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신 패스, 기본권 침해되지 않도록 개인의 의사도 존중해야
백신을 맞아도 돌파 감염 사례가 계속 증가 추세를 보인다. 또한 백신 접종을 시작하면서 발생한 코로나 사망자보다 백신으로 인한 사망자의 수가 더 많이 발생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백신 패스를 도입한다고 한다. 백신을 맞든 안 맞든 개인의 자유 선택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 질환이나 체질, 알레르기로 인하여 백신 접종을 못 하는 사람들도 있고 1차 접종시 죽을 고비를 넘긴 사람들의 경우 2차 접종을 포기하거나 주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중증 환자의 수가 급증하면 의료 공백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되도록 많은 사람이 백신을 맞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백신 접종을 국민에게 정중히 부탁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선택은 전적으로 개인에게 맡겨야 한다. 사망과 심각한 후유증을 가져올 수 있는 백신 접종의 여부가 2등 국민을 만들어내는 차별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
내 주변에서 코로나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그들 중 대다수는 무증상이거나 경증이었다. 그중에 경증으로 시작해서 생활치료 센터에 입소했다가 갑자기 증상이 악화하여 집중 치료센터로 옮긴 분도 있다. 그분은 기저질환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이런 케이스는 비단 코로나뿐 아니라 다른 질환에서도 흔히 발견된다. 나이가 많이 드신 분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이 낙상사고와 감기다. 넘어져서 골절되면 뼈가 쉽게 붙지 않아서 한참을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신다. 감기가 갑자기 폐렴으로 진행되어 악화하는 경우들도 많다. 기저질환을 가진 분들은 더욱 그럴 확률이 높다.
그런데 질병관리청이 내놓은 코로나 사망자 수는 지난 7월 기준 14명에 불과하다. 2,000명이 넘는 코로나 사망자 수 중에 사망진단서에 사망원인을 COVID-19로 기재된 사람이 14명밖에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은경 청장의 발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독감으로 인한 사망자는 한해 3,000여 명이다. 그중에 사망진단서에 독감으로 기재된 경우는 200여 명, 나머지는 독감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사망에 이른 경우라는 설명이다.
독감보다 못한 사망률과 위험성을 보이는 코로나바이러스에 이토록 지나치게 대응하는 이유는? 코로나바이러스에 대해서 이렇게 대응한다면 당연히 독감 패스도 나와야 하는 것 아닌가? 도저히 의학적으로, 논리적으로, 상식선에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하긴 우리나라는 정말 중요한 정책 결정이 있을 때마다 전문가 집단의 의견은 늘 무시하고 자신들의 정책에 도움이 되는 말을 해 주는 자들을 스피커로 앞세웠다. FTA 광우병 때도 그랬다. 의학적 진실보다는 선동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언론을 도배했다. 4대강 사업 때도 그랬다. 전문가 집단의 말보다는 환경단체들의 말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성주 사드 배치도 그랬다. 과학적 진실보다는 전문 시위꾼들이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사드 전자파에 튀겨진다는 성주 참외? 마트 가봐라. 성주 참외 아니면 명함도 못 내민다. 탈원전 과정도 백신 패스도 그래 보인다.
2.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을 통해서 본 우리 사회의 문제점
2013년 울산대학교 법철학 강의의 마지막 수업은 헌정과 정치에 관한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이었다. 이정훈 교수는 마루야마 마사오의 사상을 통하여 당시 일본 사회를 진단하였다. 당시 일본 정부는 중대한 국가 정책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개인의 견해를 말살시키며 그것을 따르도록 강요하는 것을 도덕으로 삼았다. 그들은 황도의 가치를 앞세웠다. 황도(皇道)의 확산은 다른 민족에 대한 자혜(慈惠)로운 행위라고 주장했다. 군인들은 황군으로서의 자긍심을 가지고 하나의 탄환에도 황도를 담아내며, 총검의 끝에도 국가의 덕을 타오르게 할 것을 요구받았다. 그렇게 그들은 침략 전쟁을 정당화시켰으며 영광스럽게 생각했다.
이 황도의 가치가 얼마나 강력했을까? 나치 전범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했으나 일본 전범들은 마지막까지 도덕군자인 양 행세하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이것이 한 개인의 도덕이나 타락한 양심의 문제였을까? 전후 일본의 군국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초국가주의의 논리와 심리를 연구한 마루야마 마사오 교수는 이러한 문제의 근원을 체제 그 자체의 타락으로 진단하였다.
중대한 국가 정책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개인의 견해를 말살시키며 그것을 따르는 것을 도덕의 영역으로까지 확장 시키는 것이 과연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일까? 이는 정확히 일제가 앞세웠던 황도의 가치에 맞닿아 있다. 이러한 우리 사회의 모습은 마루야마 마사오의 진단을 통해서 보면 한 개인의 타락이나 양심의 문제가 아닌 이 사회의 부패함의 방증이다.
그 부패함이 권력을 가진 자들의 비리를 통해서 끊임없이 드러나고 있다. 권력의 높고 낮음을 떠나 국민을 섬기라고 주어진 고귀한 직을 아주 유용한 재테크의 수단으로 남용하는 자들은 조선 시대의 탐관오리들을 생각나게 한다.
이런 시각에서 보았을 때 우리나라는 아직도 근대화되지 않은 것 같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루었다고 하지만 과연 자연법이 보장하는 개인의 자유, 종교의 자유, 언론 출판의 자유와 법치가 제대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런 고귀한 가치들이 국가 권력에 의해서 계속 압박당하고 있다.
자연법의 원칙을 존중하는 사회, 정부의 권위가 신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것으로 존중되는 사회, 국민은 감정이 아닌 냉철하고 합리적인 설득에 따라 정부의 정책을 지원하고 따르는 사회가 우리에게는 너무 멀어 보인다.
3. 우리가 나아갈 길
"국민의 수준에 정확하게 부합하는 정부를 갖게 된다." "천혜의 자연환경과 훌륭한 법이 있어도 그 사회의 도덕 수준이 이를 받쳐 주지 않으면 어떤 제도도 유지될 수 없다."라는 토크빌의 명제를 잘 생각해 보자. 우리는 이 명제를 통하여 이 부패한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이 지도자를 잘 세우면 바꿀 수 있다고 기대했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유토피아가 도래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런데 과연 그러한가?
왜 이런 열매가 맺힌 것일까? 공정과 정의를 외치는 정부에서 어떻게 이런 열매가 맺혔을까? 그런 구호를 외치며 권력을 손에 쥔 그들 역시 타락한 인간의 본성을 가진 죄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 해결되지 않는 한 누가 그 자리에 앉는다고 해도 결과는 똑같다.
다시 토크빌의 명제로 돌아가서 이 부패한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길은 이 사회의 모럴, 도덕의식 또는 민도 향상에 있다. 이정훈 교수는 토크빌을 언급할 때마다 “자유는 도덕성 없이 세워질 수 없고, 도덕성은 신앙 없이 세워질 수 없다”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필자는 그의 견해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인들이 누가 보든 안 보든 정직함과 깨끗함,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맡겨진 일을 감당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이러한 노력을 통하여 부정과 부패를 부끄러워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어가야 한다.
부패한 영국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 기독교인들이 있었다. 존 뉴턴(1725~1807), 찰스 시미언(1759-1836) 목사는 당시 정치인이었던 윌리엄 윌버포스(1759~1833)에게 아낌없는 조언과 격려를 보냈다. 그리고 이 세 사람은 존 웨슬리와 조지 휫필드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맺어진 이들은 영국 사회에 만연했던 부정과 부패를 걷어내고 그리스도의 복음을 영광스럽게 하는 일에 협력하였다. 그리하여 윌리엄 윌버포스는 지금까지 영국의 양심으로 불리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감격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이들만이 이 사회의 유일한 희망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부패한 사회의 빛과 소금이 되어 이 사회의 도덕의식을 함양하는 견인차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기복주의와 맘몬 숭배에 빠져 불신자들에게 개독교로 불리고 있다. 그들의 평가에 조금 지나친 면이 있을 수 있으나 이는 그들이 우리의 삶을 지켜보고 매긴 꽤 객관적인 성적표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라도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이기적인 태도를 버리고 복음의 정신을 따라서 양보하고 희생하는 착한 행실로 세상 사람들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 돌리도록 해야 한다. 그리할 때 이 세상의 부패를 조금씩 거둬내면서 도덕의식을 향상할 수 있다.
부패한 권력에 기대기보다 진실함과 성실함만으로 인정받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앞장서야 한다. 직장에서는 아부와 뇌물보다 진실함과 능력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분위기를 확산시키자. 공직사회에서는 복지부동한 태도가 아니라 주님을 섬기듯 국민을 섬기는 풍토를 확산시키자. 기독교인 사업가들은 자신의 이윤만을 극대화하기보다 어려운 이웃을 섬기는 일에 앞장서자.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학교는 왕따나 학교 폭력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기꺼이 자신을 내줘야 한다.
교회는 세속원리를 따라 교인들의 귀를 즐겁게 해주는 설교, 신앙생활 잘하고 헌신하고 희생하면 이 세상에서 더욱 성공할 수 있다는 기복주의적 설교, 이기심을 부추기는 설교보다는 세속과 벗되기를 택함으로 하나님의 원수 된 자리에 서려고 하는 교인들을 책망해야 한다. 세속적 부와 권력을 기준으로 교회의 직분자를 세우기보다는 철저히 성경의 원리를 따라 신앙과 인격을 기준으로 선출해야 한다. 교인들이 낸 헌금을 비성경적인 성전건축이란 헌금으로 낭비할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과 발이 돼 어려운 이웃들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성도와 교회의 구별성을 회복하는 것이 소금과 빛으로서 이 부패하고 어두운 세상을 살맛나게 하며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요 삶이다.
주께서 대한민국 기독교인의 1%, 아니 0.1%, 아니 다니엘과 세 친구와 같은 단 네 명이라도 거룩함과 구별됨을 생명같이 여기는 마음을 갖게 하셔서 이 부패한 사회를 변화시켜 주시길 기도한다. 그리할 때 초대교회처럼 두려움을 주며 함께 칭찬을 받는 교회, 이 사회의 도덕의식을 함양함으로 자유대한민국을 바르게 세우는 도구가 될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