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 용서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

 

김대운 목사(수원경성교회, 예장 합동)
김대운 목사(수원경성교회, 예장 합동)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복이 있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나누는 교제다. 이 교제는 소중하고 참으로 달콤하다. 그러나 이 아름답고 복된 교제를 무너뜨리는 것이 있으니 바로 용서하지 않는 마음이다.

사실 구원 받기 이전에 우리 신자들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이였다. 그러나 구원 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되어 함께 주님을 섬기는 삶을 살게 되었다. 그런데 구원을 받았으나 아직 죄악 된 육신의 본성이 남아 있어서 한 형제가 다른 형제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피해를 받은 형제가 가해자인 형제를 용서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사과를 하는 데도 그 사과를 받아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이 두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렸던 아름답고 복된 교제를 더는 가질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런 상태를 과연 주께서 기뻐하실까?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을 한 형제와 자매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 불러주신 주님은 그 교제가 깨어지기보다 아름답게 지속되기를 원하신다. 이러한 형제의 연합은 주님의 기도 제목이기도 했다(요한복음 17:11). 예수님은 마태복음 18:21-35에서 이 주제를 다루셨다. 이 주제에 대해서 다음의 5가지 소제목으로 묵상해 보자.

 

(1) 용서의 의미

용서는 나에게 해를 가한 사람을 마치 그 해를 가하지 않은 사람으로 대해주겠다는 마음가짐에서 출발한다. 이런 마음 자세가 있을 때 나올 수 있는 자세다. 21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주님께 여쭤보았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 구절에서 베드로가 사용한 용서라는 단어는 27, 32절에서 쓰인 탕감이란 단어와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이 두 구절에서 쓰인 용서(탕감)’는 그의 일만 달란트의 빚을 마치 없는 것처럼, 채무 관계가 성립되기 이전의 상태로 그를 대우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베드로가 여기서 쓴 용서라는 단어는 마치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대할 때 자기에게 아무런 피해를 주지 않은 사람으로 대하는 자세를 의미한다. 용서라는 단어는 피해를 입은 일이 발생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가해자를 대하는 것이므로 용서한다라는 말은 곧 가해자를 향하여 어떤 악의나 적대감, 복수할 생각조차 품지 않음을 의미한다.

물론 이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용서의 의미다. 만일 우리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의 의미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입술로 용서한다라고 말해도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를 실천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사람은 용서를 이렇게 정의했다. 용서는 꽃이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때 내는 아름다운 향내와 같다.” 얼마나 적절한 정의인가? 누군가 우리를 짓밟았을 때, 그가 우리를 짓밟지 않은 것처럼 그를 대해주는 아름다운 향기를 내는 것이 용서다. 짓밟힐수록 더 진한 향기를 내는 꽃처럼, 그리스도인의 용서의 폭과 깊이와 넓이가 커질수록 더욱 진하고 아름다운 향기를 내뿜게 된다.

용서는 꽃이 사람들의 발에

짓밟힐 때 내는

아름다운 향내와 같다.”

 

(2) 용서의 횟수, 빈도

21절에서 베드로는 주님께 몇 번이나 용서해야 되나요?”라고 질문을 드렸다. 이 질문이 왜 나왔을까? 주님은 앞서 마태복음 18:15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베드르는 이 말씀을 듣고 주님께 용서에 대하여 질문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주님은 먼저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에 우리는 이 원칙을 따르지 않는다.

한 형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우리가 그 피해자가 되었을 때 주님의 명령을 따라 그와 단둘이서 이 문제를 먼저 해결하기보다 공개적으로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기 시작한다. 그러나 주님은 분명히 먼저 그 형제와 먼저 만나라고 명령하셨다. 그가 행한 일이 주님께 대한 범죄일 뿐 아니라 피해자에게 행한 죄임을 먼저 깨달을 수 있도록 설득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만일 자신의 범죄 사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범한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면 그 형제를 얻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이렇게 돌이키면 당신과 그의 관계는 지켜질 수 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의 의미를 바르게 이해했다. 그 형제를 개인적으로 찾아가서 만나기 전에 먼저 그를 용서해야 한다는 말씀이었다. 왜냐하면 먼저 용서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 형제에게 찾아가면, 그 형제는 상대의 얼굴에서 자신을 향한 적대감을 금방 읽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형제의 돌이킴을 위한 첫걸음조차 띨 수 없게 된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유대인들은 당시에 용서의 허용 한도치를 갖고 있었다. 그들은 한 사람을 세 번까지 용서할 수 있다는 규칙을 갖고 있었다. 이 허용치를 벗어나면 더는 용서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몇 번이나 잘못하였는지 계산을 했다. 세 번까지는 용서해 주었다. 그러나 그 한도치를 벗어나면 더 이상 용서하지 않았다. 이런 유대교의 관습에 비춰보았을 때, 용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세 번보다 더 많은 용서를 원하시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베드로는 유대교의 허용한도치의 두 배에 해당하는 수보다 조금 더 관대한 7이라는 숫자를 제시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유대인의 관점에서 7은 완전수가 아닌가? 그러나 그는 아직 주님이 얼마나 많이 용서를 원하시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주님은 22절에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 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주님은 그가 제시한 ‘7’이라는 완전수에 ‘70’을 곱한 수를 제시하셨다. 주님은 이를 통하여 베드로가 끊임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해 주셨다. 우리는 이 말씀에 따라서 제한 없이 용서해야 한다. 그가 얼마나 많은 잘못을 범했는가를 따지지 말고 허용한계치 없이 용서해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수준의 피해를 볼 때도 있다. 우리는 그때 이것만은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베드로에게 주신 주님의 대답에 비춰볼 때, 과연 우리가 용서하지 않아도 될 한 가지 예외 사항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만일 우리가 그의 죄와 내가 받은 피해가 너무 크다고 생각하여 그 예외 사항을 양보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국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죄, 주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혹 당신에게 범죄 한 사람을 용서했다고 가정해 보자. 당신이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는데, 그가 그 잘못을 또 범했다. 당신은 또 용서해 준다. 그런데 그가 또 당신에게 피해를 주었다. 당신은 그대로 용서해 주었다. 그러자 그는 또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다. 당신은 또 용서해 주면서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더 이상의 용서는 없어!” 당신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생각하나? 주님은 누가복음 17:4에서 이렇게 명령하셨다.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하루 일곱 번씩 같은 죄를 반복하면서 용서해 달라고 요청하면 우리는 그를 용서해 줘야 한다. 우리가 그를 용서하지 않으면 주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된다. 레위기 19:18은 이렇게 용서를 명한다.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우리가 만일 용서하기보다 원한을 품고 있다면 우리는 주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형제가 찾아와서 사과하면서 용서를 구하면 그를 벌써 용서해 줬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게 만들어 줘야 한다. 얼마나 많은 죄를 범했든지, 얼마나 큰 죄를 범했든지, 얼마나 자주 죄를 범했든지, 우리에게 와서 용서를 구하거나 구하지 않거나 우리는 그를 용서해야 한다.

 

(3) 용서의 의무

우리는 용서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에는 용서의 규칙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하나님께 범한 엄청나게 큰 죄를 용서해 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범한 작은 죄들을 용서할 도덕적 의무를 지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용서규칙이 22-33에서 상세하게 주어졌다.

23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회계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주님은 22절에서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말씀하신 후 곧바로 이 비유를 시작하셨다. 이 비유에 일만 달란트 빚진 종이 나온다. 당시 하루 노동자의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이었다. 그러므로 노동자가 1달란트를 모으려면 6,000일 동안 일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 동관은 1만 달란트의 빚을 지고 있었으니, 무려 60,000,000일에 해당하는 삯의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종에게는 채무 상환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왕은 그 부인과 자녀들과 모든 소유까지 팔아서 채무의 일부라도 변제하라고 명령하였다.

이 명령을 들은 종은 엎드려 상환 일자를 연기시켜주기를 간청하면서 그가 할 수 있다면 모든 빚을 갚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자 왕이 어떻게 했나?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의 빚을 탕감해주었다. 마치 그가 돈을 빌리지 않은 것처럼 그의 모든 빚을 장부에서 삭제해 주었다. 그런데 이 종이 무슨 짓을 했나? 집으로 돌아가는 겨우 100데나리온 빚을 진 동관을 만났다. 그의 목을 잡고 돈을 갚으라고 종용하였다. 그 동관이 엎드리어 상환일을 연기해주기를 간청하자 그 요구를 거부한 채 감옥에 집어넣고 말았다. 이 일을 본 동료들이 왕에게 모든 내용을 보고하였다. 그러자 왕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서 이렇게 말했다.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그리고 진노한 왕은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수감시켜 버렸다. 그는 자기의 동료를 불쌍히 여겨 그의 빚을 탕감해줘야 했다. 왕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가 갖고 있던 도덕적 의무였다. 주님은 35절에서 이 비유의 결론을 내려 주신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이 비유에서 왕은 주님이시고, 종은 우리다. 우리는 주님께 말로 할 수 없는 죄를 범했다. 그 죄에 대한 벌은 당연히 무서운 지옥의 형벌이었다. 우리는 영적으로 완전히 파산한 자들로 이 죄의 벌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우리의 빚이 완전히 탕감되었다. 주님은 그렇게 우리를 용서해 주셨다. 주님은 우리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대우해 주신다. 누군가 우리에게 죄를 범해도, 그것이 과연 우리가 주님께 범한 것보다 클 수 있을까? 지극히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용서하지 않는다. “나는 결코 그가 나에게 준 피해를 잊을 수가 없다. 결코 그를 용서할 수 없다!”라고 외친다.

우리가 이렇게 용서하기를 거부할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용서 법칙을 거부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 우리는 용서해야 할 도덕적 의무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가 어떤 죄를 범했든지, 그 죄는 우리가 주님께 범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를 용서해야 한다. 마치 그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그를 대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도덕적 의무다.

 

(4) 용서의 방식과 태도

우리는 진실하게 용서해야 한다. 주님은 35절에서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이라는 조건을 말씀하셨다. “중심으로”,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용서하라는 말씀이다. 이는 우리의 용서가 진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가끔 그를 용서했다고 말하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는 여전히 그를 향한 적대감이 남아 있다. 이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진실한 순종이 아니다. 용서는 우리의 마음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우리는 그가 그 죄를 범하기 전의 상태처럼 그를 대해야 한다. 그것이 주께서 말씀하신 진실한 용서다.

그가 죄 범하기 전의 상태처럼

그를 대해야 한다.

(5) 용서를 거부한 결과

우리가 용서를 거부할 때 주님은 우리에게 진노하셔서 우리가 그를 용서할 때까지 징계하신다. 34절과 35절은 용서하지 않은 종을 향한 왕의 진노와 함께 그에게 부과된 형벌이 무엇인지 말해준다. 그 빚을 다 갚도록 저를 옥졸들에게 붙이니라.” 그리고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진심으로 용서하지 않을 때 주님은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여기서 우리의 구원론을 다루신 것이 아니다. 용서하지 않을 때 우리가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 죄에 대해서는 이미 주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으로 그 형벌을 받으셨다. 우리는 결코 그 형벌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로마서 8:1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따라서 주님의 의도는 아버지께서 우리를 징계하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은 우리가 완고하게 용서를 거부할 때 징계하신다. 우리가 그 형제를 용서할 때까지 징계의 강도를 높이신다. 그리하여 결국 우리가 그를 용서하게 하신다.

이렇게 우리는 용서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용서는 그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으로 대해주는 것이다. 우리는 무한대로 용서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용서라는 의무를 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말로 할 수 없는 큰 죄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 죄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한 잘못들은 용서해 줘야 한다. 물론 우리 눈에는 우리에게 범해진 잘못이 엄청나게 크게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범한 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용서의 태도는 진심으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용서해야 한다. 용서를 거부할 경우, 우리에게 진노하셔서 용서할 때까지 징계하신다.

 

은신처, The Hiding Place의 저자인 코리텐 붐 여사는 자신의 경험담을 이렇게 말해준다. 1947, 독일 뮌헨의 한 교회 지하에서 그녀는 용서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주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신 일을 설명하였다. 우리가 고백한 죄를 주님은 깊은 바다의 바닥으로 던져 버리신다는 이야기였다. 이야기가 마치고 사람들이 일어날 때, 그녀는 한 회색 코트에 갈색 모자를 손에 들고 있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녀는 그 남자를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언니 베시가 수감되었던 라벤스브뤼큭 수용수의 간수였다. 그 남자는 그녀에게 다가와서 손을 내밀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고백한 죄를 주께서 바다 깊은 곳으로 던지신다는 아주 훌륭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코리텐 붐은 그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의 얼굴을 다시 마주한 순간 과거 라벤스브뤼크에서 겪었던 끔찍한 기억들이 전부 다시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녀는 당시에 그가 입었던 청색 유니폼과 챙이 달린 모자가 떠올랐다. 그리고 불빛들 아래 옷과 신발들이 쌓여 있는 아주 넓은 방 안에서 그녀가 겪었던 냉혹하고 끔찍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그 방에서 그녀와 그녀의 동생 베시는 완전히 발가벗겨진 채로 그 남자 앞을 지나가야 했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 남자는 손을 거둔 후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언급하신 그 라벤스브뤼크 수용소에서 저는 간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제가 그곳에서 행했던 잔인한 일들을 주께서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당신의 용서를 받고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의 손을 내밀었다. 자매님, 저를 용서해 주시겠습니까?”

코리텐 붐은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대답했다. 그러나 그녀가 주님의 가르침에 순종하려면 그 남자를 용서해야 했다. 그리고 용서는 의지의 문제임을 인식한 코리텐 봄은 조용히 속으로 기도했다. 주님, 그를 용서할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주님은 그녀의 기도를 들으시고 용서할 수 있는 힘과 그를 주체할 수 없도록 사랑할 수 있는 마음까지 주셨다. 그 힘으로 그녀는 자신을 향하여 뻗은 그 남자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울면서 그 남자에게 말했다. 진심으로 형제님을 용서합니다.” 그렇게 수용소의 간수와 죄수였던 사람이 함께 손을 맞잡고 꽤 오랫동안 서 있었다.

코리텐 붐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주님의 사랑을 이렇게 강렬하게 느껴본 적이 없었습니다.” 그를 용서함으로, 전혀 그런 죄를 지은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의 손을 잡아주었을 때 그녀는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놀라운 주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당신은 죄를 범한 형제의 죄를 용서했나? 혹 용서를 거부함으로 주님 앞에 불순종하고 있지 않나? 당신은 그 죄를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주님께 그 형제를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하라. 그 형제를 그 죄를 범하지 않은 사람처럼 대할 수 있도록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라. 용서함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을 이루는 삶을 살라.

 

*미국 Biblical Theological SeminaryWilliam N. Harding 교수님의 Unforgiving Christian을 읽고 정리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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