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 보여 줄 땅으로 가다

  • 입력 2021.11.16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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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138) 소명(Calling)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생전에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고, 밟을 수 없지만 아브라함은 솔라 피데(sola fide), 즉 오직 믿음으로 바라보고 걸어갈 뿐이다. 믿음의 장은 마치 바둑의 미생 같은 삶을 살았던 인물을 대거 등용하여 열거하였을까? 완생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이며 왕적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그 때에 이루어진다. 바둑에서 미생(未生)’은 두 집을 만들어야 완생’(完生, 완전히 살아 있는 상태)이 되는 바둑에서 한 집만 있어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상태를 말한다.

예수님이 완성(완생)이고 알파며 오메가다. 예수님이 최고다. 미생같은 인생을 살았던 신앙의 영웅들에 비해 왕이며 대제사장이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과 비교할 수 없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완생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여 예비한 더 좋은 것이 재림 때 공개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전에 아무리 날고 기는 영웅일지라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는 애기이다. 믿음의 영웅들을 비롯한 독자들은 오직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더 좋은 것인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의 우월성에 대한 논지는 계속된다. 믿음의 장이라고 해서 왕이시며 대제사장에 대한 저자의 열심히 멈춤이 아니라 더 날개를 단 것이다.

 

1. 갈 바를 알지 못하고 진행하는 믿음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다.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간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그의 믿음을 능동적 순종하였음을 표현한다. 그는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기 때문에 그것은 훨씬 더 두드러지는 것이었다.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을 포기하고 전혀 생소한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믿음의 근본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 눈에 보이는 땅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순종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유업이 될 땅을 약속받았지만 그 땅을 향해 나설 때 그곳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사전 지식이 없다고 출발선에 멈추거나 주저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정보가 아니다. 그곳을 주실 것이라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믿었다. 믿음은 항상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한다. 심지어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때조차 그렇게 한다. 독자들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맡기고 그분이 최종적인 유업을 주실 것을 믿어야 한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노아의 믿음과 유사성과 차이점이 있다. 둘 다 장래에 있을 일에 약속을 받았다. 믿음으로 접수하였고, 순종하였다. 전자는 옛 세계 역사의 마지막 에피소드에 해당한다. 후자는 창세기 9-11장의 이야기 전개의 종착점에 해당하지만 동시에 현재 세계에서 앞으로 전개될 구속 언약에 있어 배아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구체적인 면에도 차이가 크다. ‘하나님은 디테일에 있다’(God is in the details)는 독일 태생의 미술사학자 아비 바르부르크가 1925년 강의 메모에 남긴 말이다. 노아에게는 방주의 크기, 공사기간, 승선 인원, 짐승의 숫자까지 세세하게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지 그 땅이 어디에 있는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 얼마나 큰지 일체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이런 구체적인 인폼이 없는 상태에서 수락을 하였다. 이 점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높이 평가하는 점이다.

하나님이 지시하신 보여 줄 땅은 어디인가. 많은 문헌이 말하는 가나안인가. 아니면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하늘 도성인가. 저자는 아브라함이 사람의 손으로 짓지 아니한 하늘 도성이 그의 참 유업이라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은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서 계속 보는 것으로가 아닌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것을 믿는 사람으로 행동한다. 그의 삶이 그 이후의 모든 세대에 믿음의 조상으로서 인정을 받도록 하는데 성공하였다. 그가 순례자의 여정을 시작한 것은 이전에 그곳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그 땅을 발견하지 못해 속상해하지 않았다. 볼 수 없었고 보려고 하지 않는다. 몸소 자신의 명의로 소유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순례의 여정을 시작하고 포기하지 않은 까닭은 자신의 판단과 정보력이 아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하였기 때문이다. 새로운 땅, 즉 기업으로 얻을 땅을 하나님이 약속하였기에 그 하나님을 믿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향해 보여 질 땅으로 가라고 명령했다. 아브라함의 궁극적 목적지는 하나님의 하늘 도성이다. 아브라함의 갈 곳을 정확히 밝히지 않았다. 그의 신속한 순종은 그를 전혀 알지 못했던 곳으로 이끌어갔다. 그 후에는 그 땅을 기업으로 얻게 되었다. 히브리서에서 기업의 내용은 가나안 땅이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위해 준비하신 도성이다.

이미지 출처 : https://www.freebibleimages.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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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가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보여 주셔야 갈 수 있고, 볼 수 있고, 소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었다(15:6). 아브라함이 모험심과 호기심을 동원하여 찾으려고 하지 않는다. 물리적 수단을 동원하여 정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보여 주셔야, 즉 계시가 있어야 갈 수 있고, 볼 수 있고, 기업으로 얻을 수 있다. 하나님이 지시하는 땅으로 가는 것은 순종의 우선적 동기가 아니었다.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게 아니다. 오히려 순종에 대한 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는 75년 동안 보이는 세상을 벗 삼아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보이지 않는 세계’, 즉 유업으로 얻을 땅을 향한 여정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믿음의 본보기가 된다.

하나님이 75세의 고령 아브라함에게 찾아와서 말씀하실 때 에 대한 말씀으로 이주하도록 명령하셨다. 이사든 이민이든 어떻게 이동이 가능한가? 최소한 목적지는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동방의 에덴동산을 만드신 후에 아담을 거기에 두셨다(2:8). 아브라함에게는 그와 같은 동산으로 이끄시지 않았다. 하나님이 되게 하실 것을 믿었다. 현재의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약속하신 분을 믿을 뿐이다. 마치 현재에 그 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믿고 걸어간다.

이민을 간다고 해도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 기간 또한 무시할 수 없다. 이동 중에 발생할 위험요소도 준비하지 않을 수 없다. 초행길이요, 미지의 세계로 가게 되면 지도는 필수, 최소한 나침판 정도는 손에 쥐어야 목적지를 향해 덜 시행착오하고 도착할 수 있다.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였다. 그것이 성취될 만한 징조나 힌트가 전혀 보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믿고 나아갔다. 약속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내가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신 말씀 외에 전혀 아는 바가 없는 곳을 향하였다. 그는 갈 바를 알지 못하고나아갔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곳을 향해 나아갔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멈추라고 명령하실 때까지 계속 갔다.

하나님께서 이삼십 대도 아닌 칠십 중반은 넘어가는 노인에게 목적지도 알려 주지 않았다. 지도나 네비게이션을 손에 쥐어주지 않았다. 막연하게 가라고 했다. 이 사실을 모세에게 일러 주었고, 기록하게 한다. 모세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창세기 12장을 기록하면서 우리 조상들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약속이라면 토를 달지 않고 믿음으로 순종하구나하는 생각을 했을지 모른다. 아브라함 자신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신이라면 굳이 인간 편에서 고주알미주알 다 알고 행동할 것이 무엇이냐. 다 알아서 하겠지. 이 나이에 믿음의 모험을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한데 따지고 할 것이 있겠는가? 일단 이삿짐부터 싸서 가다보면 알려 주시겠지. 이런 여유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것이 믿음이다. 어린아이가 부모를 계산 없이 받아들이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드리는 자세가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 같은 존재를 창세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며, 인간 편에서는 늦은 것이 더 하나님의 일을 확실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감개무량하가? 젊었을 때 불렀다면 연봉을 확인했을 것이고, 하루 근무시간은 몇 시간인지 따졌을 것이고, 수당이나 보너스가 얼마인지 물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찾아오시기 전에 믿음이 좋아서가 아니요, 요리조리 따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라 만사오케이하고 넘어간 것은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일을 시작하였으니 다 알아서 할 것이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약속하신 것처럼 아브라함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이다. 반대로 그리스도를 믿기를 거부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일지라도 그것은 허사이다. 칭의는 육체적 혈통에 의해 얻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의해 얻는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한 그 땅을 실제로 소유하지 못했다. 단지 약속으로만 소유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부한다. 이 위대한 족장은 믿음을 가지고 믿음대로 산 자로서 신약에 여러 차례 나온다.

바울은 아브라함에게 믿는 모든 자의 조상”(4:11)이라는 위대한 칭호를 부여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앞서 갔기에 우리 또한 하나님이 약속하신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영적 자손 중의 한 사람으로 구원을 받았으며, 또한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가 반드시 본받아야 할 본보기로 제시한다.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되는 믿음의 조상들을 포함한 모든 믿음의 영웅들이 하나 같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한 것을 생전에 확인하거나 경험하지 못하였다고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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