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인된 도장 같은 말씀을 찍어내듯 전달하는 대언자

  • 입력 2021.09.29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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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70)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불완전한 인간을 완전하게 하시는 완전한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성긴 곳이 하나도 없는 완벽함을 지녔다.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그대로 반영한다. 하늘의 식양을 따라 만들어진 성막이 완전했기에 그를 바탕으로 지은 성전 또한 완벽함을 기할 수 있었다. 하나님이 거하신 성막이나 성전은 범백(凡百)을 갖추어 결점 없이 필역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도 결점 없이 이루어졌다. 성경이 오류가 없음은 하나님의 완전하신 성품이 성령의 감동을 따라 반영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여호와의 말씀이 완전하여 아무 결점 없음을 충분히 깨달았다. 그의 고백은 제한 없이 역사하는 말씀의 능력이 말씀 자체가 지니고 있는 완전성에 기초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말씀은 믿는 자의 마음속에서 역사하고 그의 삶속에서 작용한다. 이 말씀을 믿고 의지함이 영혼을 지키는 온전한 방패가 된다.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순수하니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의 방패시로다(18:30)

대언자가 완전해서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을 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중에 완전한 인간은 없다. 이해도 완전하지 않아 오해가 생긴다. 지혜도 완전치 못해 무지 상태에 머문다. 능력도 완전치 않아 한계에 부딪힌다. 사랑도 온전치 않아 이별을 겪는다. 인간의 본성이나 사고도 불완전하다. 인간의 언어 자체도 완벽하지 않다.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실체가 얼마나 많은가! 사도 바울은 천상에 올라가 여러 영광을 보았지만 그 대부분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요한이 계시록에서 묘사한 상징적인 표현들도 그가 바라본 영계와 천계의 일들을 도무지 언어나 글로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필설로 표현 불가한 일들이 세상에도 많은데 하물며 하늘에 관한 일이겠는가!

불완전한 인간을 통해서 불완전한 인간의 사고와 언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당신에게 완전하신 말씀이 머물러 있다면 그 인식이 강한 만큼 당신 자신의 계획과 사상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임을 절감할 것이다. 자기 자신의 완벽함을 자신하는 한 당신은 아직도 하나님의 완전하신 말씀에서 거리가 멀다. 당신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만큼 당신은 완전의 가능성에 열려 있다. 빛이 없으면 그림자의 실체를 알 수 없다. 빛 앞에 어둠은 물러가도 그림자는 남는다. 인간이나 사물의 형체가 그림자를 남기기 때문이다. 이는 인간과 만물이 죄의 영향으로 인해 어둠에 속해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빛은 그림자를 드러내고 그림자는 빛이 아닌 어둠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말씀이 완전한 것은 하나님께서 완전하시기 때문이다. 그런 하나님이 자신의 완전하신 말씀을 맡김에 있어 불완전한 사람을 사용하심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다. 완전케 됨이다. 이 말에 오해 없기를 바란다. 인간은 본성상 완전할 수가 없다. 타락 이전 하나님의 창조물로써 인간은 모든 면에서 완전했다. 죄가 완전을 허물어뜨렸다. 주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자유하고 의로운 신분을 회복하지만 육신을 벗고 영화로운 상태에 이르기 전까지 모든 인간은 예외 없이 불완전 지대를 벗어날 수 없다. 언제라도 다시 깨질 수 있는 인간의 복원된 완전함은 완전한 복음의 전달자로 사용하실 하나님 편에서는 부담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 특히 말씀 사역자에게 완전함을 요구하신다. 주님은 산상수훈 중에서 이 점을 분명히 밝히셨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5:48) 성결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으로 풀이한 웨슬리의 탁견(卓見)을 모든 말씀 사역자들은 새겨들어야 한다.

불완전에서 벗어나 완전 상태에 머묾은 대언자에게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다. 하나님은 당신이 본래 지닌 불완전한 상태에서 벗어나 완전하신 하나님 안에 머묾으로 완전케 되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완전은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이 지상에서 이룰 수 있는 한계 내에서의 완전을 기대하신다. 성결이 영혼의 고결한 상태일 뿐 아니라 약동하는 삶인 것처럼 완전함이란 삶의 현장에서 드러나는 실상이다. 예를 들어 야고보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3:2) 했는데,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는 대언자는 무엇보다 말에 실수 없는 훈련을 강도 높게 실행해야 한다. 공사 간 말에 실수가 잦다면 대언자로서는 치명적이다. 원고 설교의 강점 중 하나는 의도적인 말실수를 줄일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님이 예언자에게 주신 모든 말씀에는 자르거나 덧붙일 내용이 없을 정도로 완벽했다. 설교의 최종 원고는 이런 정도의 완벽함을 기하기 위해 첨삭(添削)과 퇴고(推敲)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각인된 도장 같은 말씀을 찍어내듯 전달하는 대언자

에스겔은 하나님의 전령이었다. 하나님이 그를 세워 이스라엘에게 자신의 뜻을 전하셨다. 에스겔이 백성들 앞에서 말씀 선포자로 인정받는 길은 하나님의 대언자로서였다.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지 않았다면 그가 백성 앞에 나설 일은 없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없었다면 에스겔도 다른 제사장들처럼 성전 사역에만 전념했을 것이다. 자신에게 맡겨진 수동적인 제사 업무에만 치중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을 따로 세워 그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할 상세한 말씀을 넣어주셨다. 말씀의 전령! 에스겔은 하나님이 세워주신 그 자리에서 높고 낮은 자를 무론하고 하나님의 뜻을 모두 전했다. 한 사람의 말씀 사역자가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특정 구절을 선택해서 연구하고 그것이 한 편의 설교로 완결되기까지 말씀에 집중, 몰입하는 것은 입을 벌리기 위함이다.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81:10) 입을 넓게 열어야 가득 채우실 수 있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말씀을 넣어 주시도록 때마다 입을 열었다.

전령은 아무 때나 파송되는 것이 아니다. 전령은 소식 전하는 자이다. 왕의 소식이 없으면 전령은 제 자리에 머물러 있다. 왕의 소식을 받으면 지체하지 않고 달음박질한다. 그것이 어느 때이건, 어느 곳이건 상관치 않는다. 하늘의 명이 임했기에 순히 따르는 것이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전령으로 백성에게 달려가 하나님의 대언자로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 전했다. 하나님은 매번 에스겔이 외쳐야 할 말씀의 내용을 정확히 건네주셨다. 그 말씀에는 에스겔 자신의 말을 섞을 조그마한 빈틈도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각인된 도장과 같았다. 누르면 그대로 글자의 모습이 드러나는 인()처럼 말씀이 주어졌다. 아무 여과됨 없이 하나님의 말씀은 에스겔을 통해 투명하게 전달되었다.

우리는 너무도 자주 튀어나오는 우리 자신의 말들로 인해 말씀을 무력하게 만들어버린다. 눌러도 하나님이 전하시려는 말씀이 아닌 엉뚱하게 포장된 말들이 삐져나온다.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신의 입지 강화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어 설교투란 말이 생겨났을 정도이다. 한 편의 설교가 끝난 후에 설교자가 돋보이는가? 아니면 설교자는 가려지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가? 불면 부는 대로, 두드리면 두드리는 대로 울리는 나팔과 북이 되고프다. , 자신이 쏟은 말로 심판 당할 그날의 두렵고 부끄러운 정경이 눈에 삼삼 귀에 쟁쟁거린다. 에스겔은 자신이 선포하는 내용이 스스로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것임을 천명하며 말씀을 외쳤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명하셨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

이러하시다 하라(3:27)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신비로운 말씀 위탁은 없다. 대신에 더 확실하고 안전하며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성경 말씀을 통째로 주셨다. 정확무오한 말씀을 전함에 있어 말씀의 전령은 표현과 전달에 정확성을 기해야 한다. 다시 말하자면 한 편의 설교 안에서 직간접적으로 인용되는 성경 구절은 두루뭉술하게 표현되어서는 곤란하다. 성구 인용, 증거, 해석, 적용의 관계를 한 마디로 표현하면 이렇다. 말씀 인용은 정확하고 진실해야 한다. 암송이 정확한 인용을 돕는다. 암송에 자신이 없으면 해당 구절들을 모두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말씀 증거는 분명하고 담대해야 한다. 충분한 기도가 분명하고 담대한 말씀 증거를 가능케 한다. 말씀 해석은 바르고 적합해야 한다. 진지한 연구가 바르고 적합한 말씀 해석의 토대를 이룬다. 말씀 적용은 구체적이고 실천적이어야 한다. 순종의 마음이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말씀 적용에 힘을 보탠다.

증거자는 자신의 감정을 배제하고 선입견을 장사지내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로 전해야 한다. 곧이곧대로이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침이 없이 정도를 걷듯 그렇게 전해야 한다. 담대함은 항상 바른 자세에서 나온다. 담대함은 주저함이나 머뭇거림을 추방하고 의심 없이 말씀을 전하게 만든다. 잔가지 같은 의심을 극복하려면 말씀에 대한 의식이 번득여야 한다. 말씀에 대한 철저한 의식이 끈질긴 의심을 잡는다. 공명정대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에 있어 인간의 사특한 지혜가 번득임은 재앙이다. 물론 필요하면 하나님이 인간의 경험을 사용하신다. 인간의 언어와 지성을 이용하신다. 의지적으로 사용하려 말고 사용되기를 기다리는 자세가 올바르다.

 

말씀은 영원해도 신학은 영원하지 않다

포장과 내용물을 혼돈해서는 곤란하다. 신학이나 신학적 방법론들은 한낱 포장지에 불과하다. 포장지가 화려하면 할수록 내용물은 필요 이상으로 부풀리거나 주된 관심에서 밀려난다. 외부의 장식이 여러 겹으로 덧칠되면 말씀이 숨 막혀한다. 말씀의 알맹이 그대로 충분하다. 신학 무용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주체와 진리를 규명하는 방도가 엇갈려서는 곤란함을 지적하는 말이다. 신학은 이론이다. 이론은 다양하고 복잡하지만 진리는 하나이며 단순하다. 신학은 시대적 조류의 산물이다. 정론으로 여겨지던 것도 늘 새로운 학설의 도전을 받는다. 신학이 이렇게 논쟁과 대립의 길을 걸으면서도 교리를 확정 짓고 이단의 정체를 규명함으로 교회를 지켜온 것은 빛나는 공헌이다. 신학이 없다면 이교와의 싸움이나 교회 내부에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이단 세력의 척결에 속수무책일 것이다. 신학은 말씀의 진리를 옹호함에 궁극적인 존재 이유가 있다.

말씀은 영원해도 신학은 영원하지 않다. 신학에는 많은 길이 있어도 진리의 길은 하나이다. 말씀의 강보에 말씀의 생명을 싸야 한다. 말씀의 영으로 말씀의 언어를 뒤덮어야 한다. 말씀으로 말씀을 풀게 해야 한다. 이런 기본기 위에 신학의 옷을 입히면 진리는 완벽한 무장을 이룬다. 신학과 신앙은 이복형제가 아니다. 에서와 야곱처럼 성격과 외모가 너무도 다를 뿐이지 일란성쌍둥이다. 신학이 에서인지 야곱인지 아니면 신앙이 에서인지 야곱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둘 다 얍복 나루터를 건너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극복하는 싸움을 거쳐야 한다. 그래야 화해를 이룬다. 신학자와 목회자는 말씀 사역이란 큰 틀에서 승리의 완팀-윈팀(one team-win team)을 이루어 완승의 완원팀(one-won-team)에 다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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