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의 이단 사면 파동과 합신의 '두 날개' 논란, 고신의 '인터콥' 참여 및 교류 금지를 지켜보며

장대선 목사 (가마산장로교회 담임, 교회를 위한 개혁주의 연구회 회원)

‘이단(heresy)’이란 기본적으로 바르지 않은 길(사상)을 지칭하는 말이다. 특히 장로교단의 경우에는 기본적으로 개혁된 신학(reformed theology)을 표방하는 교단들로서, 그처럼 종교개혁의 시대에 개혁되었던 것에서 이탈한 신학을 일컬어 ‘이단’이라 부른다. 이에 따라 개신교의 입장에서 로마가톨릭의 사상들은 대부분 이단에 속한다.

반면에 로마가톨릭의 입장에서는 개혁신학에 바탕을 둔 장로교단들과 개신교회들이 또한 이단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이단이란 그 기준이 분명하며 단일한 것이지만, 이미 다원화되고 상대화된 시대에서는 자신들이 표방하고 믿는 바에 다른 신학을 일컬어 이단이라 칭할 수가 있는데, 개신교에 대한 로마가톨릭의 규정이 바로 그런 맥락이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개신교회들은 로마가톨릭과 신천지, 통일교, J·M·S 등을 이단으로 분류하지만, 동시에 그 역(易)도 성립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다원화된 현대 종교지형 가운데서의 현상들인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가운데서 지난해 예장 합신 교단은 예장 합동 교단과의 반목을 우려하여 교권주의적인 1인 체제를 위하는 프로그램인 ‘두 날개’에 대한 이단논쟁을 회피(回避)한 바 있으며, 올해에도 노회에서 수의된 ‘두 날개’에 대한 안건을 다루지 않고 기각하고 말았다.

그러나 장로교단의 총회에서 노회가 수의한 안건을 다루지도 않고 기각하는 일은 지극히 비상식적인 것이다. 세속정체에서야 그런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하겠지만, 각 치리회의 독립과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장로교정치에서는 노회의 수의를 그런 식으로 기각(棄却)처리하는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며 비상식적인 처사에 속한다.

이처럼 통합 측 총회의 이단사면 사건과 함께 합신총회의 신학논쟁 기각사건은, 현 시대의 기독교가 갖는 정체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조잡하며, 그런 조잡함 속에서 기독교가 실제적으로 추구하는 것이 사실상 신학이 아니라 실용성에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 그런 와중에서 예장 고신총회가 ‘인터콥 선교회(대표: 최바울)’에 대해 참여 및 교류를 금지하도록 조치한 것은 그나마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필자는 이런 현실 가운데서 개신교, 좀 더 구체적으로는 장로교단들, 조금 더 구체적으로 개혁된 신앙을 고백하는 장로교단들, 즉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교단의 헌법에 표준적인 신앙의 문서로 수록한 장로교단,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여러 차례 수정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가 아니라 수정하지 않은 1647년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아직까지 헌법에 수록하고 있는 몇 몇 장로교단들이 이 시대에 세워야 할 대책은, 소위 ‘이단대책위원회’와 같은 기구들을 통한 논의에 앞서 ‘정통신앙확립위원회(본인이 생각하는 가상의 기구)’를 통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실질적 표준화라고 생각한다.

다원화되고 상대화된 현대의 배경 가운데서도 개혁신학을 표방하는 장로교단들이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것은, 이단적인 사상이나 사역프로그램들에 대한 대책마련이 아니라 과연 자신들이 속한 장로교단이 표방하는 신학의 표준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도록 하는 것이며, 아울러 그러한 신학의 표준 가운데서 어떻게 신앙이 생활로서 자리하게 할 것인지를 숙고하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단언컨대 현제 장로교단들(통합 측과 기·장을 제외한 합동, 고신, 합신, 대신교단)이 지닌 헌법과, 헌법에 명시한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 예배모범)들은 로마가톨릭만이 아니라 그 어떤 개신교단들보다 월등하며 탁월한 신앙의 정수를 담고 있다.

기본적으로 ‘개신교(Protestant)’라 할 때에 장로교회들만큼 오래된 교회가 침례교회이며, 이후로 파생한 것이 감리교회와 성공회 등이고, 이후로 가장 최근에 파생한 교회가 바로 오순절교회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조금 더 세부적으로 들어가 보면 훨씬 복잡하고 다양한 교파 및 교단들의 역사가 있지만 가장 큰 틀에서 보면 위의 설명과 같고, 19세기에 파생한 오순절교회들이 지닌 신앙적 영향 가운데서 대부분의 현대 개신교회들이 파생하거나 변질되는 역사였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무엇보다도 19세기의 경건주의적인 부흥운동과 웨슬레 신학의 영향을 바탕으로 탄생한 오순절교회의 영향은 압도적이어서 한국의 개신교는 처음부터 오순절교회의 영향을 바탕으로 각 교파와 교단들이 시작됐고, 심지어 로마가톨릭조차도 오순절주의의 영향을 상당하게 받은 가운데서 정립되었다고 말할 수가 있다.

그러한 한국교회의 역사 가운데서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정말 장로교회다운 신앙과 실천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온전하게 정립하지 못했다. 심지어 초기 해외의 선교사들에 의해 신학이 전파되고 1907년에 독노회가 수립되었어도, 그와 동시에 평양 대부흥과 같은 부흥주의의 파도가 순식간에 장로교회들까지 휩쓸어버렸고, 이후로도 제대로 된 장로교회의 신학(개혁된 신학)이 펼쳐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런 와중에 대규모 옥외집회를 통한 민족복음화운동 등이 장로교회들을 비롯한 개신교회들의 부흥과 성장의 원동력이었던 것처럼 부각되었지만, 그것은 이미 19세기 파생한 오순절주의의 신앙 가운데서 유래하는 양상으로서, 그것이 결국에는 거품일 뿐이었다는 사실을 그 때에 성장했었던 대형교회들이 생생히 증명하고 있다.

이처럼 한국의 개신교, 그 가운데서도 장로교회들은 아직 장로교회가 무엇이며, 장로교회의 신앙이 무엇인지, 그리고 장로교회의 신학과 개혁신학의 일치점과 차이점이 무엇인지 등 장로교회 자체의 정체성을 전혀 확립하지 못한 가운데 있다. 장담하건데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100년이 넘은 장로교회나 이제 막 개척한 장로교회나 그 어떤 교회도 엄밀한 의미의 장로교회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리고 그것은 지교회만의 현실이 아니라 각 교단들의 실상이기도 하다.

이제는 그야말로 이단들이 그 끝을 모르고 기세등등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가 골몰하고 열중해야 하는 것은 그런 이단들에 대한 대책 이전에, 우리들 자신, 특별히 1647년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아직까지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헌법에 수록하여 표준으로 삼고 있는 장로교단들이, 헌법에 수록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소교리문답, 그리고 예배모범과 같은 표준문서들에 담긴 신학과 신앙의 정수가 무엇인지를 배우고 익혀 그야말로 생활과 삶으로 배어나오도록 하는데 있다고 확신한다.

단언컨대 그런 수고와 노력이 없는 교단들과 교회들은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는 종교적 회집(會集)에 불과하다. 그러니 지금 장로교단들이 심각하게 그리고 화급하게 새워야 하는 것은, 무엇이 이단인가의 문제보다는(이것을 간과라고 생각하지 말기를 바란다) 무엇이 정통인가? 무엇이 장로교회의 정체성인가를 확실히 하는데 있다. 그렇게 하려고 할 때에 비로소 이단의 문제는 자연스럽게 배척(排斥)될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한국의 장로교회들은 이단을 가릴 표준이자 시금석인 ‘정통(orthodoxy)’에 대해 심각하게 무지하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이솝우화의 어느 단편에서와 같이 모든 장로교단들이 영양만점인 개혁신학의 타이틀을 입에 물고서도 냇물에 비친 현대적인 실용신학들의 허상을 탐하다가 이미 물은 개혁신학의 타이틀마저 버리려고 한다는 사실이다. 더 크고 더 안정적으로 규모(規模)화하기 위해서는 그런 것이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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