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아주 자연스러운 것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 다른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가장 부자연스러운 것이다. 죄의 형벌이다(롬 6:23). 형벌로서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공론(公論) 영역에서 죽음을 다루지 않는다. 누구도 피할 수 없다. 불가항력이라며 서로 쉬쉬할 뿐이다. 죽음에 대한 담론은 금기가 되었다. 현대는 철저히 삶의 논리가 지배하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죽음’하고 발화되는 순간, 불행과 음울(陰鬱)이 우리 주변을 감싸온다고 여긴다. 죽음이 풍문이 되고 만 것은 일상성이 우리네 삶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바쁘다’는 말을 입에 단 채 나날의 일상에 매몰된 우리에게 모두가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은 전혀 실감 나지 않는다.
‘죽는 자들’에 해당하는 ‘οἱ νεκροὶ’(호이 네크로이)는 죽을 자가 아니라 죽은 자다. 네크로스는 ‘죽은 사람’이다. 산 자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네크로스에 대한 신약성경의 용법은 헬라의 용법 그리고 구약성경의 용법과는 다르다. 신약성경에서 죽음의 상태가 더 이상 인간의 최후 상태가 아니다. 죽음은 ‘주 안에서’ 보아야 한다. ‘주 안에서’는 바울 서신에서 자주 나오는 정형어구다. 요한계시록에서는 한번 나온다. 주 안에서 죽은 자는 복되고, 그렇지 않는 자의 죽음은 형벌이다. 주 안에서 죽은 자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을 받은 것처럼, 마지막에 일으킴을 받거나(고전 15:35), 일어날 것이다(막 12:25).
황제 숭배 강요와 그에 동반되는 사형 선고의 위협은 믿는 자들의 충성을 확인하는 중요한 시험이 될 것이다. 광범위한 순교를 가져올 수 있다. 순교는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이다. 순교자가 복되다. 동시에 이 복은 순교자에게 제한될 수 없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되다. 배교의 대가는 영원한 고통이다. 충성으로 인한 고난은 잠깐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지킨다. 고난은 잠깐이나 영광은 영원하다. 현대사회에서는 오히려 ‘죽음(death)’ 자체보다 ‘죽어감(dying)’이 더 두렵고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유명하고 유능한 사람이라도 질병과 죽음 앞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 ‘주 안에서 죽는 것’은 끝까지 충성됨을 유지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자신의 삶의 영역으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사는 것이다.
1.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
우리가 끊임없이 진입하고 있는 ‘지금’이라는 시간은 이중적이다. 지금은 과거이며 동시에 미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 대통령 부인 엘리너가 했다는 유명한 말이 있다. “Yesterday is history. Tomorrow is a mystery. Today is a gift. That’s why we call it ‘The Present’.” “어제는 역사였고 내일은 미스터리지만, 오늘 만큼은 선물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오늘을 ‘The Present’라고 부르는 이유다.” 베스트셀러 작가 Spencer Johnson은 저서 ‘The Present’에서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은 현재의 순간, 지금”이라 했다. ‘지금 이후로’는 두 가지를 해석할 수 있다. 시간상 한 시점으로 보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의 ‘지금’이 될 것이다. 대안적인 번역이다. ‘확실히’(assuredly)다. 그럴 경우, 그 진술은 단지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확실히 복이 있다’는 강조가 된다. 마태복음에서는 ‘곧, 짧은 시간에’를 의미한다. 단순히 ‘이제부터’가 아니라 지속되어질 상태 혹은 상황의 시작을 말할 때 사용된다. ‘십자가의 때 이후로’ 혹은 ‘틀림없이’로 보다 더 잘 해석할 수 있다. 박우현 시인은 ‘그때는 그때의 아름다움을 모른다’라는 시에서 “죽음 앞에서/ 모든 그때는 절정이다’이라고 썼다.
지금 이후로 죽는 충성된 신자들은 복이 있다. 흔들리지 않고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당하는 보다 활발한 핍박으로의 전환을 표시해 준다. 요한은 짐승과 연관된 임박한 핍박의 강렬함을 예상한다. 그런 일이 일어날 때 예수님에게 충성을 지키는 자들은 참으로 복을 받을 것이다. 최상의 죽음은 어떤 것일까. 예기치 않은 죽음, 별안간 맞는 죽음이라는 말이 있다. 기다리고 예비하는 죽음이 차선(次善)이다. 오래 두고 두려워하며 버티는 죽음은 최악이다. 공자는 ‘삶도 제대로 모르는데 죽음을 어찌 알랴’(未知生 焉知死)고 했다. 옛날 로마에서는 개선장군이 시가행진을 할 때 노예를 시켜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인 ‘Memento mori’를 외치게 했다고 한다.
역사의 마지막 시기에 해당할 뿐만 아니라 요한 당시로부터 역사가 끝날 때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됨을 유지하다 죽는 모든 성도에게 해당된다. 이전에 죽었지만 복을 받지 못할 다른 성도들과 구별하여, 복을 받기 시작할 고난 속에 있는 어떤 집단을 암시할 수 있다. 복된 쉼이 시작되는 때가 바로 죽음의 순간이라는 것을 표현하는 데 있을지도 모른다.
이전에 죽은 자들도 이 복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순교자들이 이미 쉼을 얻고 있다. 흰옷을 받았다. 쉼은은 ‘흰 옷’을 준다는 것과 더불어 시련 중에서도 믿음으로 인내하는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사후의 상이다. 지금 이후로 시험의 때가 이미 시작되었다. 교회는 일어나도록 되어 있는 일에 대비해야 한다. 박해를 통해 시험을 거쳐야 한다. 지금 당장 믿음을 지키겠노라 결정해야 한다.
2. 복 되도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여
옛 어른들 말씀이 ‘생사대사(生死大事)요, 무상신속(無常迅速)’이라고 하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일이 죽는 일이다. 파라오들은 시체를 없애버리지 않았다. 미라를 만들었다. 죽은 자가 다시 부활할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보존하는 장례법을 발전시켰다. 신자들이 죽음에 직면해서도 인내한다면, 그들은 ‘복이 있을’ 것이다. 죽음은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사라질 것이다. 그 때에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썩지 않을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고전 15:52; 빌 3:20, 21).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순교자와 자연적 원인으로 죽은 사람을 포함한다.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강조다.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강조가 아니다. 다른 원인으로 죽은 자들도 순교자들처럼 복을 받을 것이다. 실낙원의 저자인 John Milton은 “죽음은 영원한 세계를 여는 열쇠다”라고 말하였다. 성경학자인 Edward J. Young은 “죽음은 인생의 면류관이다”라고 말하였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개의 축복문들 중의 하나이다. 복수형으로 되어 있다. 칠복 가운데 두 번째다.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왜 복이 있는가. 원인이 복이 되는가. 그리스도와 영적인 연합의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한 자들은 복되다. ‘주 안에서’는 영역의 주격이다. 이 성도들이 복이 있는 이유다. 주 안에서 죽은 자가 복이 있다는 것은 사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사후의 세계가 없다고 하면 죽는 것으로 끝난다. 죽은 자에게 복이 되려면 사후세계가 있어야 한다. 미국의 여론조사기관 퓨포럼은 미국인들의 74%가 하나님의 나라 존재를 믿는 것으로 집계했다. 또 로이터입소스가 23개 국가 1만 8829명을 조사한 결과 51%가 사후 세계의 존재를 확신한다고 답했다.
“나는 가야하고, 당신들은 남아야 하는데, 누가 더 좋은 곳으로 가는지는 오직 신(神)만이 아신다.”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기 전에 한 말이다. 인간은 삶과 죽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 세 가지 사실은 알고 있다. 누구나 반드시 한 번 죽는다. 혼자 죽는다. 그리고 아무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 죽음은 두렵다. 대면하고 싶지 않다. 죽음이 보내는 시선을 피하려고만 한다.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것도 세 가지 있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어떻게 죽을지도 모른다. 끝으로 죽을 장소를 알지 못한다. 죽음은 그래서 허무하다. 생각할수록 공허한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다. 우리는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이다. 순교냐 고종명이냐, 사고사냐. 방법이 아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 누구나 죽고, 어디서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 대다수 사람들은 언제 죽을지 정해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죽음을 자신의 일이 아닌 듯 여긴다. 주 안에서 죽는다는 것은 주 안에 사는 자도 죽는다는 뜻이다. 그러나 주 안에서 죽는 자는 복이 있다. 어떻게 죽느냐는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사느냐도 아니다. 주 안에서 순교할 수 있고, 주 안에서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고종명할 수 있다. 죽음에 방점이 있는 게 아니다. 주 안에서가 관건이다. 앞으로 어떤 환난과 핍박이 있어도 주 안에 사는 자는 주 안에서 죽을 수 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승리다. 순교 역시 승리다. 짐승이 성도들을 이긴다. 실제로 순교를 통해서 이기는 자는 바로 성도들이다. 순교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이긴다.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함은 순교를 낳을 수 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승리자다. 이긴 자다. 안식에 들어가기에 복되다. 여러 명의 순교자가 발생했다. 핍박은 이미 과거사다. 이 말씀은 임박한 일련의 순교들에 관한 예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어린 양에게 충성한다면, 그들은 지금 고난을 당하지만 이후에 영원한 안식의 복을 받을 것이다. 인내하라는 열망은 심판에 대한 경고뿐만 아니라, 상을 받게 된다는 약속에 의해서도 동기부여를 받는다.
이 복을 얻을 자는 폭력적인 죽음, 예를 들어 순교한 자들로 제한되지 않는다. ‘복이 있도다’에 해당하는 ‘Μακάριοι’(마카리오이)에 해당하는 자는 새 예루살렘에서 생명의 약속을 받는 모든 구원받은 자들에게 주어진다. 대안으로 ‘지금 이후로’를 ‘확실히’로 읽는 것이다. 복 받은 자들이 확실히 쉼을 얻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약속과 경고의 장면들 사이의 상호 작용은 충성되게 남아 있으라는 마지막 권고로 절정에 도달한다. 성도들은 비록 죽임을 당하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잊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인내로 죽음 이후에 상을 받으셨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럴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의 공동체의 대표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