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용 교수】 한일간의 역사는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경륜적 섭리에 의한 시나리오

  • 입력 2022.04.11 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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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리사관으로 본 韓日近代史” , 박호용 교수의 한일근대사 강의 (3)

역사문제에 대한 고민을 안고 학부를 졸업한 나는 1983년 봄에 연세대 대학원 신학과에서 <구약학>을 전공하기로 하였다. 전공을 구약학으로 정한 배경에는 이스라엘 역사를 배워서 그것을 언젠가는 한민족의 역사에 적용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그 생각이 40년이 지난 오늘에 와서야 결실을 맺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다.

대학원 첫 학기에 친구와 함께 이대 앞에 있는 영화관을 가게 되었다. 장미희, 신성일, 김추련주연의 <겨울여자>라는 영화를 보기 위해서였다. 이 영화는 1977년에 개봉된 영화로 알고 있는데, 한참 지난 영화를 보러 간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는 내게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겼다. 실은 이 영화는 남녀간의 사랑을 말하는 애정영화이지만, 그 당시 항상 역사문제에 고민을 갖고 있는 나는 이 영화를 보다가 한 장면에 완전히 꽂혔다. 이 영화에 이런 장면이 나온다.

장미희(이화)와 대학 신문기자인 김추련이 처음으로 만나 버스 안에서 대화하는 장면이다. 배경음악으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베르디의 <나부코> 중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이 흘러나오는 가운데 김추련이 이화에게 묻습니다. “실례지만 무엇을 전공하십니까?” “역사를 전공합니다.” “왜 역사를 전공하게 되었습니까?”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를 알고 싶어서요?” 이 말이 내게는 아주 감동적으로 들려왔다. 역사란 다름이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온 이야기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데요?” 그때 이화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지금 대학 2학년 학생이라 역사를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살아온 모습을 세 가지로 나누면, 첫째, 진실이 무엇인지 모르고 아무렇게나 산 사람, 둘째, 진실을 알면서도 주변 사람들의 평판이 두려워 진실을 외면하며 산 사람, 셋째, 진실이 무엇인지 알고 진실만을 항해 똑바로 간 사람입니다.” , 감동이었다.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정의를 내렸다. 그 가운데 20세기 초에 이탈리아의 크로체(B. Croce, 1866-1952)모든 역사는 현대사(現代史)라는 말이 내게 와 닿았다. 크로체의 이러한 주장은 역사란 현재의 눈을 통해서 현재의 문제에 비추어 과거를 보는 데서 성립된다는 것이며, 역사가의 주된 일은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하는 일이라는 말이다.

내게 이 말은 역사를 바르게 평가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있었던 바로 그 당시에 바로 평가하기보다는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현대라는 관점에서 과거에 일어난 사건(인물)을 재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40년이 흐른 그 시점에서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확실한 사실은 정확히 알 수 없다. 사실을 정확히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따라서 모든 것은 결국 해석이다. 해석을 잘하자.” 이것이 오랫동안 품어온 역사란 무엇이냐?”라는 물음에 대한 자문자답’(自問自答)이다.

구약성경에서 지혜로운 사람 두 사람을 꼽는다면 요셉과 다니엘이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의 성공담을 보여주는 이 두 사람은 왕들의 꿈을 잘 해석해 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40:8). “내가 이 은밀한 것을 나타내심은 내 지혜가 모든 사람보다 낫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주신) 그 해석을 왕에게 알려서 왕의 마음으로 생각하던 것을 왕에게 알려 주려 하심이니이다”(2:30).

어떤 해석이 좋고 잘된 해석인가? ‘하나님이 주신 해석’, ‘하나님이 들어간 해석이 아니겠는가. 결국 인생 공부나 역사 공부는 해석을 잘하기 위한 노력이요 과정이다.” 나는 이 책을 쓰면서 이런 질문을 던져보았다. 일제가 저지른 폭력과 만행의 역사, 그리고 한국이 당한 수난의 현실이 조선의 최후의 객관적 사실이다. ‘조선의 최후는 한국인들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역사이고, 일본인들은 잊고 싶은 역사다. 그런데 그것을 다시 끄집어내어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그것은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하게 알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오늘의 시점에서 냉정하게 생각하면서 다시 해석해 보자는 것이다.

어떤 사건의 단순한 사실 여부를 넘어서 그 사건을 바라보는 해석적 관점에 따라 역사에 대한 의미와 평가가 달라진다면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불행한 최악의 역사로 평가되는 한일강제병합’(1910)의 역사도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마치 인생을 한 편의 드라마로 비유한다면 그 드라마를 누가 썼느냐에 따라 작품의 가치는 달라진다. 내 인생 드라마를 남이 쓰면 졸작(拙作)이 되고, 내가 쓰면 평작(平作)이 되나, 최고의 작가인 하나님이 쓰면 최고의 명작이 된다. 한 편의 드라마 조선의 최후를 일본인에 의한 식민사관으로 쓰면 졸작이 되고, 한국인에 의한 민족사관으로 쓰면 평작이 되나, 우리 민족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선하신 하나님에 의한 섭리사관으로 쓰면 최고 감동의 명품 드라마가 된다.

그러니까 우리 민족사에서 가장 불행한 한일강제병합’(1910)의 역사도 섭리사관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이 써 가신 최고 감동의 대하드라마라는 사실이다. ‘조선의 최후는 선하신 하나님께서 새 언약 백성으로서의 한민족을 향한 비밀스러운 경륜적 섭리에 의거하여 시나리오를 쓰신 최고 감동의 명품 드라마요 하나님의 최선의 역사였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역사가 세계사(世界史) 속에 들어가기 시작한 조선 말기의 근대사, 구체적으로 말하면 동아시아 삼국을 흔들어놓은 아편전쟁(1840)부터 일제의 패망과 한국의 해방(1945)까지의 105년의 역사는 이에 대한 가장 좋은 샘플이 될 것이다. 대하드라마 조선의 최후는 최고의 명품 드라마를 만들고자 눈물겹도록 줄기차게 분투, 노력하시는 하나님의 연출이 지극히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이 책은 쓰게 된 동기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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