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받기 위하여 엘리야가 바친 3가지 희생

열왕기상 18:33-35 또 나무를 벌이고 송아지의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이르되 "통 넷에 물을 채워다가 번제물과 나무 위에 부으라" 하고 또 이르되 "다시 그리하라"하여 다시 그리하니 또 이르되 "3번 그리하라"하여 세번 그리하니 물이 단으로 두루 흐르고 도랑에도 물이 가득하게 되었더라

기도자와 의무적으로 가끔 기도하는 사람은 삶의 태도부터 다릅니다. 기도자는 항상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만 바라보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바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의무감으로 기도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으면 왠지 마음이 불편하고 죄책감도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의 마음이 편해지기 위하여 기도하므로 하나님보다 자기의 마음과 몸에 초점이 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위하여 모든 것을 바치며 하나님을 위해서는 남들이 바치는 정도만 합니다.

불을 받기 위하여 엘리야가 바친 3가지 희생

첫째로 엘리야가 바친 희생은 송아지입니다.

그 당시에 제사를 지낼 때에 송아지를 바치는 것은 상식적인 것이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은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를 바쳤으나 가난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비둘기 새끼를 바치도록 허락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나오는 동물인 송아지나 양이나 염소나 비둘기 등은 인간이 하나님께 바쳐야 하는 기본적인 제물을 말합니다. 즉 누구나 예배를 드리러 나올 때에 제물이 없이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오지 말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누구나 바쳐야 하는 그런 것입니다(출 23:15, 34:20). 그러나 하나님께서 반드시 바치라고 하셔도 누구나 바치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으로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만이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서는 빈손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그래서 비둘기 새끼 정도는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도 힘이 들면, 곱게 빻은 곡식의 가루 에바 10분의 1을 바쳐야 했습니다(레 5:11). 하나님께 속죄하러 나올 때에는 반드시 속죄의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특히 속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피가 있어야 했지만, 너무나 가난한 사람에게는 곡식 가루도 허용하셨습니다. 곡식의 가루를 바치기 위해서는 곡식을 빻아야 하는 수고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바칠 때에는 제사장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치는 사람이 바치는 동물을 죽여야 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살피시며 동시에 우리의 헌신을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정도를 보며 물질의 유무 정도를 알 수 있는 것 뿐만 아니라 그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부유해도 하나님께는 인색한 사람이 있으며, 아무리 가난해도 자신의 전 재산을 바쳐서 예수님께 칭찬을 받은 두 렙돈을 바친 여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돈에만 국한시키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에너지(헌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에 한 번만 교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곡식의 가루를 바치는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믿음은 그 정도이므로 시간이나 에너지를 바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곡식을 빻아서 바치는 정도만으로도 그는 희생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시간에 다른 것을 하는 것이 그에게는 더 중요하고 만족스럽기 때문입니다.

몸이 피곤한데 어떻게 교회에 나오겠습니까? 가족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재미있는 드라마가 나오는데 어떻게 교회에 나갈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사업상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데, 그 사람 비위를 맞추어야지 어떻게 교회에 가겠습니까? 내 인생이 바뀔지도 모르는 사람과 함께 있는데 그 시간을 어떻게 빼앗기겠습니까?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하나님도 그 시간만큼은 빼앗지 못합니다. 아니, 그 시간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하며 교회에 가지 않는 것입니다. 밖에 비나 눈이 오고 안개가 꼈는데 굳이 가야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예배는 장소의 문제가 아니라 예배자 자신의 문제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꼭 교회에 가서 기도한다고 기도를 들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이 정성껏 찬송하며 집에서 기도하면 됩니다. 맞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 희생을 드릴 때에는 우리가 원하는 시간이나 장소에서 드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곳에서 지정하신 시간에 드려야 받으신다고 하십니다. 그것이 희생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원하는 시간과 장소는 나의 희생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시간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드리는 상번제와 매 안식일마다 드리는 번제, 그리고 매달에 드리는 월삭과 매년 드리는 절기 등이 있습니다(민 28장).

특히 매일 아침과 해질 때에 드리는 상번제는 예수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순종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제3시에 십자가에 박히셨고 제9시에 운명하셨는데, 제3시는 오늘날의 오전 9시이며 제9시는 오늘날의 오후 3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속죄양이 되셔서 아침에 십자가에 달리시고 해질 때에 완전히 죽으셨습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성도들은 그것을 기념하여 제3시(오전 9시)와 제9시(오후 3시)에 기도하는 시간을 정하고 기도하게 되었던 것이며, 오늘날 주일 예배를 오전과 오후에 드리는 것이 여기에 입각한 것입니다.

레위기 1장 5절과 11절을 보면 "그는 여호와 앞에서 수송아지를 잡을 것이요", "그가 단 북편에서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교회에서 모이는 시간에 교회에 가서 우리의 희생을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멀리 출타한 성도들 가운데에 자기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시간에는 반드시 맞추어 오거나, 주일을 끼고는 출장이나 여행을 가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의 믿음이 크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이 주일을 끼고 출장을 가거나 놀러갔다가 그곳에 있는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며 적당히 한번의 예배를 떼우며 주일을 지켰다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것입니다. 대부분 이런 사람은 교회에서 봉사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봉사하는 일이 없기 때문에 한 번쯤 빠져도 아무 문제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일은 하나님께 봉사하는 날입니다. 주일에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봉사하지 않는 사람은 아직까지 믿음이 없거나 약한 사람입니다.

특히 주일 예배는 참석해도 기도회는 꼭 가야할 이유를 모르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꼭 가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좋은 사람은 꼭 가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모여서 기도하라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이름으로 모여서 합심하여 기도하는 그곳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기 때문입니다.

"또 나 여호와에게 연합하여 섬기며 나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나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사 56:6-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 하시매"(막 11:17)

우리는 피곤하고 힘들거나 가고싶지 않으면, 굳이 교회에 가서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도 다 이해하실 거라며 스스로 정당화시키며 교회에서 기도회를 하는 그 시간에 집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것도 다 채우지 않고 10-20분 정도 적당히 합니다. 왜냐하면 죄책감이 생기기 때문에 죄책감을 없애기 위해서 즉 자기 만족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나마 이렇게라도 하는 사람은 아직 믿음이 가난한 사람 정도는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나마 그것도 하지 않고 잠만 자거나 자기의 육체와 마음의 만족을 위해 그 시간을 보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 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둘째로 엘리야가 바친 희생은 '물'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물을 어디에서 구해왔겠습니까? 그것도 한 통도 아니고 12통이나 되는 물을 도랑이 차고 넘치게 부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있었던 곳은 시냇가와 가까운 곳도 아닌 높은 갈멜산이었습니다. 그 당시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물이 금보다도 더 귀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지만, 물은 돈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 귀한 물을 구해서 엘리야는 높은 갈멜산까지 길어서 올라왔던 것입니다. 따라서 물을 바쳤다는 것은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귀한 희생을 바쳤다는 의미입니다.

엘리야는 네 통에 물을 채워서 제단 위에 3번씩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12통이나 되는 물을 제단 위에 바쳤던 것입니다. 4통에 3번 물을 부은 것을 우리는 다음의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더하기(7)
4는 땅의 숫자이며 3은 하늘의 숫자입니다. 4는 창조의 수이며 3은 부활의 수입니다. 4는 피조물의 수이며, 3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수입니다. 땅(4)과 하늘(3), 창조(4)와 부활(3), 피조물(4)과 삼위일체 하나님(3)을 합친 것이 7입니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창조하시고 7일째에 안식하셨기 때문에 7은 완성 또는 완전을 뜻하는 숫자입니다. 음악의 음계는 7음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리고성은 7번 돌은 뒤에 무너졌고, 모든 인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 주기인 일주일을 7일 동안 지키며.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도 7가지였습니다.

2) 곱하기(12)
땅(4)과 하늘(3), 창조(4)와 부활(3)을 곱하면 12가 됩니다. 계시록 21장에는 새예루살렘성이 나오는데, 동서남북 4 방향으로 각각 3개씩 문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12는 완전 수이며 또한 하나님의 신적 능력(창조와 부활)을 나타내는 수입니다. 구약에서는 12지파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을 만드셨으며, 신약에서는 12명의 사도를 통해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5천명을 먹이신 뒤에 남은 것이 12광주리였습니다. 하루의 시간도 낮 12시간, 밤 12시간으로 나누었으며 1년을 12개월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계시록에 가면 새예루살렘에는 12개의 기초 석이 있으며 거기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있으며 또 12개의 진주 문이 있으며 그 성곽은 144규빗으로 이는 12를 12로 곱한 수(12X12=144)입니다. 특히 그곳에 있는 생명나무에는 12개의 과실을 달마다 맺힙니다.

숫자 4와 3을 더해도 완전 수 7이 나오고, 곱해도 완전 수 12가 나옵니다. 즉 엘리야가 하나님께 물을 바쳤던 것은 완전한 헌신과 완전한 희생을 하나님께 바쳤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로 엘리야가 바친 희생은 '믿음의 기도'였습니다.

우리가 기도를 형식적으로나 의무적으로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믿음의 기도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엘리야가 제단위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기를 원하면서 그곳에 물을 부었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런 일은 그가 부었던 물까지도 모두 태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반드시 불을 내려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히브리서 11장6절을 보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를 원한다는 찬양을 참 잘 부릅니다. 그런데 정말로 하나님의 기쁨이 되기 원한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있다는 것은 반드시 믿음에 따른 행동이 수반되어야만 합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 즉 믿음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이 붙어야 하는 곳에 물을 붓는 행위는 인간적인 상식과 지식으로는 정말 어리석고 무식한 행위였습니다. 마른 곳에 불이 잘 붙지, 물이 가득 차있으면 어떻게 불이 붙겠습니까? 캠프파이어를 할 때에 장작더미에 휘발유를 뿌려야 불이 잘 붙습니다. 그런데 그 장작더미에 누군가가 물을 잔뜩 끼얹는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할 것 같습니까? 그 사람이 정신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물을 뿌리지 못하도록 말리지 않겠습니까?

지금 이 상황도 똑같은 상황입니다. 엘리야가 사람들에게 통 넷에 물을 채워서 3번씩 제단 위에 벌려놓은 나무에 뿌리라고 했을 때, 그것을 들은 사람들은 그 말에 순종하는 대신에 "말이 되는 말을 해야지요? 엘리야! 당신 지금 정신이 있습니까? 불이 내려야 하는데, 나무 위에 물을 잔뜩 부어서 나무를 모두 적시라니요? 우린 절대로 당신의 말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아예 죽으려고 작정을 하셨군요?"라는 말을 하는 것이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이게 왠일입니까? 성경을 보면, 그렇게 엘리야의 말을 거역했다는 말은 하나도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요한복음 2장에 나오는 '가나의 혼인잔치'와 비슷한 모습입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포도주가 떨어지자 마리아는 하인들에게 예수님께서 시키시는대로 하라고 지시를 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결례에 쓰는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고 하셨고, 물을 가득 채운 뒤에는 그것을 퍼서 연회장에게 갖다주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종들은 예수님께서 지시하시는대로 행했는데, 그때 그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처럼 기적은 순종할 때 일어납니다. 그리고 순종은 믿음이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종이란 믿음의 행위를 말합니다. 순종은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행동입니다.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자는 무엇보다 자신을 제단 위에 올려놓는 기도를 드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산 제사'를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살아있는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들 자신 한 사람, 한 사람이 제단 위에 자신을 올려놓기를 원하십니다. 구약에서는 죽은 동물을 바쳤지만, 지금은 살아있는 우리가 제물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살아있는 아들을 바치라고 하셨지만, 아브라함의 영적 후손인 우리에게는 우리 자신을 바치라고 하십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으라고 하십니다. 이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십자가를 지기 싫고 자신을 부인할 수 없어서 교회의 봉사를 맡지 않으려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미꾸라지처럼 빠져 나가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제단 위의 나무와 송아지 위에 물을 부었던 것은 믿음의 모험을 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부인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곳에 불이 내릴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던 행동을 하지 않고 상식 밖의 일을 했던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을 무시하고 그는 세상의 지식과 반대로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제단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행동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에게 손가락질을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일을 했습니다.

제단에 자신을 올려놓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작은 일에 충성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내 감정과 상황과 지식과 경험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아주 작아보이는 그 일을 하라는 말입니다. 때로는 그것이 말도 안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굳이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일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일을 해야하는 이유는,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성령의 불을 내려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령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그곳에 반드시 자신을 믿음의 제물로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믿음의 기도로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자신을 희생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단에 산 제물로 자신을 희생하며 올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배를 기뻐하시냐 하면, 우리를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예배보다 순종을 더 원하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주일에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고, 교회의 모임마다 참석하므로 스스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보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작은 일들을 순종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기뻐하시며 그의 삶에 복을 주십니다. 그러나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하며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에 복과 반대의 길이 준비되어 있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받기 위해 희생의 기도를 한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하여 거저 받지만, 복과 저주는 내 선택에 따라 내 행동의 결과로 자동적으로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께 귀한 것을 바쳤습니까? 여러분의 기도는 얼마나 희생을 동반했습니까? 많은 이들이 기도하는 이유는 하나님께 귀한 것을 바치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가 귀한 것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에 아무 것도 바치지 않고 놀부처럼 제비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박씨를 얻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리고 기도 응답으로 받은 박씨에서 온갖 오물이 쏟아져나오는 것을 보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그 이유는 잘못된 기도를 드렸기 때문입니다. 또한 야곱처럼 하나님과 밤새 씨름을 하면서 불구가 되면서까지 희생의 기도를 합니다. 그가 하나님과 했던 약속대로 돌아오는 길에 벧엘에 들려서 먼저 제단을 쌓았다면, 밤새 희생의 기도를 하며 다리 병신이 될 필요는 없었습니다.

기도자는 자기를 부인하기 위해 희생의 기도를 한다

기도는 희생입니다. 기도는 자기를 죽이는 것이며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그 뜻대로 살아가기 위해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즉 매순간 자기를 죽이라는 말입니다. 매순간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우리가 원하는 것 이상으로 주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성령충만함을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정말 많습니다. 그러나 기도자는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사람을 원치 않으시고 기도자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처럼 기도가 생활 속에서 습관화 되어 있는 사람, 경건의 훈련이 몸에 베어있는 사람, 그래서 모든 일을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그 뜻대로 살아가는 사람,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마무리하는 사람, 세상의 모든 학문과 지식과 지혜와 경험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고 순종하는 사람, 모든 일을 자기가 하려고 하지 않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만 의지하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최고의 희생을 드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최선을 다하여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택하십시오. 기도자가 되겠습니까? 아니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남들처럼 이것 저것 할 것 다 하고 남는 시간이 있으면, 그리고 시간과 상황과 감정과 그 외의 여건이 충족되면 기도하겠습니까?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복과 저주를 선택하라고 했으며 여호수아와 엘리야는 그들이 섬길 신을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이제 무엇을 선택하겠습니까?
복과 저주, 천국과 지옥, 하나님과 나의 정욕, 기도자와 기도도 하는 가라지 혹은 쭉정이 교인?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찌니라 하니 백성이 한 말도 대답지 아니하는지라"(왕상 18:21)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신 11:2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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