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속자(롬 8:12-17)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본래 하나님의 자녀로서 자격도 없는 진노의 자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의 유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자녀가 되었다고 합니다. 진노로 심판을 받아 마땅한 우리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는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형제와 자매가 되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혈통으로는 유대인이 아니요 이방인입니다. 혈통적으로 하나님을 대대로 섬겨온 아브라함의 후손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 것과 동일한 것입니다. 우리가 혈통적으로 자녀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하나님의 집안에 입양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상속받게 될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우리의 관심사입니다. 바울 사도가 염두에 두고 있는 상속이 무엇인가? 그것은 영광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가? 그 영광은 하나님이 주시기로 약속한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장차 우리가 가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빛으로 가득한 곳입니다. 왜 빛으로 가득했는가?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항상 비추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임재 곧 영광을 장차 상속으로 받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이면 누구나 다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상속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받게 될 영광을 물질주의적 관점에서 많이 생각합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황금 집과 황금길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물질적으로 풍요를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하나님의 영광의 의미는 바울의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장차 우리가 받게 될 보상인 하나님의 영광을 물질과 관련을 짓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이것은 소속감이요 또한 용서와 관계성입니다. 우리가 빛이신 하나님에게 소속된 빛의 아들들이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요 하나님과 인격적인 대화의 관계가 지속됨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소속감,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가 받는 유산을 상속받게 되었다는 연대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받게 될 영광의 상 면류관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영광의 상을 받고 하늘나라에서 하나님과 누리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 이 땅에서 고난에 대한 상으로 누리고 있는 영광의 자녀들 빛의 자녀들과 하나로 연대되고 하나님의 생명을 지금도 공유하고 있음에 감격해 하고 있습니다.
올림픽 경기 때에 선수들이 금메달을 목에 걸고 대한민국의 태극기가 올라가는 것을 보고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들이 왜 태극기를 보고 감격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까? 바로 그것이 연대감입니다. 대한민국의 대표로서 대한민국 응원을 하는 그 많은 대한의 아들들을 생각할 때 그가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아들이 된 것을 감격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여기서 그 금메달을 목에 걸기 위해 모진 훈련을 받느라고 바깥출입을 한동안 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로지 금메달 대한민국의 명예를 위해서 훈련에 훈련을 거듭하였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영광의 상 금 면류관을 목에 걸기 위해 훈련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투쟁 영적 전쟁을 이 땅에서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배고픔과 때로는 조롱 때는 실패자처럼 보이며 가난과 씨름하며 복음을 위해 그리스도를 위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젊은 날을 몸 바쳤습니다. 이 땅에서 겪는 고통이 사람들 보기에는 실패자 같고 낙오자같이 보일지라도 그 고통이 헛된 고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상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상속자로서 영광을 함께 받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근본주의자들은 바울이 고생하는 것에서 장점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바울은 성공한 기독교인이 못된다고 보았습니다. 기독교인으로서 성공에 도달하지 못한 실패에 가까운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바울이 행하는 기적은 충분하지 못한 기적이라고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상을 물질적 잣대로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모든 피조물들이 고통을 겪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고통은 해방을 기다리는 고통입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은 허무한 것 안에서 한번 피는 풀과 같은 영화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소망 중에 겪는 고통은 그렇지 않습니다. 위대한 소망을 가지고 억압과 죽음에서 해방될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빛의 영광에 도달하는 순간 모든 피조물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이 고통과 억압의 멍에를 벗게 될 것을 소망하고 있습니다.
2. 부르심에 응답(사 6:1-8)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고 하면서 두려움에 떨던 선지자가 바로 이어서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한다.
하나님을 만나고 두려워 떨었던 그가 어떻게 자원하여 부르심에 순종하겠다는 고백을 할 수 있는가? 그가 죄의 고백을 하였을 때에 스랍 천사중 하나가 부젓가락을 가지고 와서 선지자의 입에 대고는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라고 하였다. 부젓가락이 입에 닿는 순간 선지자의 악이 제거되고 죄 용서를 받았다는 선언을 듣는다. 과거에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의 음성을 듣지 못한 자였다. 왜 들을 수 없는 자리에 있었는가? 스스로는 의롭다고 생각하고 살았을지 몰라도 그가 입으로 말하는 모든 것이 죄를 짓는 삶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대화를 막는 것은 바로 죄였다. 그러나 그 죄가 하나님의 선포로 제거되는 순간에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이 들려왔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3. 참 표적이신 예수님(요 3:1-21)
밤중에 예수님을 찾아온 유대인 지도자가 한 사람이 있었다. 이름이 니고데모인 그는 바리새인으로 율법학자이며 공회원이었다. 예수님 앞에 오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생이요 표적을 행하는 분으로 고백한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인가? 믿는다면 어떤 믿음의 소유자인가? 유대인들 중에 예수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님이 몸을 의탁할 만큼 그들을 믿지 않았던 사람들이 있었다. 니고데모는 그들과 같은 부류에 속한 사람이었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예수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2:23-24). 니고데모는 표적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이다. 밤중에 표적에 대한 기대감을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가?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니고데모의 반응이 놀랍다. “늙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날 수 있는가요? 다시 엄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가요?” 당대의 학자요 지도자인 니고데모가 왜 이런 말로 반응할까요? “거듭” 이란 말 의미를 오해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거듭”이란 헬라어로 “아노텐”으로 “위로부터”라는 의미를 또한 가진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은 율법학자 니고데모가 어찌하여 예수님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하는가?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가 예수님의 차원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님의 차원을 알고 예수님의 말뜻을 알 수 있는가“ 하나님이 열어서 보여준 자만이 알 수 있다. 니고데모가 기대했던 표적들 중 참 표적은 무엇인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믿는 것이 참 표적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표적 중에 표적이다. 왜 참 표적을 아는 것이 중요한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참 표적인 예수님을 알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생명인 영생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을 알고 믿는 것은 거듭난 자만이 가능하다.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나게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게 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다.
4. 영광과 능력은 여호와께(시 29편)
본 시편은 “권능있는 자들”에게 영광과 능력을 자신에게 돌리지 말고 여호와께 돌리라고 시작한다. 권능있는 자들이 누구인가? 히브리어로 “벤( בֵּן)”으로 “아들들”이란 의미이다. “아들들”이 어떻게 권능있는 자들이 되었는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높이사 영광과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아들들은 독자로서 인격적으로 마주 대하고 있는 “너희들”이다.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릴지어다.” 그리고 이어서 시편은 독자인 아들들에게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릴 뿐만 아니라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하라”고 한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아들들이 여호와께 영광과 권능을 돌리고 예배를 드려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왕의 보좌에 앉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홍수 때란 심판 때를 말한다. 하나님이 우주적 왕으로 우주의 심판관으로 등극하셨고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된 “아들들”이 권세를 받았기 때문이다.
시편은 마지막 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힘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곧 평강의 복주실 것이라고 한다. 이 구절이 십자가 지셨던 그리스도가 부활 후에 승천하실 때에 성령을 보내주시기로 약속하였던 대로 제자들에게 오셔서 성령의 오심의 표로 평화를 주셨다는 사실을 축하할 근거가 된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기독교 예전의 역사상 예수님 세례주일 뿐만아니라삼위일체 주일에 한 분 하나님이 아버지. 아들과 성령으로 나타내 보이심을 축하하는 본문으로 사용되어 왔다.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여호와의 “소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로 “콜(קוֹל)”은 천둥 번개의 의미를 지닌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하나님의 소리가 천둥번개로 내려왔던 때가 언제였는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내려올 때였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역사에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이 내려온 그 날을 기념한 이스라엘의 절기는 무엇인가? 출애굽한 후에 50일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하여 오순절이라고 한다. 그 오순절 날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곳에 모여 기도할 때에 하늘에서 혀 모양의 불이 각 사람의 머리위에 내려오는 일이 일어나게 되었다. 기독교는 그날을 성령강림절로 지켜왔다.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