 혼인의 비유적 표현은 음녀와 음행으로 암시되어 있던 자들과 반대되는 긍정적인 관계를 환기시킨다. 이상적인 혼인은 상호 간의 동의와 애정에 근거를 둔 평생의 협력관계이다. 결혼에서 ‘맺을 결(結)’ 자는 이왕 맺을 일이라면 ‘길(吉)하게 맺으라’는 뜻이다. ‘혼인할 혼(婚)’ 자에 ‘저물 혼(昏)’ 자다. 어둑어둑해질 때 혼례를 올렸다. 이때 양가 모친 앞에 있는 촛불을 켜는 ‘점초’ 또는 점촉(點燭) 의식이 필요했음을 시사하고 있다. 종말의 구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묘사하기 위해 혼인 잔치의 이미지를 사용한다. 잔치 이미지는 부활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었다. 부활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준다. 사람들에게 흰옷을 입을 수 있게 한다. 어린 양과 함께 기쁨을 누리게 한다.

구약에서 종말의 잔치 이미지가 특별히 혼인 잔치로 묘사되지는 않는다. 기쁨과 구원이 연결된다. 슬픔과 압박 그리고 수치로부터의 구원을 의미하는 혼인의 이미지를 사용했던 선지자들의 전승과 같은 전승들과 연결될 수 있게 한다. ‘혼인 잔치’ 주제는 요한계시록 19장에만 나온다. 다가오는 메시야 시대에 의해 잘 알려진 표상이었다. 메시야 잔치는 유대 사상의 통상적인 주제다. 이사야 25:6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 산에서 만민을 위하여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포도주로 연회를 베푸시리니 곧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로 하실 것이며”에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은 화려한 잔치를 베푸실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은 사망은 멸하신다. 자기 백성의 눈물과 수치를 제하실 것이다(사 25:8). 요한 전승에서, 선지자 요한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신부를 취하는 혼인 잔치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묘사한다(요 3:29).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포도주를 제공함으로 예수님은 암시적으로 신랑의 역할을 주장한다(요 2:1-11).

1.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

생텍쥐페리의 소설 ‘어린왕자’를 보면, 여우는 어린왕자에게 ‘길들이다’는 단어를 설명해 준다. “그건 ‘관계를 맺는다’는 뜻이지.” 익숙함에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잔치에 초청받는 것이 그렇다. 살아계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 ‘잔치’는 혼인 비유에 표현된 친근한 교제 사상을 강조한다. 잔치는 친밀한 식탁 교제의 장이다. 그리스도가 그의 백성과 식사하는 장면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복 된 까닭이 무엇인가. 하나님과 교제의 즐기는 상이기 때문이다. 잔치집의 먹을 게 얼마나 많으냐가 관건이 아니다. 음식이 풍성하다고 더 행복해졌다는 증거는 없다. 선택의 폭이 넓어짐에 따라 행복감이 더 커진다는 믿음은 잘못이다. 심리학자 Barry Schwartz는 ‘선택의 역설’이라는 개념으로 선택의 폭이 넓어진 만큼 행복이 줄어든다고 말한다. 음식을 선택하는 폭이 넓은 것보다 혼인 잔치의 주인공과 얼마나 가까운 지가 더 중요하다. 들러리도 행사업체도 하객도 아닌 신부라면 모든 게 달라진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신랑이 누구인가. 신랑은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이시다. 성경적으로, 왕의 혼인 잔치에서 신랑은 말을 타고 허리춤에 칼을 차고 진리와 공의를 행하는 승리한 인물로 묘사된다. 다음 장면에서 이 이미지가 그리스도에게 적용된다. 혼인은 일반적으로 기쁨이 그 특징이다. 고대 문헌들은 신랑신부들의 기쁨을 고무시키기 위한 혼인 하객들의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 천사가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에 대해 말할 때 이 비유적 표현은 신부로부터 손님들로 그 대상이 변경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신부이며, 손님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손님이다. 이중적인 상징이 차용되어 있다. 그 신부와 청함을 받은 손님들이 하나다. 독립 다큐 영화 ‘B급 며느리’에서 여주인공 김진영(36세)은 “며느리도 ‘손님’이란 거다. 사위를 보통 ‘백년손님’이라 하지 않나. 그런데 며느리도 사위와 다를 게 없다. 왜 사위만 손님 대접을 받고 며느리는 못 받는가.”라고 주장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 양의 신부이면서 영원한 손님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라는 어구는 이례적(unusual)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전치사구가 정관사와 그 관사의 지배를 받는 실명사 사이에 나오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 혼인 잔치의 초청, 즉 청첩장은 구두나 글로 주어진다(마 22:1-10). 초대의 글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테모르디스는 그의 집에서 내일 열리는 그의 딸의 혼인식 잔치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또는 “혼인식에 당신과 함께 식사하기 위해 당신을 초대합니다.” 우리나라 직장인들 사이에서 청첩장을 받을 때 머리가 복잡해진다고 한다. 청첩장을 보내면 축의금을 마련해 가야 한다. 요즘의 교통 사정을 감안하면 거의 반나절 이상을 소비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부담스럽게 생각하면서 예식장에 간다. 일종의 세금 고지서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받은 축하금은 언제든 돌려줘야 할 빚인 셈’이란 것이다. 그래서 아주 절친한 사이가 아니면 ‘안 주고 안 받으면 되지’라는 생각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친분에 대한 회신율’이 60%에 불과하다고 한다.

2. 복 되도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여!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손님으로 청함을 받는다. 누가 초대장을 보냈는가. 결혼관계를 이루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주권적 주도권이 강조된 단어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호의로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초대된다. 잔치는 은혜로운 것이다. 초대장이 있으면 참석할 수 있다. 축의금이 아니다. 은혜다. 공로나 선행이 아니다.

바울 서신에 있는 선택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으로 언급된다. ‘청함을 받은’이라는 단어가 ‘택하심을 받은’과 거의 동의어라는 사실이 확증한다. 하나님은 신부에게 혼인 예복을 ‘주실’ 뿐만 아니라 혼인 잔치에 참석하기를 바라는 자들을 ‘초청하신다.’ 하나님의 초청이다. 단체가 아닌 개인적이다. 교회 공동체보다 개인에게 초점을 맞춘다.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부르신다. 택하신 자들이 초청에 응한다. 저자는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과 백마 탄 자에 의해서 패배한 원수들의 시체로 잔치를 벌이도록 새를 초대하는 것과 대비시킨다. 성도들은 교회로서 신부이면서 초청받은 손님이다. 둘 다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다.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와 긴밀한 교제를 묘사한다. 전자는 교회 공동체에 초점을 맞춰져 있다. 후자는 교회를 이루는 개개인 신자들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런 은유의 결합은 이미지에 풍성함을 더하기 위하여 고대 세계에서는 흔히 사용되었다. 여전히 하나님은 통제하시는 분이다.

혼인 잔치에 참여하리라는 약속은 흔하게 나타나는 문학적 형태다.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는 하나의 지복(beatitude)이라 할 수 있다. 일곱 복 중의 네 번째다. 선언된 ‘복 되도다’는 법적인 상황에서 의롭다고 인정함 또는 상 받음이라는 사상과 관련이 있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만이 ‘복 되도다’라고 선언할 수 있다. 악과 사망의 최종 멸망과 함께 임하게 될 풍성한 생명을 예견한다. 말을 한다는 것은 곧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다. 어떤 말은 ‘선언’하는 행위로서 세상을 바꾼다. “피청구인 대통령을 파면한다”라는 헌법재판관의 말 한마디는 살아 있는 권력을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말은 곧 행위다. 행위가 모여서 세상을 주조한다. 다만 말이 행위가 되기 위해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그중 가장 결정적인 것은 말하는 이의 자격이다. ‘복 되도다’을 선언하는 이가 전능하신 이가 아니라 유한한 인간이라면 가짜라고 말할 것이다.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자들은 복이 있다. 왜 복이 있는가. 통상적인 관례를 생각해 보자. 결혼식장에서 복을 비는 자는 하객들이다. 신랑과 신랑의 행복을 기원한다. 요즘은 예식장이지만 그 때는 손님들이 신부를 신랑의 집으로 데려가는 횃불 행렬에 참여한다. 혼인은 신부의 집으로 가는 행렬로 시작된다. 뒤이어 이 행렬은 혼인 잔치를 위해 신랑의 집으로 돌아왔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약혼한 교회는, 이제 그의 하늘 신랑이 신부를 위해 오고, 함께 하늘로 돌아가 영원토록 혼인 잔치를 하는 그 재림의 때를 기다리고 있다.

일반적 사회적 관례에서, 혼인 예식에는 잔치와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하는 행진이 포함된다. 가는 길에, 사람들은 신랑·신부에게 복을 외친다. ‘복 되도다’에 해당하는 ‘Μακαριοι’(마카리오이)를 외친다. 그들이 행복하고 번성하며 아이들을 많이 갖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대상이 바뀐다. 신랑신부가 아닌 손님들이다. 손님들에게 ‘복이 있도다’라고 한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혼인 잔치에 단지 초청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다. 손님이면서 그들은 어린 양의 신부이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이다. 생명과 평강이 영원히 주어지기 때문이다.

예배자들은 이 책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신부의 새 예루살렘의 환상을 예견하는 다가올 혼인 잔치를 내다본다. 그 후에 한 천사가 혼인 잔치에 초대 받은 자들에게 복을 선포한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을 의미한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가장 빛나던 순간이 있다. 많은 이들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을 꼽는다. 삶이 꽃이 되는 순간이다. 어린 양의 혼인 잔치에 청함을 받는 것은 이보다 더 복되고 아름답다. 어린 양 예수님의 십자가의 통해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속죄적 고난을 통해 사랑을 느꼈다. 이 희생은 그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다는 사실을 증명해 준다. 그리고 그가 신부인 자기 백성들에게 ‘충실과 진실’이 될 것임을 보여 준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