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근대사 강의> 10회를 맞이했다. 필자가 이 강의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한국과 일본의 지나간 과거 역사를 알고자 하는 지식의 차원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일본을 가리켜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말하는데, 정말 이웃나라 일본은 알아갈수록 우리와 너무나도 다른 나라라는 것을 느낀다. 한일근대사 100여 년을 포함, 300여 년 동안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 한국과 일본은 너무도 다른 길을 걸어 왔고, 그로 인해 한국인과 일본인의 정체성(아이덴티티)은 근본적으로 다르게 형성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에 있다.
특히 유교(주자학, 성리학)의 나라였던 한국이 어떻게 기독교의 나라가 되고. 나아가 민족복음화를 넘어 세계선교의 선두주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세계 선교적 사명, 특히 일본선교의 사명이 한국인에게 있음을 말하고자 함에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한민족의 역사를 이루는 데 중요한 요인이었던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및 그에 따른 고난의 역사를 살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참으로 놀라운 사실은 한반도의 지리와 한민족의 역사가 성지 팔레스타인 땅과 언약 백성인 선민 이스라엘의 역사와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한반도를 ‘동쪽의 이스라엘’, 한민족을 ‘제2의 이스라엘’, 또는 ‘새 언약 백성’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주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팔레스타인)은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땅이었다. 하지만 역사상 그 땅이 그렇게도 중요했던 것은 지정학적 위치(전략적 요충지), 즉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유럽이라는 세 대륙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류 역사는 19세기까지 이 땅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놓고 혈전을 벌인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땅은 바다로 나가기에는 막힌 땅이다. 해양 시대에는 그리 좋은 땅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한반도는 팔레스타인 땅처럼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지만 지정학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땅이다.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대륙과 대양을 잇는 유일한 땅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반도는 팔레스타인 땅을 대신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제2의 성지(聖地)요, 한민족은 이스라엘 민족을 대신할 제2의 선민(選民)으로 하나님이 쓰실 때가 찬 것이다. 서구 해양 세력에 의해 한반도가 세계사 속에 들어온 19세기가 바로 그 시점이었다.
전 지구상에서 팔레스타인 땅과 가장 유사한 땅이 있다면 바로 ‘한반도’이다. 팔레스타인 땅처럼 한반도는 지리적인 측면에서 보면 크기도 작고, 산야가 많아 발전에도 지장이 많은 땅이다. 하지만 한반도가 중요한 것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남동쪽에 애굽에 비견되는 일본이 있고, 서북쪽에 아시리아와 바벨론에 비견되는 중국과 러시아가 있고, 동쪽 태평양 너머에 그리스-로마에 비견되는 미국이 있다. 한반도는 전 지구상에서 팔레스타인 땅과 가장 닮았다는 점에서 ‘제2의 팔레스타인’(성지 가나안 땅)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반도는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는 대륙과 대양을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갖고 있는 나라이며, 이스라엘 민족처럼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인해 한민족은 역사 전체가 고난의 역사를 살아온 민족이고, 디아스포라 유대인처럼 한국인은 현재 전 세계에 가장 많은 나라에 흩어져 있는 디아스포라 민족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반도는 제2의 팔레스타인 땅이고 한민족은 제2의 이스라엘 민족이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해 탐스러운 과일 한반도를 손에 넣기 위에 침략을 감행했으나 실패했다. 그 결과 300여 년을 기다리며 철저히 준비해야 했다 그러면서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애써 외면하면서 부정적으로 말한 일본은 한민족의 정체와 낙후된 문명을 반도적 위치 때문이라고 강변했다. 일찍이 대학자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조차도 반도의 운명을 슬퍼하면서 “반도 성격”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개탄했다. “안타깝다. 우리나라 사람들이여, 좁은 우리 속에 갇혀 있구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고 산이 주름 잡아 사지를 꼬부리고 있으니 큰 뜻인들 어찌 채울 수 있으랴.”
일제 시절, 공부깨나 했다는 지식인들은 “(갈릴리 땅)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며 한반도(한민족)를 향한 자조 섞인 빈정거림에 빠져 있었다. 바로 그 시절, 김교신 선생은 달랐다. 김교신은 일본에 유학 가서 영문과에 들어갔다가 지리박물과로 전향하였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적 뜻이 있었다. 한반도와 세계 지리를 연구하면서 그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가 갖는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발견하였다. 이것이 김교신의 <섭리적 민족지리관>이다. 김교신은 우리 민족의 높은 이상을 우리 역사와 지리의 긍정적 이해와 기독교의 섭리사관에서 이끌어 내고자 했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이 고유한 인격과 사명을 갖는 것처럼, 각 민족 역시 저마다 고유한 ‘민족적 사명’을 갖는 것으로 여겼다. 이를 잘 나타난 것이 그의 “朝鮮 地理 小考”이다.
그는 한반도는 세계를 걸머지고 일어서려는 기지개를 펴려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민족은 어떤 민족인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죄와 벌』에서 소냐는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십자가 목걸이를 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 십자가를 목에 걸고 우리 함께 고난 받으러 가요.” 그렇다. 윤동주의 시 <십자가>에서 예견되었듯이, 한민족은 운명적으로 세계의 고난을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의 민족>이다(다음호에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