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근동지방의 노동자들은 아침 일찍 하루가 시작되기 때문에 정상적인 식사를 먹는 대신 간단하게 해결했다. 작은 빵 덩어리, 치즈, 무화과 열매, 올리브 열매 등을 가지고 가면서 일터로 가는 길에 그것들을 먹었다. 점심은 간단하게 먹고, 일이 끝난 저녁에는 만찬을 하였다. 이집트인들은 그 날의 제일 중요한 식사를 정오에 하였다(창 43:16). 식사 시간은 허기진 배를 채우는 시간이 아니었다. 식사시간에 사람들은 우정을 나누고 대화를 하는 창구로 활용하였다.
레위의 집에서 가졌던 식사는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이제 집을 떠나고자 하기 때문에 그를 위해 베푼 송별회였을 수 있다. 혹은 단순히 레위가 자기 친구들도 예수님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베푼 잔치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식사 때 예수님은 기대어 누우셨다. 이 식사가 잔치임을 보여 준다. 잔치 때는 대개 ‘앉아서’ 식사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좀 더 공식적이거나 축하를 위한 잔치에서 더욱 그러했다. 누가는 이것을 ‘큰 잔치’라고 부른다(눅 5:29). 마가가 이런 용어를 사용하면서 유대인들이 시대의 끝에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더 큰 메시야적 잔치에 대한 암시를 주고자 의도하는 듯하다. 식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연장이다. 메시야가 장차 오시어 하나님 나라에서 죄인들과 자리를 같이 하여 완성될 그 날의 소망과 예상이다. 이처럼 식탁에 기대어 누워 있는 것은 유대인을 비롯한 Greco-Roman 세계의 잔치 자리에서 정찬 때 취하는 자세다. 손님들은 나지막한 탁자 주위에 마련된 기다란 정찬용 의자에 기대어 누웠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일상적인 식사 시간에 눕기보다는 그냥 식탁에 앉곤 하였다. 사람들은 팔 밑에 쿠션을 낀 채 옆으로 누워 음식이 놓여 있는 짧은 식탁을 마주하여 식사를 하곤 했다. 마가가 자신의 독자들이 이곳에서 미래의 메시야적 잔치에 대한 암시를 생각하도록 의도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식사는 하나님의 은혜의 연장이다
1. 왕의 잔치에 초대 받은 사람들
마태가 제자가 된 기쁨으로 잔치를 베풀었을 때 예수님과 제자들 외에 세리들과 죄인들이 대거 참석을 했다. 예수님과 함께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식사하는 장면은 용서받은 자들로 구성된 새로운 공동체의 포괄성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그 자리에는 가장 그럴 법하지 않는 자들 역시 부름을 받는다.
바리새인들이 볼 때 정결법을 따라 식사를 하지 않는 세리들과 불법자라는 말과 이음동의어(異音同意語)로 쓰이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눔으로써 제의적인 정결함이 훼손되는 문제를 감내해야 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께서 그 나라로 죄인들을 부르신 것과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은 것은 죄 사함의 제공을 가시적으로 선언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식사 자체도 메시야적 잔치를 암시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식탁 행위는 단순히 종교적이고 경건한 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은 것이 아니라 세리와 죄인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죄 용서를 경험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참여하도록 초대를 받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마가는 다소 이 특별한 식사에서 메시야적 잔치의 상징을 보았을 가능성이 높다. 만일 그렇다면, 그 손님 목록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그런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에 죄인들을 부르신다고 한 예수님의 부름은 이 식사의 사귐의 근거가 메시야의 용서이며 식사 그 자체는 메시야의 잔치에 대한 예상임을 암시한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을 나누는 것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제공하는 있음을 보여 준다. 일종의 상징적 행위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식탁을 나누시는 것은 메시야가 주빈인 식탁에서 그들과 함께 식사하는 것이며, 저희들에게 하나님과의 사귐을 펴는 것이다.
제자로 선택받은 세리 마태는 물론이고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로 믿고 좇는 세리들과 죄인들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이다. 이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이 식탁을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방편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공급하심을 경험하는 귀중한 시간이다.
마태가 예수님을 위해 잔치를 베푼 주인이 경우에(마 9:1) A.D. 1세기 Greco-Roman 식사의 공식적 형태를 따르고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 뿐 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세리들과 죄인들이 동석하였다. 식당은 거리를 향해 개방되어 있다. 출입구 근처에 천막들이 쳐 있다. 행인들이 호기심에 찬 눈초리로부터 어느 정도 식사하는 손님들의 모습을 보호하는 기능을 했다. 당시 식사 습관으로는 사람들이 천막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고 그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하는 것이 허락되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마태가 베푼 잔치에 초대를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식사 에티켓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도 바로 이러한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마 9:11). 하나님 나라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간주된 사람들조차도 예수님에 의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도록 초청을 받았다. 이것은 예수님이 사회의 버림받은 자들과 함께 식사를 함으로써 입증되었다.
2.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하나님으로부터 오셨다
예수님의 응답은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전자는 3인칭으로 된 속담이다. 후자는 1인칭 진술로 예수님의 사명의 목적을 밝힌다. 둘 다 동일한 주제를 다룬다. 곤경에 빠진 자들의 우선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말은 예수님 당대의 금언이다. 헬라 및 유대 문헌과 초기 교회 문헌에서 수많은 병행구를 지니고 있는 속담이다. 이 속담은 신체적 질병의 언어를 사용하여 은유적으로 요점을 밝힌다.
‘의학의 아버지’라는 그리스의 히포크라테스는 의사란 환자를 과학적으로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라 회복될 때까지 가족처럼 아끼고 돌봐주는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고대 로마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의 이러한 정신을 이어받아 치료를 ‘정성 들여 아끼고 돌봐준다’는 의미에서 curare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인공지능 의사는 환자의 혈색, 얼굴 때깔, 불안 표정, 주머니 사정, 가족 관계, 부양의 문제 등을 모르고 처방한다. 그런데 환자의 병은 환자의 삶에서 결정된다. 이 속담은 관례적으로 영적인 병자들에게 연결되었을 것이다. 의사가 병든 자들을 위해 시간을 쓴다. 의사가 병자들을 돌보기 위해 어울려야 하는 것은 일반적인 사실이다. 이와 같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죄인들에게 죄 사함과 하나님의 나라를 베풀기 위해 왔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죄를 사하기 위해 예수님이 신적 권한을 행사하시는 일에서 이미 드러났다. 이제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함으로써 입증된다.
예수님이 인용한 속담은 예수님이 사귀는 사람들을 옹호한다. 그들의 영적 필요를 채우는 것이 그의 사명이라는 것을 근거 삼아 그렇게 한다. 이 잠언은 하나님만이 유일하게 참된 치유자임을 상기시킨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고 말씀한다(출 15:26). 표상적인 의미에서 백성들의 죄를 치유하는 유일한 분은 하나님이시다. 필로는 하나님을 ‘영혼의 병을 고치는 유일한 의사’라고 묘사한다.
디오게네스는 고대 그리스의 노숙 철학자다. 그는 의사가 병자들에게로 가야 하듯이 현인은 어리석은 자들과 섞여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의사들이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서 환자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역시 죄인들에게 죄 사함을 부여하기 위하여 죄인들을 대상으로 사역한다. 이 말씀에서 병행을 유지하기 위해 ‘세리’가 생략되어 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의 죄를 용서할 권세와 병을 고칠 능력이 있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 주신다. 그 후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죄인의 범주에 속하는 세리를 제자로 삼는다. 그리고 그와 그의 동료 죄인들과 더불어 먹음으로써 이러한 권한을 입증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세리와 죄인들’에서뿐 아니라 ‘죄를 사하는 권세’에서도 초점에 놓였던 문제다. 선지자 요한의 세례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사명은 ‘죄의 용서’와 관련이 있다.
예수님은 의인과 죄인들에 관한 ‘변증법적 부정’의 형식으로 ‘내가...왔노라’고 말하고 있다. ‘의인’은 풍자적으로 또는 편파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죄인’은 하나님의 부름을 들을 줄 알고 응답하는 겸손한 자들이다. 세리는 바리새인을, 죄인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키고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서기관과 같은 사람들을 부르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온전하게 회개할 필요를 알고 있는 죄인들을 부르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리는 일은 예수님에게 그저 허용되는 정도의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의 사역의 핵심 목적이다. 예수님이 오신 전체적인 목적은 죄인들에게 마음과 삶의 변화를 촉구하는 것이었다. 죄인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마가는 세리 레위의 이야기를 통해 죄를 사하는 예수님의 신적 권세를 보여주려고 한다. 죄를 사하는 능력을 자신을 따르는 세리와 죄인들을 부름으로써 나타났다. 예수님의 어떤 독특한 신적 사명을 소유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분이다. 예수님의 선재성과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왔다는 것을 마가복음 독자들에게 상기시켰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