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384-322 BC)는 “역사 속에서의 자신의 위상”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 최초의 사상가였다. 한 사람에 대한 역사적 평가(위상)는 시대에 따라 다르게 평가되고, 또한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르게 평가된다. 조선 건국의 주역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 1342-98)은 그 위대성에도 불구하고 지난 600년 동안 무시되거나 평가절하되어 왔다. 그러다가 한영우 선생에 의해 그 위대성이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 도올 김용옥 선생에 의해 정도전은 한국이 세계에 내놓을 위대한 혁명가로 재평가되었다.
한일근대사의 시대구분을 우리는 1840년부터 1945년까지의 105년으로 그 기간을 잡고자 한다. 그 까닭은 그동안 동아시아의 역사에 국한된 한일 양국의 역사가 1840년에 일어난 영국과 중국의 아편전쟁을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세계사의 무대에 들어가게 되었고, 이때로부터 시작된 근대화의 역사가 일본이 패망하고 한국이 해방을 맞이하는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중국은 북중국과 남중국으로 나누어지는데, 황하강이 북중국을, 양쯔강이 남중국을 형성하였다. 마찬가지로 한일근대사를 결정짓는 두 강이 있다면 ‘근대화라는 강’과 ‘복음화라는 또 하나의 강’이다. 먼저 근대화라는 강을 통해 일본인의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59)과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1835-1901)라면, 나중에 복음화라는 강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윤동주(1917-1945)와 김교신(1901-45)이다.
일본에서 요시다 쇼인과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근대화의 선각자’로 높이 칭송되고 있다. 이 두 사람은 우리나라 역사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정한론(征韓論)을 주장한 쇼인은 29년이라는 그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직·간접적으로 그를 다룬 책이 무려 1,200권이 넘을 정도이고, 그의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은 메이지유신을 성공시켰고, 이어지는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또한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한 후쿠자와는 일본 엔화 1만원권 지폐에 그의 초상이 실려 있는 인물로서 당대 일본 최고의 문명 개화사상가요 국민의 교사였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사실은 쇼인은 칼로, 후쿠자와는 붓으로 근대화를 이루고자 하였을 뿐, 이 두 사람의 정체성은 근본적으로 같다. 이 두 사람의 뿌리는 하급 사무라이 집안 출신이며, 에도(도쿄)에서 멀리 떨어진 서쪽 변방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근대화, 문명화를 신속히 이루어 서구 열강으로부터 일본을 지켜내고, 나아가 국운의 융성을 통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일본 제국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들의 야망이 실현된 듯 보였으나 그들의 사상 속에 깃든 침략주의는 결국 일본의 패망으로 끝났다. 요시다 쇼인과 후쿠자와 선생은 일본 패망의 원조라는 점에서 그들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가 요청된다.
반면에 한국에서 시인 윤동주를 단지 일제하의 한 시인 정도로 생각하고 있으며, 김교신 선생은 함석헌 선생의 친구 정도로 알고 있을 뿐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그를 잘 모른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단 12:3). 필자는 『하나님의 시나리오 조선의 최후』라는 저서의 헌사를 이렇게 썼다. “이 책을 하늘의 별처럼 영원토록 빛날 詩人 尹東柱와 金敎臣 先生께 바칩니다.” 우리 민족사에 이 두 사람이 왜 이토록 중요한가? 그것은 이들이 그 시대에 우리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 즉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한민족의 정체성(예수적 인간형, 성서적 인간형 확립)을 주형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모든 비밀은 ‘어떻게 죽느냐’에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의 인류 구원’이라는 철저한 역사 섭리 안에서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은 반드시 ‘유월절’에, 반드시 ‘예루살렘’에서, 반드시 ‘십자가 처형’이라는 방식으로 죽으셔야 했다. 그 까닭은 구약 예언의 성취 때문이다.
1945년 2월 18일, 그토록 아름답고 조용한 북간도 명동촌에 비보가 날아들었다. “2월 16일 동주 사망. 시체 가지러 오라.” 일본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이틀 전에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윤동주가 운명했다. 이어서 바로 그곳에서 3월 10일, 평생의 동지인 고종사촌형 송몽규(1917~45)가 눈을 뜬 채 운명했다. 그런데 그다음 달인 4월 25일,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서 일하던 김교신 선생이 발진티푸스에 걸려 1주일 만에 급사했다. 그런데 보름 전인 4월 9일,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했던 본회퍼(1906~45) 목사가 플로센뷰르크(Flossenbürg) 감옥에서 처형당했다.
4개월 후, 어느 날 갑자기 도적같이 8.15해방이 왔고,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렸다. 1945년에 있었던 일련의 역사적 사건들과 이들의 죽음! 특히 윤동주와 김교신의 죽음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하드라마 ‘조선의 최후’에서 윤동주와 김교신의 죽음은 ‘근대화의 종언’을 알리는 막종이자 번제단에 바쳐진 향기 나는 제물이었다.
서구에서 근대화는 1750년대의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 대혁명(1789)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일본의 근대화는 요시다 쇼인의 탄생(1830)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일본의 문명화는 후쿠자와의 구미 여행(1860)부터 시작되었다. 그러한 근대화를 통한 문명화와 그것이 가져온 군국주의가 1945년 8월 15일에 종언을 고했다. 그러니까 이들의 죽음은 근대화와 문명화 및 그에 따른 군국주의의 종언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고, 하나님의 섭리론적 뜻 안에서 이방의 빛으로서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거룩한 죽음이었다(다음 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