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로마교회에서 종교개혁을 한 개신교회가 반절의 종교개혁으로 머문 이유는 무엇인가? 이 부분이 궁금할 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리고 있는 교회의 이미지는 거의 로마교회가 심어 놓은 깊은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용에서는 개혁을 외치지만 형식에서는 여전히 헬레니즘 방식이다. 개혁교회는 잘못된 로마교회를 향해 개혁을 외치며 출발한 개혁교회였지만 그들 역시 로마교회가 심어 놓은 건물교회 중심의 교회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지니고 있다. 실제 독일의 루터교회의 예배당의 모습은 거의 로마교회 성당과 모양이 유사하다. 루터교회 목사 가운 역시 사제들의 옷과 비슷하다. 이것은 개혁교회의 종교개혁이 여전히 반절의 종교개혁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것은 천년동안 심겨진 로마교회의 건물교회 이미지를 벗어나기가 얼마나 어려웠던 것인지 짐작하게 한다.
이것은 종교개혁 500년이 지난 지금 우리 교회에도 그대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이 그것을 증명한다. 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개혁정신을 부르짖으면서 우리도 여전히 로마교회의 건물신학을 붙잡고 있다. 이렇게 보면 건물은 교회의 성패를 결정짓는 강력한 맘몬의 힘인 것이 분명하다. 왜 그토록 많은 한국교회들이 그동안 크고 화려한 교회 건물에 목숨을 걸 수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가 충분히 이해가 된다.
1517년 마틴 루터는 95개조 논제를 비텐베르그 성당정문에 게시했다. 로마교황에게 교회에 대한 질문과 토론을 통한 공개적인 소통의 자리를 요청했다. 서문을 보면 그 내용이 잘 나타나 있다.
“진리에 대한 사랑과 이를 해명하려는 열정을 근거로 비텐베르크의 신부이며, 인문학부 및 신학부 교수 겸 비텐베르크 대학 정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은 명제에 논쟁하고자 한다. 그러므로 본인은 구두로 토론하기 어려운 경우에는, 직접 찾아오지 않더라도 서신을 통해서 토론에 참여해 주기를 당부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마틴 루터는 질문과 토론을 통해 지금 당면한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가 과연 성경적인지를 함께 소통하며 하나님의 뜻을 찾자는 의도로 제안했지만 결국은 교황과 교회에게 거절당함으로 생각지 않는 방향으로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거기서 개신교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보면 개신교는 날마다 개혁하는 교회로 서로 소통을 전제로 시작한 교회다.
서로 소통하며 질문과 토론을 통하여 교회를 새롭게 할 때 주님의 교회는 날마다 교회답게 되고 주님이 원하시는 교회로 온전하게 된다. 그런데 소통이 사라지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아 사라지고 인간의 욕심이 자리 잡는다. 개신교는 날마다 말씀 앞에서 서로 질문하며 깊은 의미를 찾아가며 함께 하는 공동체다. 이것이 잘 이루어질 때 교회는 서로가 연락하게 되고 스스로 서게 된다. 친구와 같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하는 교회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이다. 얼마나 교회 속에서 성도가 서로 연락하는 소통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한 지체를 이루고 있느냐에 따라 건강한 교회가 결정된다.
교회는 성도의 소통을 통하여 건강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다. 교회 성장은 단순히 수가 많아지는 것이 아니다. 몸 된 교회가 건강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가 교회될 때 교회는 자생적으로 성장한다. 교회 자체를 건강하게 하면 교회는 자연스럽게 성장하고 역사하게 된다. 이것이 생명으로 구성된 유기체 교회의 모습이다. 우리의 관심은 교회를 건강하게 하고 성경적으로 세우는데 관심을 가지면 된다. 어찌 보면 교회 성장은 단순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교회를 성장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다른 인위적인 방법을 사용할수록 교회는 부패하고 자생력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것을 알지 못하고 교회의 본질 보다는 다른 부수적인 것으로 교회를 세우려고 한다. 이것은 교회를 보통 모임처럼 생각해서 그런 현상이 생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고 따르면 된다. 말씀에 따라 교회를 세우면 그가 구원 받는 자들을 더하게 하실 것이다.
생명인 식물과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식물은 어떻게 자라는가? 사람의 성장도 마찬가지다. 식물에 적합한 살아 있는 유기농 퇴비를 공급하면 식물은 저절로 자란다. 농부가 하는 일은 그저 물주고 햇볕을 노출 시키고 가지를 치는 정도다. 식물은 생명체이기에 자생한다. 얼마나 화학첨가물을 사용하지 않고 좋은 토양만 제공할까 관심을 가지면 된다. 그리고 때를 기다리면 열매가 자란다. 자라게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소관이다. 교회도 이와 같다. 말씀을 심고 성도들에게 거짓된 것을 버리고 참된 것만 제공하면 교회는 성장하게 된다. 우리는 주님이 분부한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면 된다. 농부가 일하듯이 아주 단순하다. 다만 때를 기다리며 정직하게 인내하며 수고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성장 원리다. 그런데 우리는 본질적인 것보다 부수적인 것에 시간을 많이 보낸다.
부모가 자녀의 아픔을 읽지 못하면 부모가 아니다. 병든 성도들의 상태를 그저 보고만 있다면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추궁 받을 것이다. 하루 빨리 성도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살아 있는 교회의 구조로 과감한 개혁이 필요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온전한 성도를 세우는 일에 눈물로 힘써야 한다. 그 방법을 찾기 위해 기도하며 지혜를 모아야 한다. 교회를 유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성도 간에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그런 교회를 만드는 일이다 `
그렇게 하려면 지금의 성공 모델인 수적으로 많은 교회 형태는 불가능하다. 소통이 잘되는 작은 단위의 지체의 교회들이 많아지고 그런 교회로 분립하는 일을 과감하게 실천해야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 한 신도시 대형교회가 30개의 교회로 분립하겠다는 당회원의 발표를 본적이 있다. 그리고 교인숫자도 최대한 줄이겠다고 선언한 결단은 한국교회를 향한 좋은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건강한 교회를 지향하는 이런 교회와 같은 결단이 많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한국교회가 소통형 교회상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전체의 분위기를 만들어야 한다. 교회의 성도 숫자가 얼마가 되어야 한다고 규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소통을 원리로 보면 나름대로 최대숫자가 나올 것이다. 소통이 끊긴 성도들의 영적 건강 상태를 진단 해보면 알 수 있다. 동맥경화나 암과 같은 상황처럼 영적으로 고위험자 들이 있다. 이런 성도들이 한국교회에 많아지면 한국전체에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 목회자는 이런 성도들을 치유하고 소통하며 건강하게 교회 생활하도록 돕는 것이 당연한 의무라 본다.
지금 한국교회마다 일어나고 있는 분열과 갈등의 모습은 건강하지 못한 징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지도자가 떠나면 교회는 당장 분열의 혼란 속에 빠지게 되고 성도 간에 갈등이 일어나는 양상은 그동안 소통의 부재가 만들어낸 작품이다. 아마 이런 모습은 계속 일어날 것이다. 교회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서로의 오해를 해결하기는 어렵다
교회 속에 분열과 다툼의 모습을 겪게 되면 아무리 화해와 중재를 이룬다 해도 결국은 막다른 골목으로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 순간에는 아무리 기도와 말씀으로 호소해도 통하지 않는다. 결국에는 사회법정에서 교회의 부끄러운 모습까지 드러내는 모습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 이제는 교회의 문제가 생기면 교회 안에서 해결이 힘들고 사회 법정에서 판단을 내리는 부끄러운 상황이 되고 있다. 이것은 그동안 진정한 소통 없이 종교적인 생활을 유지한 결과다.
지금이라도 교회의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방향으로 교회 구조를 바꾸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교회의 주인이신 주님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힌 담을 헐기 위해 자신을 화목제물이 되신 십자가의 은혜를 생각한다면 교회 안에 성도들은 다툼과 분열이 일어나면 안 된다. 이것을 해결하는 길은 하루 빨리 소통하는 교회로 세우는 것이다. 세상과 다른 구별된 교회임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이유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제자인줄 알게 될 것이고 구원받는 자들을 주께서 날마다 더하게 하실 것이다.
언택트 시대에 살고 있는 지금 우리는 소통을 더 생각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성도의 소통을 이루며 유기적인 몸의 성장을 이루어 갈 것인지 더 고민해야 할 때다. 불통이 일상화 된 지금이야 말로 어떻게 하면 진정으로 소통하는 교회를 이루는 지혜가 필요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