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목과 속량은 예식과 상업이라는 서로 다른 세계를 생각하게 한다. 전자는 성전, 후자는 시장이다. 전자는 종교의식에서, 후자는 사업상 거래로 넘어간다. 전자는 십자가에 의하여 진정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초점을 맞춘다. 후자는 십자가에 의하여 죄인이 속함을 받아야 하는 바, 죄인의 궁지에 초점을 맞춘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인을 떼기에 합당한 어린 양께 새 노래를 부른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렸기” 때문이다. 속량은 땅의 거주하는 자의 폭정과 짐승에게서 자유를 뜻한다. 구원의 행위이든 속전을 지불하는 의미다. 전쟁의 포로들은 속전이라는 불리는 대가를 지불하고 풀려났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간주된다.
속량은 구원을 가리키는 은유적인 의미를 지닌다. 유대의 결혼 계약에는 여자가 포로로 잡혀 갔을 경우, 남편이 그 여자를 속량할 것이라는 보증이 포함되어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은 충성된 신자들의 남편의 역할을 하면, 그의 신부인 교회를 속량한다. 속량은 구속을 가리킨다. 어린 양의 죽음을 죄의 값을 지불하고 성도들을 사서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묘사한다.
우리는 단순히 그리스도에 의하여 ‘속량을 받거나’(redeemed) ‘건짐을 받은’(delivered)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속전을 지불하신’(ransomed)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롬 3:24). 속량은 그리스도의 구속 행위를 가리킨다. 죄에 종속되어 있던 자들을 그 속박으로부터 해방시켰다.
1. 속량함을 받은 자가 144,000이다
144,000은 단지 인침을 받은 자다. 어린 양과 함께 서 있다. 속량함을 받은 자다. 수금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름으로써 하나님을 찬송한다. 후기 유대교 문헌들은 하나님이 메시야 시대와 장차 올 세상에서 수금과 새 노래로 찬송받으실 것을 내다보았다. 새 노래는 세 번째다. 한 번은 어린 양께 드린 노래다. 다른 한 번은 승리자를 위한 노래다. 세 번째 새 노래는 모두 승리, 환희와 관련이 있다.
144,000은 12,000×12, 즉 요한계시록 7:4, 8처럼, 열 두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의 수다. 완전함을 상징한다. 두 번째 짐승 숫자인 666과 대조를 이룬다. 666은 세 숫자 모두 불완전한 수다. 노래하는 그들은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또는 ‘사람 가운데 속량함을 받았던’ 자다. 그들 모두가 신자들이다. 두 용어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있다.
피겨 스케이팅 선수는 경기가 끝나면 ‘Kiss & Cry zone’으로 간다. 점수 발표를 기다리는 곳이다. 기대보다 높은 점수에 기쁨의 포옹을 나눈다. 실망으로 참았던 울음을 터트리기도 한다. 144,000명은 서 있는 하나님의 보좌는 희비가 교차되는 곳이 아니다. 심판을 받기 위해 대기하는 공간이 아니다. 심판에서 열외된 자들이다. 죄와 사망에서 구원받은 자다. 어린 양의 피로 속량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이 부를 노래는 노예들의 합창이 아니다. 노래의 내용은 자신의 피로 구속받은 자들을 사서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어린 양에 대한 찬양이다.
시편에서 새 노래는 창조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온전히 신뢰하도록 성도들을 부르시는 사실에 대한 찬양의 시다. 144,000은 짐승을 이기고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한다. 하나님은 짐승을 심판하신 분이다.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셔서 짐승을 이기게 하신다. 찬양과 영광을 받으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이 ‘노예들의 합창’은 조국을 잃은 유대인들의 비가다.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에게 붙잡힌 이스라엘 민족이 해방을 꿈꾸며 “가라 마음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를 합창한다. 유프라테스 강가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 고향 땅을 바라보며 부른 망향의 노래다. 144,000명이 부를 새 노래는 승리의 노래다. 구원의 노래다. 믿음 안에서 인내의 값을 완전히 지불한 자들만이 뒤따르는 승리의 노래를 부를 준비가 된 사람들다.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것은 승리다. 성도들은 어린 양의 승리를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다. 짐승에게 매여 있거나 노예 상태에서 해방된 자들이다.
속량함을 받았다는 것은 어린 양의 희생의 혜택을 입었다는 의미이다. 이 이미지가 암시하는 것은, 구속을 필요로 하는 사람의 값을 치루기 전에는 포로 상태였다. 자유케 하려면 오직 속전이 지불되어야 한다. 그 속전은 다름 아닌 어린 양이 죽임을 당하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희생해야만 한다. 속량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베푸신 어린 양의 노래를 이해한다. 그들이 어린 양에 의해 속량함을 입었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보좌 중심이다. 주변에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동심원을 이루고 있다. 보좌 앞과 생물과 장로 앞에서 합창을 한다. 이 노래는 하늘 궁정에서 불린다. 무대가 하늘이다. 새 노래는 하늘에서 펼쳐지는 최고의 경배다. 마귀의 미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늘에 거하는 자들밖에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자가 없다. 희생을 통해 주어진 승리의 노래다.
속량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베푸신
어린 양의 노래를 이해한다.
2. 속량함을 받은 자만이 새 노래의 의미를 이해한다
왜 144,000밖에는 새 노래를 배울 자가 없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자격은 말한다. 구속함을 받은 자다. 구속함을 받지 못하면 그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이 노래를 어린 양의 피로 속량함을 받고 하늘 보좌 앞에서 제사장이 된 자들이 부른다. 믿음 안에서 인내의 값을 완전히 지불한 자들만이 뒤따르는 승리의 노래를 부를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새 노래를 부르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 또 배워야 할 동기는 무엇인가. 의무감인가. 이마에 표를 받았으니 로봇처럼 일사불란하게 노래를 부르는가. 강력한 동기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연료다. 동기는 외적 동기와 내적 동기로 나눌 수 있다. 전자는 상벌처럼 외부적인 보상이나 과제의 중요도 같은 것에 해당한다. 후자는 과제에 흥미와 호기심을 가지고 자기만의 문제의식을 찾아 몰입할 수 있는 자기 충족적 의지를 지칭한다.
14400명이 한 목소리로 새 노래를 부를 강력한 동기가 무엇인가. 하늘찬양경연대회가 아니다. 상급이 있고 보상을 바라보고 합창대를 만든 것이 아니다. 내적 동기라면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한 마음과 한 가지 목표로 가지고 새 노래를 부르게 하는가. Bryan Chapell은 ‘은혜가 이끄는 삶’에서 가장 강력한 동기를 부여하는 힘을 말한다. 사랑이다. 죄책감이나 두려움이 사랑보다 강하지 않다. 의무감이나 이익에 대한 욕심도 사랑보다는 강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을 사랑하신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그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 그의 노력이 대가로 여겨졌다. ‘그의 팔을 뻗쳐서’ 구속했다. 이것이 구속이라는 전문용어가 사용되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우리게 그 사랑을 나타냈다. 외아들로 하여금 부끄러움과 고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게 한다. 죽음이라는 형벌에 내어준다. 우리의 죄를 대신 갚게 한다. 우리를 속량하신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속량 받은 자들이 노래할 이유다. 동기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의 피로 사셨다. 그분께 속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충분한 동기가 된다. 하나님과 생물들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목청 높여 부를 강력한 동기가 된다.
배우다에 해당하는 ‘라마드’는 ‘배운다’와 ‘가르친다’라는 두 가지 뜻을 동시에 담고 있다. 끊임없이 배우는 자만이 남을 가르칠 자격이 있다는 은유다. 통상적인 의미는 ‘배우다’, ‘가르침을 받다’를 의미한다. 좀더 높은 비유적인 유형의 지식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가리킬 수도 있다. 가사를 배우지 않지만 노래가 의미하는 바는 배운다는 것이 논쟁점이다. 새 노래의 뜻을 이해하는 것이다.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라는 요한복음에서 이 말은(요 6:45) 배움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계시를 깊이 경청하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아시아의 황제 제의는 자체에 신비로움이 있었다. 노래하는 자들이 하는 노래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 양에 의해 구원받은 자들은 요구되는 순결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의 노래의 의미를 공유할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에서 노래 또는 찬송이 언급되고 있으면서 그 가사가 인용되고 있지 않는 유일한 대목이다. 부분적 예외는 찬송을 간접적인 방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세 번의 새 노래는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144,000 밖에는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수 없다. 이는 전쟁 시에 사용되었던 암구호나 신비주의자에게만 계시되었던 천사의 이름과 같다.
요한은 하늘에서 나는 새 노래를 들었다. 저자는 그 노래 가사를 제시하지 않고 있다. 들었지만 부를 수 없다. 배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은 그가 144,000에 속한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 노래를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배우지 않으면 부를 수 없는 노래다.
이 새 노래는 시온 산에 서 있던 구속받은 자들에게 가르쳐졌다. 하늘과 땅 궤도가 가장 적합한 시나리오다. 144,000명을 제외하고는 새 노래를 배울 수 없다. 자격 제한을 둔 이유가 무엇일까. 새 노래를 부를 영역 때문이다.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만 불러지기에 합당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어떻게 새 노래를 배울 수 있는가. 땅에서 속량함을 받은 자 144,000명이 능히 이 노래를 배울 수 있다. 거짓 삼위일체의 미혹을 물리치고 승리한 하늘에 거하는 자들밖에 이 노래를 부를 수 없다. 미래학자 Alvin Toffler의 명언이다. “21세기의 문맹자는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사람이 아니라, 배우고 배운 걸 일부러 잊고, 다시 배울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분의 피로 사셨다. 그분께 속하게 되었다. 이 사실은 사나 죽으나 하나님을 찬양하기에 충분한 동기가 된다. 하나님과 생물들과 장로들 앞에서 새 노래를 목청 높여 부를 강력한 동기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