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조선은 일본에 망했다. 그런데 꼭 50년 전인 1860년을 기점으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애굽에서 노예생활하던 히브리인들은 애굽 왕의 탄압으로 큰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출 1장). 그들은 수백 년동안 지난한 고통에 아우성을 치면서도 도무지 애굽을 떠날 줄을 몰랐다. 히브리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 삼고자 했던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을 출애굽시켜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데려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일강의 풍요로움에 젖은 히브리 백성들은 그 땅을 떠나려고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강제로라도 그들을 그곳에서 떠나게 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취한 방식이 바로 왕의 영아학살이었고,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이었다. 마침내 하나님은 그들을 강제로 애굽 땅을 떠나게 했다.
마찬가지로 1860년이 되자 한민족이 한반도를 떠나기 시작했다.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 강제로라도 떠나게 하신 것이다. 나일강이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에 애굽을 떠날 줄 몰랐던 히브리인들처럼 고난이 극에 달할 때까지 한민족은 금수강산 한반도를 떠날 줄 몰랐다. 수백 년 동안 신분 차별, 지역 차별, 적서 차별, 남녀 차별 등 온갖 차별, 지긋지긋한 당파 싸움과 세도정치, 삼정(三政)의 문란과 관리들의 가렴주구, 거기에 천주교 박해에 이르기까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한반도를 떠날 줄 몰랐다. 그런데 드디어 카이로스적 때가 찼다.
1860년, 그해 무슨 일이 있었는가? 일본에서는 근대화의 선각자인 후쿠자와 유키치가 첫 해외여행으로 미국을 향해 떠났다. 귀국 후 그는 ‘탈아론’(脫亞論)을 주장했고, 이후 일본의 근대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또한 영불 연합군은 베이징(북경)을 점령했는데, 이때 러시아는 영프 양국과 청나라를 중개하는 대가로 ‘러청북경조약’을 맺어 우수리강 동쪽 연안 40만 평방킬로미터의 토지(연해주)를 할양받았다. 이제 러시아는 한반도와 국경을 접하게 되었고, 조선 역사에 깊은 연관성을 갖게 되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언약 백성 유태인에게서 일어났다. 1860년, 그해 ‘시오니즘’(Zionism) 운동의 창시자인 테오도르 헤르츨(T. Herzl, 1860-1904)이 태어났다. 그런데 시오니즘운동은 그보다 백여년 전 사람인 ‘로스차일드’(M.A.Rothschild, 1744-1812)로부터 시작되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태어난 그는 세상 나라에서 가장 큰 힘을 발휘하는 힘은 돈이라는 것을 깨닫고, ‘오직 돈만이 유태인의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섯 아들을 유럽 각지에 보냈다. 장남은 아버지를 이어 프랑크푸르트에 남게 하고, 차남은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삼남(네이선 마이어)은 영국 런던으로, 사남은 이태리 나폴리로, 오남은 프랑스 파리로 보냈다. 그러면서 “돈으로 세계를 정복하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로스차일드의 야망을 잘 보여주는 것이 1860년에 있었던 ‘전 세계 이스라엘동맹대회’이다. 이 대회에서 ‘아도리프 클레뮤’(유대인이며 프랑스계 프리메이슨의 유력한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유대인이 오랜 옛날부터 원수같이 보아온 가톨릭주의는 이미 멸망했다. 이스라엘인의 땅에 던진 망(網)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확대되었고, 우리 성서에 적혀 있는 예언은 차례로 실현되어, 예루살렘은 우리 모두의 기도의 크고 높은 전각이 되었다. 유대 일신교의 정기가 온 세상에 높이 나부낄 때가 머지않은 것이다. ...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부(富)가 이스라엘 자손의 소유가 될 날이 머지않았다.”
로스차일드의 다섯 아들은 금융업을 하여 유럽의 금융을 석권하였다. 19세기 중반 이후 이들은 신세계인 미국으로 건너가 뉴욕 월가를 세계 금융의 중심지로 삼아 금융제국을 이룩했다. 그러고는 그들이 지닌 막대한 자본으로 석유, 철강, 통신, 언론, 영화 등 모든 분야를 움직이는 막강한 세력으로 미국을 넘어 세계를 움직이고 있다. 결국 유대인 로스차일드 가문은 하나님이라는 영권(靈權)보다 돈이라는 물권(物權)을 선택했고, 물권을 움켜쥐자 자신들의 옛 고토로 돌아가자는 ‘시오니즘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1860년,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64) 선생은 동학(東學)을 창시하여 민중 교화를 통해 역사의 주체가 민중임을 각성시켰다. 그동안 온갖 차별과 학정에 시달린 민중들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이와 더불어 홍수와 기근, 전염병이 창궐하자 조선 민중들은 굶주림을 해결하기 위해, 또는 지긋지긋한 이 나라가 싫어서 새로운 삶을 찾아 국경을 넘어 만주의 간도와 러시아령인 연해주로 떠났다. 그때가 1860년경이다. 대원군이 쇄국정책을 통해 나라 문을 굳게 닫았던 바로 그때, 그 떠남이 훗날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른 채 나그네처럼, 방랑자처럼, 순례자처럼 그렇게 나라 밖을 향해 떠났다. ‘언약 백성 유대인’이 디아스포라 시대를 접고 고토(팔레스타인)로 돌아가고자 했을 때(시오니즘운동), ‘새 언약 백성 한민족’은 고토(한반도)를 떠나 아리랑 민족의 디아스포라 시대를 시작한 것이다.
1860년을 기점으로 꼭 50년이 되는 1910년에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졌다. 이 사건은 민족적으로는 가장 치욕적이고 슬픈 역사적 사건이다. 하지만 디아스포라 한민족을 통한 열방 구원을 이루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로 보면 십자가를 진 이 해는 ‘희년’(禧年)이다. 이 해를 기점으로 한민족은 눈물겨운 고난의 짐을 지고 열방을 향해 떠났고, 그 물결은 일제 강점기 35년 동안 줄기차게 이어졌다. 1945년 해방 이후에도 한반도에서 일어난 숱한 고난의 역사를 통해 한민족의 흩어짐은 계속되었다. 거기에는 한민족의 흩어짐(디아스포라)을 통한 세계 선교라는 하나님의 초월적 섭리가 깃들어 있다(다음호에 계속).
