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주간이 떠오르게 하는 인물들
빌라도_책임을 회피한 정치인의 초상
무리들의 외침, 맹목적 군중심리의 위험
진리를 외면한 재판의 아이러니
고난주간을 맞이하면 늘 기억의 저장고에 맴도는 단어가 있다. 본디오 빌라도와 고난받으신 예수와 종교지도자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던 무리들이다.
본디오 빌라도는 팔레스타인 지방을 다스리는 로마 총독이다. 그는 팔레스탄 지역을 다시리는 통치권자로서 예수를 사형 판결한 사람이다. 예수를 사형 판결할 때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무리들의 만족을 채워주기 위해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라고”(막15:15) 판결을 내렸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재판하면서 예수님에게 죄를 찾지 못했다. 죄를 발견하지 못했지만 재판을 끝냈다. 단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죄가 없지만 예수를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게 넘겨주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이는 과정에 참여한 무리들이 있다. 대제사장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모여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한다. 대제사장들은 무리를 충동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라고 소리치도록 선동했다. 그리고 백성들은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른 체 큰 소리로 외쳤다. 빌라도는 무리에게 만족을 주고자 채찍질과 십자가에 못 박게 했다.
늦은 밤과 아침 사이에 7번이나 왔다갔다하며 재판을 했다. 여기에는 정의도, 양심의 가책도, 진리의 호소도 없다. 변호도 없다.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없다. 모든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주어진 고난인 것이다. 오직 만족을 주기 위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던져 버린 것이다.
대중들의 만족을 위해서 던져진 결정이 얼마나 무모한 가를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신앙생활, 자기만족인가 진리 추구인가
무너지는 자기만족형 신앙의 특징
우리 삶의 흔적, 가장 가까운 이들이 안다
오늘날의 빌라도와 무리들
고난주간은 자신의 신앙생활을 주님의 말씀에 비추며 다시 정리하는 시간들이다. 신앙생활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족이라는 체면에 걸리면 더 이상 양심도 인격도 신앙의 성숙도 없다. 자기만족을 채우기 위한 헌금, 찬양, 봉사, 기도생활은 유익이 없다.
신앙생활하다가 자기만족이라는 수렁에 빠지는 분들의 특징이 있다. 자기만족이 떨어지면 헌금도, 봉사도, 기도도, 기본적인 예배생활도 다 포기한다. 자기만족은 거품이다. 거품은 언젠가는 꺼져버린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우리는 말씀에 기초한 믿음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가까운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자녀들은 더 잘 안다. 부부는 내 남편이 내 아내가 어떤 수준의 신앙생활을 하는지 잘 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모든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자기만족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어느 순간 빌라도와 같은 결정을 한다. 또한 무리들과 같은 수준의 삶을 살게 된다.
○사도신경 속 영원히 기록된 이름
본디오 빌라도란 이름은 사도신경에 나오는 인물이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예배 때 마다 암송하는 사도신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그가 그렇게 될 줄 상상이나 했을까? 지구가 존재하는 한, 본디오 빌라도라는 이름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불리워질 것이다. 만약에 빌라도가 무리들에게 만족을 주고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라고 재판을 내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위대한 총독으로 길이길이 기억될 것이다.
무리들은 종교지도자들의 충동질로 인해서 예수를 채찔질하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다. 자신들이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전혀 의식도 없이 외쳤다. 그 피흘림의 외침을 역사의 흐름속에서 자손 대대로 받았다.
○한국 사회 속 이념의 외침
신앙은 감정이 아니라 말씀이다
교묘하게 다가오는 사단의 유혹
한국의 이념전쟁은 양쪽 진영으로 나눠진 싸움판이다. 정의도 진리도 균형도 없다. 오직 내편이냐 네 편이냐의 싸움만이 독버섯처럼 퍼져가고 있다. 이것에 편승해서 먹고 사는 인생들이 참 많다. 좌우를 분별하는 정치인과 시민들이 많아 균형을 잡아 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법적인 상식을 벗어난 좌우 대립은 결국에는 국가만 망가지고 국민들의 삶만 고달퍼진다.
신앙은 자기만족이 아니다. 자기만족은 늘 자기가 기준이다. 기분 좋을 때는 한없이 잘하는데, 기분이 상하거나 여건이 힘들어지게 되면 포기한다. 신앙은 내 기분이 아니라 십자가의 정신으로 해야 한다. 말씀에 비취어 보면서 해야 한다. 그래야 쓰러지지 않고, 견고한 신앙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말씀에 뿌리가 없고, 자기 기분이나 만족을 위해서 교회생활하면 언젠가는 무너진다.
사단은 아주 교묘하게 나를 파고 들어와서 나를 넘어뜨린다. 사단은 나를 너무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이 약한지를 잘 안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것이 사단이다. 돈에 약한 사람은 돈을 치고 들어오고, 성에 약한 사람은 성적인 문제로 치고 들어오고, 입이 방정맞은 사람은 입술로 찾아오고, 명예에 약한 사람은 명예로 치고 들어와서 넘어뜨린다.
빌라도는 사단의 앞잡이가 된 것이다. 얼마나 불쌍한 인간인가? 빌라도는 예수님을 죽인 인물로 역사의 기록 속에 영원히 남겨진 불쌍하고 가련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말씀 앞에서의 자기 점검
신앙생활할 때 우리는 늘 말씀과 십자가앞에 자신을 비추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자기만족인지, 자기 기분인지, 자기 생각인지를 수시로 본질을 점검하는 습관이 필요하다. 당이 높은 사람은 살기위해서 당 수치를 늘 체크한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믿음대로 살기 위해서 늘 신앙의 동기가 병들었는지를 체크해야 한다.
신앙생활하면서 우리가 함정에 잘 빠지는 경우가 있다. 자기 기분과 자기감정과 자기만족의 체면에 걸리면 실패한다. 어린이들은 자기가 기준이다. 그러나 청소년기를 지나고 어른이 되면 더 이상 자기가 기준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이나 생각이 무엇인지를 판단하고 행동한다.
○성숙한 신앙으로 나아가기
사도요한은 신앙의 성숙도를 말하는데 어린이와 청년과 장년이 있다고 한다. 예수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라고 권면한다. 인격이 자라고, 성품이 자라고, 생각이 자리고, 비전이 자라고, 사명이 자라고, 믿음이 자라야 한다. 성장하면 자기만족이라는 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기 생각을 말하지 말라. 자기 기분에 집중하지 말라. 자기만족에 빠지지 말라. 오직 예수의 말씀과 정신에 마음과 생각이 가득 채워지기를 바란다. 고난주간을 보내면서 빌라도와 같은 약삭빠른 정치적 결정, 무리들과 같은 맹목적인 외침이 얼마나 큰 어리석음인가를 다시 기억하면 좋겠다. 또한 자신의 만족을 위한 신앙생활의 덧에서 벗어나는 성숙함을 기대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